• 신편 한국사
  • 고대
  • 08권 삼국의 문화
  • Ⅳ. 문학과 예술
  • 6. 건축
  • 2) 궁실·연못
  • (2) 연못

(2) 연못

 삼국시대의 연못 특히 궁궐 안이나 그 부근에 굴착 축조된 연못에 관한 고대의 기록은 그다지 많지 않다. 그러나 근래에 이 시대 유적 발굴에 의해 당시의 연못 유구들이 성터나 궁궐 또는 사찰터 등에서 얼마간 발견되어 당시 연못 모습이 서서히 밝혀지기 시작하였다. 여기서는 발굴에 의해 알게 된 연못 유구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다.

 고구려:고구려의 원지에 관한 기록은 거의 없고, 고구려가 평양으로 도읍을 옮기면서 건립한 궁궐인 安鶴宮과 그 후진인 大城山城 안에서 몇몇 연못이 조사되었고, 평양으로 이장한 東明王陵 서쪽 약 800m 떨어진 저습지에서 속칭 眞珠 못이 조사된 바 있다.

 大城山城 안에는 원래 99개의 연못이 있었다고 전하며,430)≪新增東國輿地勝覽≫권 41, 平壤府 山川. 현재 지표관찰에 의해서도 백 수십 곳의 연못자리를 찾을 수 있고 그 가운데 몇 곳은 발굴되어 복원되기로 했다.431)전제현,<대성산못발굴중간보고>(≪고고민족≫3, 1964), 46∼51쪽. 대성산성은 그 동북변 중앙에 위치한 장수봉을 최고봉으로 동서 2,300m, 남북 1,600m 정도의 부정마름모꼴이며 동북변과 서북변은 험준한 절벽과 급경사지이며 서남쪽을 제외한 삼면이 산악 능선에 둘러싸여 자연적인 요새로서 성내 중앙부 평지에는 이천호와 동천호가 있다. 발굴된 연못은 장수봉과 그 서쪽의 을지봉의 두 능선 사이와 성벽 남변 중앙의 소문봉 동쪽 능선에 만들어진 군사용 연못으로 보이는 못들이다. 장수봉과 을지봉 사이 중간에서 좀 남쪽에 있는 구룡못을 시작으로 장수못·사슴못·형제못·잉어못들이 서남쪽으로 내려오면서 만들어졌으며, 이들 끝 평지에 동천호가 있다.

 발굴된 연못은 을지봉 서쪽의 5개와 소문봉 서쪽의 2개였다. 을지봉 서쪽에는 잉어못(1호 못)과 장수못 서쪽 30m 떨어진 2호 못, 그리고 형제못(3호 못)과 그 밑의 4호 못, 4호 못 서북쪽 50m 떨어진 5호 못이며, 소문봉 서쪽의 6호와 7호 못이다. 이들의 평면은 모가 둥근 방형 또는 장방형이며 그 크기는 잉어못이 동서 37m, 남북 34m로 가장 컸고, 2호 못은 일변 18m, 형제못은 동서 25m, 남북 20m이고, 4·5호 못은 이와 비슷했다. 6호 못은 동서 42.25m, 남북 10m의 긴 못이었고, 7호 못은 동서 15m, 남북 8m로서 가장 작았다.

 대부분의 못은 길이 80㎝, 넓이 50㎝, 두께 30㎝ 내외의 비교적 큰 돌을 진흙과 막돌을 섞어 굳게 다져서 계단식으로 쌓았고, 바닥에는 진흙과 잔돌을 섞어서 다진 위에 자연석을 깔고 있었다. 이들 연못의 호안을 계단식으로 쌓은 것은 못 수위에 따라 항상 물을 쓸 수 있도록 한 것으로 보인다432)≪三國遺事≫권 2, 武王.(<그림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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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3>제3호 못
<그림 3>제3호 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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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학궁에서는 서궁 남쪽의 정원에 조산을 파고 들어간 괴석을 배치한 표주박 모양의 연못이 있었던 것 같으나, 확실한 보고가 없고, 궁성 동남 모서리에는 장변이 70m정도의 장방형 연못이 있었다. 그러나 이 못이 정원의 못인지 또는 수구문 가까이에 있는 것으로 보아 集水池인지 확실치 않다.

 진주못은 그 평면이 사다리꼴로, 토축한 남쪽 뚝은 높이 2.4m, 폭 15m이며 북쪽 뚝은 논두렁 정도로 남았고, 동쪽은 그대로 산으로 이어지고 서쪽변은 밭과 길이 되어 그 윤곽이 뚜렷하지 못하고 못 깊이는 4m가 넘었다. 못 안에 네개의 섬이 있고, 그 높이는 4m가 넘는 것에서 2m정도의 것이며, 섬의 직경은 16m에서 12m정도였다. 그러나 이 못의 원형을 밝히는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원형을 정확히 알 수는 없었다(<그림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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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4>진주지의 실측도
<그림 4>진주지의 실측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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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제:백제는≪삼국사기≫에 의하면 진사왕 7년(391)에 궁궐을 중수하고 못을 파고 조산하여 진기한 새와 화초를 길렀다고 했고,433)≪三國史記≫권 25, 百濟本紀 3, 진사왕 7년. 무왕 35년(634)에는 궁 남에 못을 파고 20여 리에서 물을 끌어들여 못 가에 버드나무를 심고 못 안에 方丈仙山을 모방한 섬을 만들었다고 하였다.434)≪三國史記≫권 27, 百濟本紀 5, 무왕 35년. 여기서 말하는 못은 속칭 宮南池라고 하며 부여읍 東南里 논에 지금도 그 못 호안석축으로 보이는 유구가 남아있다. 현재 복원된 궁남지는 윈래의 못과는 직접적인 관계없이 만들어진 것이다.

 발굴에 의해 밝혀진 연못은 공주산성에서의 두 못과 부소산 남쪽 기슭에서 발견된 못 그리고 정림사지 남쪽과 미륵사지 남쪽에서 발견된 못들이다. 공주 궁궐의 진산으로 알려진 공산성 북변 성벽 밖이며 금강에 접근한 곳에서 동서 15.3m, 남북 12.3m의 방형에 가까운 깊이 7.7m의 연못이 발견되었다. 호안석축은 사각형으로 거칠게 치석된 석재로 정교하게 쌓고 있었다. 이 못은 서변과 동벽은 못 밑으로 내려갈 수 있게 계단식으로 쌓았고, 남벽과 북벽은 견고하게 약간 경사지게 쌓았으며, 바닥에는 돌을 깔고 있었다. 또 공산성 정상부인 雙樹亭 앞 광장 남쪽에서는 현 지표아래 1.3m정도에서 상부 석재가 나타나 못의 크기는 직경 7.3m, 바닥 직경 4.8m, 깊이 3m의 원형 深鉢形 연못이 발견되었다. 호안석축은 부정형의 할석으로 17∼20단정도로 쌓았고, 바닥에는 일변 40∼50m, 두게 7∼10㎝의 비교적 큰 할석을 깔고 있었다. 이 연못 부근에는 크고 작은 건물터가 발견되어 조사자는 이 곳이 왕궁터로 추정하고 있으나 이설도 많다435)≪公山城百濟推定王宮址發掘調査報告≫(公州師範大 博物館, 1987), 52∼53쪽.(<그림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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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5>공주산성 연못 평면도
<그림 5>공주산성 연못 평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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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여에서는 扶蘇山 남쪽 기슭인 舊부여박물관 정문 앞에서 현 지표아래 1m에서 못의 호안석축이 나타나 남북 6.25m, 동서 폭이 6m정도까지 확인되고 더 이상 발굴되지 못한 연못이 발굴되었다. 호안석축은 잡석의 면을 안으로 고루어져 4∼5단으로 높이 90m정도이고 바닥에서는 백제시대의 기와와 금도금된 은제 귀거리 1점, 木簡 2점 開元通寶 2점이 발견되었다. 이 부근은 당시의 궁궐터로 지목된 곳으로, 출토유물 등으로 보아 궁궐내에 있었던 연못의 일부로 보고 있다436)≪扶餘宮北里百濟遺蹟發掘調査報告(1)≫(忠南大 博物館·忠淸南道廳, 1985), 9∼10쪽.(<그림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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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6>扶蘇山南麓蓮池
<그림 6>扶蘇山南麓蓮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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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0년에 발굴된 정림사 중문터 앞 광장에서 사원에 진입하는 도로에 의해 동·서로 갈라진 방형의 연못이 발견되었다. 못은 중문터 남쪽 10여 m에 있던 추정 남문터 바로 앞에 있었다. 동쪽 못은 동서 15.3m, 남북 11m의 장방형이며 서쪽 못은 일변 11m정도의 방형이었다. 못의 깊이는 모두 40∼50㎝로 얕았다. 못은 서안과 북안에는 30∼40㎝의 잡석을 2∼3단 쌓았고, 동안과 남안은 땅을 판 그대로를 못 기슭으로 삼았다. 연못 바닥에서는 백제의 와당과 문양전편을 비롯하여 토기편이 출토되었고, 토기편 속에는 후대에 속하는 것도 많았다437)≪扶餘定林寺址蓮池遺蹟發掘報告≫(忠南大 博物館, 1987).(<그림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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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7>정림사지 앞 東·西蓮池 평면 실측도
<그림 7>정림사지 앞 東·西蓮池 평면 실측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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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0년부터 시작된 彌勒寺址 발굴에서 미륵사 남문터 앞 좀 떨어진 곳에서 거대한 연못 북변 호안석이 나타났다. 호안 동서 폭은 150m이고, 못 바닥은 지표하 2m에 깊은 곳은 4m나 되었고 호안은 작은 돌을 깔고 완만한 경사로 만들어졌다. 못 안에서는 백제와 통일신라의 기와들과 토기들이 발견되었다. 미륵사 창건연기설화에 있는 큰 못을 메우고 절터를 만들었다는438)≪三國遺事≫권 2, 武王. 그 못의 일부인지 아직은 알 수 없으나 그의 동쪽과 남쪽의 호안선은 확인되지 않았고, 남쪽에서 중원 남문으로 통하는 폭 약 50m의 진입로 좌우에 장방형의 연못은 통일신라시대에 들어서 만들어진 것이 확인되었다.439)≪彌勒寺≫Ⅱ(국립문화재연구소, 1996), 158∼173쪽.

 신라:고신라 궁궐에 관련된 연못의 기록은 찾을 수 없고, 유적으로 발견 조사된 연못도 없다. 다만 月城의 토성 동변에서 북변에는 垓子가 있었고, 그 가운데 동변 해자는 인공적으로 축조된 것이고 북변의 것은 습지를 이용한 자연 해자였다. 이 동변의 해자는 臨海殿을 건립하고 이곳과 月城 안 궁궐과를 연결하는 통로를 위해 해자 동안 한 곳을 개축하여 서쪽으로 밀어내어 해자의 폭을 좁혀서 서안과의 사이에 장대석을 건너놓은 작은 돌다리가 있었다. 따라서 원래 해자는 임해전 건립 이전에 축조된 것임이 확실하고, 어쩌면 월성 축조 당시에 만들어진 가능성도 있다. 해자는 성곽에 따라 방위시설의 하나이기는 하나 그 축조방법은 당시의 연못 축조방법과 비슷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해자는 안쪽 즉, 토성 바깥 밑부분은 토축된 성벽 뿌리에 큼직한 괴석으로 5∼6단을 쌓은 석축이 있었고, 동안은 장방형으로 거칠게 치석한 석재를 4∼5단 쌓아 올리고 있었다.

<金正基>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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