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8권 삼국의 문화
  • Ⅳ. 문학과 예술
  • 6. 건축
  • 3) 성곽
  • (2) 백제 성곽

가. 초기 성곽

 ≪삼국사기≫백제본기 始祖 溫祚王조에 의하면 고구려계인 沸流·溫祚 집단들이 河南慰禮城에 정착했음을 전하고 있다. 이 하남위례성은 북쪽으로는 漢水가 있고, 동쪽으로는 높은 산이 있으며, 남쪽에는 비옥한 들판이 바라다 보이고, 서쪽에는 큰 바다로 막혀 있는 위치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러므로 하남위례성은 한수 즉, 한강 유역에 있는 성터일 것이라고 하는 추정을 낳게 한다. 한강 유역의 유적은 1975년에 江東區 石村洞 3·4·5호분에 대한 조사가 이루어졌고, 1984년에는 석촌동 3·4호분의 재조사, 1984년부터 89년까지 夢村土城의 발굴 조사를 통해 한성시대 백제의 중심지가 이 지역을 벗어날 수 없을 것이라는 결론에 이르고 있다. 이 지역에는 峨嵯山城·風納洞土城·몽촌토성·二聖山城·南漢山城·不岩山城·北漢山城들이 있는데, 이 가운데 몽촌토성과 풍납동토성이 가장 많이 조사되어서 학계에 알려진 바 있으며, 이곳이 하남위례성에 비정될 수 있다고 하는 의견으로 집약되고 있다.

가) 몽촌토성

 몽촌토성은 표고 44.8m의 낮은 구릉의 자연지세를 이용해서 주로 판축으로 축조한 토성이다. 성은 남·북의 길이 730㎝, 동·서의 폭 540m, 전체 성의 둘레는 2,285m이다. 성의 외벽은 구릉의 경사면을 깎아내어 급경사의 段을 만들고 두 번째 단에 木柵을 설치했는데, 이 급경사의 단은 성벽 정상부에서 基底部까지 2∼3회 되풀이되다가 垓字로 연결된다. 동북쪽으로 270m 뻗어나가게 부설된 외성은 그 높이가 11∼38m로서 최초 축조 당시는 지금보다 3∼4m 더 높았던 것으로 추측되며 북측 경사면에는 本城과 같이 人工을 가했고, 정상부에는 목책을 설치했다. 5차에 걸친 발굴 조사로 집자리 13기, 저장공 29기 등의 백제시대 유구와 벼루·와당·馬具·말뼈 등이 출토되었으며, 西晉時代(265∼316)의 灰釉錢文陶器片 등이 출토되어 이 城이 3세기말까지 올라갈 수 있으며 중심 연대는 3∼5세기경으로 추정하고 있다460)成周鐸,<百濟初期城址>(≪百濟城址硏究≫, 東國大, 1984).
―――,≪漢江流域百濟初期城址 再齣≫(忠南大, 1995).
(<그림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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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4>몽촌토성 및 주변 성곽 분포도
<그림 4>몽촌토성 및 주변 성곽 분포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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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풍납동토성

 풍납동토성은 몽촌토성 동북쪽 약 2㎞ 떨어진 서울 송파구 풍납동에 위치하고 있다. 성의 둘레는 약 3.5㎞에 달하는 바 한강 유역 백제 城址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큰 토성이다.

 1966년 이곳을 조사한 보고에 의하면, 이 성은 내부에서 나오는 토기편의 양이나 기타 건축관계 유물의 성격으로 미루어 보아 방어용 성이라고는 하지만 평시에는 많은 일반민이 살고 있었던 半民半軍的 邑城이었다고 생각된다. 이 토성의 정확한 최초 축조 연대는 알 수 없지만 위례성과 거의 동시에 축조된 초기 것임은 틀림없다고 보고 있다.

 비교적 원형을 보존하고 있다고 생각되는 북벽의 경우 정상에서 약 2m 내려간 위치에서 1단의 넓은 단을 만들었고, 거기서부터는 경사를 죽여서 基部를 만들고 있으며, 성벽 기부에서의 폭은 30m 가량이나 되고 있다. 그리고 단면에서 보면 돌은 거의 없고 고운 모래뿐인데, 그것을 엷은 층으로 한층 한층 다져서 쌓아 올라가고 있다.461)金元龍,≪風納里土城內包含層調査報告≫(考古人類學叢書 제3책, 서울大, 1967), 6∼7쪽.
崔夢龍·沈正輔,<漢城時代 百濟의 都邑地와 領域>(≪百濟史의 理解≫1991, 學硏文化社), 80쪽.
최근에 風納洞土城의 둘레는 3,470m이며, 백제 초기 왕성으로 보아서 무리가 없다고 하는 견해가 제시되고 있다.462)李亨求,≪서울 風納洞土城〔百濟王城〕實測調査硏究≫(百濟文化開發硏究院,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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