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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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08권 삼국의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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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5) 삼국 및 가야 성곽의 성격

(5) 삼국 및 가야 성곽의 성격

 이상 고구려·백제·신라 및 가야의 성곽을 살펴보면서 다음과 같은 점을 생각할 수 있다.

 첫째, 고구려 초기 성곽인 五女山城과 下古城子古城이 고구려 건국 초기의 근거지로 제시하고 있다. 두 성의 거리가 약 10㎞ 떨어져 있는데, 평지성과 산성이 한 세트를 이루는 서로 관련이 있는 성곽으로 인정받자고 하면 좀더 정밀 조사가 필요하다.

 둘째, 고구려 전기 성곽인 國內城과 尉那巖城(丸都城, 山城子山城)은 평지성과 산성을 결합한 성곽으로 의견의 통일을 보고 있다. 국내성의 경우 漢代縣治所의 土城址에 석재로 개축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국내성과 위나암성은≪삼국사기≫의 기록과 일치해서 축성 연대가 확실한 최초의 도성지라고 할 수 있다. 고구려는 이곳에서 평양성으로 천도할 때까지 약 424년 동안 정도하고 있었다.

 셋째, 고구려 중기 성곽인 평양성(전기 평양성)은 安鶴宮址를 근거로 해서 대성산성이 한 세트를 이루고 있다고 하는 견해와 청암리토성과 대성산성이 한 組를 이루고 있는 성곽이라고 주장하는 의견이 대립되어 내려오고 있다. 조사를 통해서 성의 규모와 유적 등이 많이 밝혀진 편이나 아직까지 단정을 내릴 단계까지는 이르지 못하고 있다.

 넷째, 고구려 후기 성곽인 평양성(후기 평양성 = 장안성)은 비교적 조사가 잘 이루어져 북성·내성·중성·외성 등의 확인과 아울러 축성 구조로 보아 내·외성을 동일 시기 것으로 판단 3구분하는 의견도 있다. 아직도 왕궁지의 위치문제, 坊條制 문제 등의 이견이 남아 있다.

 다섯째, 고구려의 산성은 압록강 이북과 이남에 수백여 개소 이상 분포되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구체적인 조사는 많이 진행되지 못하고 있는 단계이다. 이들 산성들은 규모가 크고 포곡식 산성이다. 앞으로의 조사에 기대할 수 밖에 없다.

 여섯째, 백제 초기 한성시대의 근거지로 알려진 성곽은 현 단계로서는 몽촌토성과 풍납동토성으로 집약할 수 있다. 몽촌토성의 경우 비교적 잘 조사되어서 3세기경까지 상회하는 자료를 확보하기까지는 했으나 왕궁지의 위치가 성안에 있었는지 성밖에 있었는지 아직도 묘연한 상태이다. 풍납동토성지는 실측조사 결과 동서가 길고 남북이 짧은 장방형 토성이다. 규모와 출토 유물의 격이 높은 점으로 보아 왕성일 가능성이 있다고 한다. 그러나 동·서가 길고, 남·북이 짧은 도성은 거의 없으므로 그 의견에 동의할 수 없는 점도 있다. 성안에서 왕궁지는 찾아내지 못하였다. 백제 초기의 도성지가 하남위례성이므로 한강 유역을 떠나서 그 근거지를 찾아볼 수 없는 것은 사실이며, 이 성들과 인접한 石村洞일대에는 백제 고분군이 있어 이들 성 가운데 한 곳이 백제 초기 한성시대에 왕성일 가능성이 높다.

 일곱째, 백제 중기 성곽인 웅진성의 경우 발굴을 통해서 많은 사실이 밝혀지고 있다. 그러나 왕궁지가 성안에 있었는지 성밖에 있었는지 또 복합식 산성인지 아닌지 아직까지 확정할만한 자료를 마련하지 못하고 있다. 토성 735m는 백제시대 축조한 것이 분명하나 석성 1,925m는 조선시대에 축조한 것이므로 석성 축조에 앞서 백제시대에 선행해서 축조되었는지는 현단계로서는 알 수 없다. 성안에서 발굴 조사된 2동의 건물지만으로서는 왕과 왕비, 세자, 궁녀 등이 거주할 공간과 政廳으로서는 그 규모가 너무 협소해서 성 밖에서 왕궁지를 찾아보아야 할 것이라고 하는 주장이 있다.

 여덟째, 백제 후기의 사비도성은 부소산성과 나성 및 왕궁지를 찾기 위한 조사에서 많은 사실을 밝히고 있다. 즉, 부소산성은 백제가 사비로 천도하기 전에 축조한 산성이며, 백제시대에는 포곡식 산성이 축조되고, 군창지산성과 사비루산성의 내성은 통일신라시대에 축조되었으며, 군창지산성을 동·서 2구로 구분하는 196m의 토성은 조선시대에 축조되었음이 밝혀졌다. 왕궁지는 산성 앞의 구 부여박물관 자리 부근일 것이라고 하는 사실, 계획된 도로망을 일부 갖추고 있었다고 하는 사실 및 동문지의 확인을 가져오는 성과를 거두기도 하였다. 그러나 왕궁지의 정확한 위치, 5部制의 구획문제, 羅城 축조의 절대연대를 확인할 만한 조사와 청마산성의 조사 및 주변산성의 조사문제 등 많은 문제가 남아있어 역시 앞으로의 조사에 기대를 한다.

 아홉째, 신라는 현재 경주에서 900여 년 동안 한자리에 정도하고 있었으므로, 그 구조가 복잡해서 진상을 밝히기가 더욱 어려운 실정이다. 금성과 월성 및 조방제 문제 등 아직까지 명쾌한 해답을 줄만한 조사가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 조방제의 실시 연대도 문헌에 근거를 두고 연대를 제시하고 있는 실정이다. 조방은 360坊 35里(55리)로 추정 복원하고 있는 것이 통설로 되어 있으나 역시 결정적인 고고학적 단서는 밝혀지지 않고 있다. 나성격인 명활산성·남산신성·서형산성·북형산성·부산성 등은 신라의 서울인 경주를 수호하는 외곽성임이 분명하나 정밀 조사는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 축성비문의 수습이 단편적이나마 축성의 사실을 뒷받침해 주고 있다. 신라의 전초기지 가운데 삼년산성은 축성 연대가 확실한 산성이며 지표 조사와 문지 조사를 통해서 일부 밝혀지고 있다. 백제가 성을 線의 조직으로 국방에 임했다고 하면, 신라는 성을 點의 조직으로 공격적인 성 배열을 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열째, 가야시대의 왕궁지와 산성에 대해서는 삼국시대 도성지 조사에 비해서 더욱 미진한 상태에 있다. 6가야 모두 정확한 왕궁지의 위치조차 확인되지 못하고 있다. 다만 성산산성·주산산성·분산성 등이 지표 조사를 통해서 알려졌을 뿐이다. 분산성의 복합식 산성은 가야의 독특한 성제이며, 백제산성과는 어떤 관련이 있는지 앞으로의 과제로 미루어둔다. 가야는 고구려·백제와 마찬가지로 왕궁 배후에 산성을 배치하는 공통점이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즉, 평지성과 산성이 결합한 성제를 채택하고 있는 공통점이 있다. 신라는 지역의 특징상 평지성만을 고수해 내려오다가 5세기 후반에 산성을 축조하기 시작 6세기경에 이르러서야 주변에 본격적으로 산성을 축조하여 외곽성 역할을 하게 하고 있다.

 현재까지의 연구 및 조사 성과로서는 성곽과 국가의 기원 관계를 명확하게 밝혀주는 데까지 이르지 못하고 있다. 이들 과제를 비롯해서 삼국의 성곽 및 가야의 성곽 발달과정에 대해서는 이제 초보적인 조사 단계에 있으므로 앞으로의 연구와 조사 성과에 기대를 한다.

<成周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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