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8권 삼국의 문화
  • Ⅳ. 문학과 예술
  • 7. 고분
  • 2) 백제 고분
  • (1) 토광묘

(1) 토광묘

 토광묘에는 시체를 바로 매장한 순수토광묘와 토광에 木棺을 안치한 토광목관묘, 그리고 토광에 목관과 목곽을 안치한 토광목곽묘가 있다. 이 외에 매장주체부는 위의 토광묘들과 다를 바 없으나 토광의 주위에 방형 또는 원형의 도랑(周溝)을 돌린 형태의 주구토광묘가527)姜仁求,<周溝土壙墓에 관한 몇 가지 問題>(≪정신문화연구≫17-3, 1994). 최근 발견되고 있다. 석촌동·가락동 토광묘의 경우를 보면 淺壙에 한 두개의 부장 유물과 함께 목관을 사용하여 시체를 매장하였다. 석촌동 3호분의 동쪽 A지역의 경우 5기의 토광묘가 확인되었는데, 토광의 평면형은 장방형으로, 모서리는 圓方形으로 처리하고, 長軸은 5기 중 4기는 대략 동서 방향이며, 頭向을 동으로 두었다. 규모는 가장 큰 1호분의 경우 길이 2.26m, 너비 1.04m, 깊이 0.3m이고, 목관은 길이 1.81m, 너비 0.6m, 높이 0.2m의 규모인데, 각 면에 1매의 큰 판자를 사용하여 조립한 형식이다. 부장품으로는 소형 도자 1개 短頸壺 1개가 출토되었을 뿐이다. 이들 토광묘는 평면상으로는 서로 2∼3m의 거리를 두고 밀집 상태로 분포되어 있고, 층위도 3층으로 되어 있어서, 필자는 이것들이 하나의 큰 분구 안에 포장된 것으로 본 바 있다528)姜仁求,<漢江流域 百濟古墳의 再檢討>(≪韓國考古學報≫22, 1989)..

 한강 유역에서 토광묘가 발견된 예는 극히 드물다. 그 외 지방에서는 서산·부여·천안·진천·청주 등지에서 발견된 일이 있으나, 서산·부여만 순수토광묘이고 그 외 지방은 모두 주구토광묘이다. 瑞山郡 大山面 明智里의 토광묘는 야산의 南斜面에 분포하고, 소형의 천광묘이다.529)金永培·韓炳三,<瑞山郡大山面 百濟土壙墓 發掘報告>(≪考古學≫2, 1969). 부여에서는 草村面 素沙里530)安承周·朴秉國,<百濟古墳文化의 硏究-扶餘郡草村面素沙里 百濟土壙墓를 中心으로->(≪百濟文化≫5, 1971).와 窺岩面 新里531)姜仁求,<扶餘新里의 百濟土壙墓>(≪考古美術≫126, 한국미술사학회, 1975).에서 발견되었는데, 야산의 남사면에 분포되어 있다.

 이러한 구조와 형식의 토광묘는 대동강 유역과 압록강 유역에서는 뚜렷하게 조사 보고된 일이 없지만 遼河 유역과 송화강 유역에서는 더러 알려져 있다. 예를 들면 遼寧省 西岔溝 유적과 吉林省 楡樹縣 老河深 유적이 그것이다. 이 유적들과 직접 연결을 시키기에는 거리가 좀 멀기는 하여도, 장차 대동강 유역과 압록강 유역의 유적이 알려질 것이란 예상하에 관련을 지어 본다.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