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8권 삼국의 문화
  • Ⅳ. 문학과 예술
  • 7. 고분
  • 2) 백제 고분
  • (2) 토축묘

(2) 토축묘

 土築墓는 종래의 토광묘에서 분리하여 새로 부여된 명칭이다. 학계에서는 일반적으로 石槨이나 석실처럼, 돌을 사용하지 않은 구조의 매장시설에 대하여는 무조건 토광묘로 분류하여 왔다. 그러나 토광묘라고 하는 것은, 중국에서 소형은 특별히 土坑墓라고 부르고 있듯이, 지면을 파서 壙을 마련하고, 시체를 안장하고, 다시 그 위에 塡土와 封土를 덮는 구조를 말하는 것으로, 인류가 고안한 최초의 매장시설인 것이다. 그런데 토축묘라고 하는 것은, 매장시설을 지면 아래에 마련하는 것이 아니고 지면 위 분구 중에 축조하는 土葬으로, 여기서는 土壙이 존재하지 않는다. 구조만 이렇게 차이가 있는 것이 아니라, 葬法에 있어서도 큰 차이가 있다. 즉 토광묘의 경우는 1墳 1穴 1人 매장으로 單葬을 원칙으로 하고 있는 데 반하여, 토축묘의 경우는 1墳 2人 이상을 매장하여 多葬을 원칙으로 한다. 또 토광묘는 순수토광묘 외에 葬具로 목관과 목곽이 들어가지만, 토축묘의 경우는 목재든 석재든 槨시설은 일체 용납하지 않고, 대신 분구의 한 부분을 고르고, 그 위에 바로 시체를 놓는 토장, 판자만을 깔고 시체를 올려놓는 敷板葬, 자갈 등 작은 돌만을 한 겹 정도로 깔고 시체를 올려놓는 敷石葬, 숯을 얇게 깔고 시체를 올려놓는 敷炭葬, 이것들과는 달리 甕棺에 시체를 넣는 옹관장도 있다.

 토축묘의 대표 유적으로서는 토분의 경우 가락동 2호분을 들수 있다. 이 고분은 모두 4기의 매장시설이 한 분구 안에 들어 있는데, 토장·부판장·부석장·옹관장 등이 층위를 이루고 수용되어 있으며, 분구는 방대형으로 표토에는 葺石도 시설하였다. 석촌동 破壞墳 등도 같은 종류에 속하는 토축묘이다. 石墳에 속하는 토축묘로서는 석촌동 A호분·석촌동 1호분·석촌동 4호분532)서울大 박물관·고고학과,≪石村洞積石塚發掘調査報告≫, 1975. 등이 있다.

 석촌동 4호분은 백제 古墳路를 사이에 두고 석촌동 3호분과 마주 바라보는 위치에 있고, 복원되어 三段築의 고구려식 적석총의 외관을 나타내고 있다. 구조는 羨道가 달린 割石造 橫穴式 石室形의 내부를 점토로 충진한 것과 비슷하다. 그리고 版築한 점토층 안에는 3기의 埋葬穴을 만들었는데, 이 시설들이 모두 지상 분구 중에 있어 粘土槨으로 판단된다. 이 고분의 당초의 구조는 점토를 版築하여 분구를 올린 토축묘인데, 후대에 積石을 올려서 고구려식의 적석총으로 만든 것으로 생각된다. 그렇지 않다면, 고구려식 적석총의 내부에 점토판축은 도저히 이해하기 어려운 구조인 것이다. 따라서 이 형식은 한강 유역에서 토착의 토축묘에 고구려식 적석총이 가미된 새로운 형식의 積石土築墓 또는 石村洞式 적석총(한강 유역 지방식)으로 명명하여도 좋을 것이다.533)姜仁求,<初期 百濟古墳의 檢討>(≪考古學으로 본 韓國古代史≫, 學硏文化社, 1997), 237∼238쪽.

 석분 계통의 토축에는 각기 특징이 있다. 즉 A호분은 부석장한 봉토분에 적석총이 후축된 형식이고, 1호분의 南墳은 부석장의 소형 분구에 적석총이 후축된 형식이며, 北墳은 토장(토광)의 봉토분에 적석총이 후축된 형식으로 되어 있다.534)위와 같음.

 다음으로 토광묘와 토축묘의 연대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각 고분의 형식에 대한 상대적 편년을 시도하여 보면 다음과 같다. 석촌동 고분군에서 축조 순서를 가릴 수 있게 된 것은, 고분들이 파괴 교란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석촌동 3호분 동쪽지역에 대한 발굴 조사가 행하여지고, 거기서 확실한 층위가 밝혀졌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이 지역은 좁은 면적에 밀집되어 있는 적석총·토광묘·토광적석묘·옹관묘·석곽옹관묘 등의 여러 매장시설들이 상하의 층위를 나타내고 있다. 즉 최하층으로부터 보면, 대형 토광묘와 토광묘 1호분·2호분은 생토층을 파고 광을 만들었으며, 그 위 중간층의 분구 중에 토광묘 3호분·4호분·5호분 등이 있다. 그것들과 같은 층위에는 역시 토광묘 6호분·7호분·8호분·9호분이 석곽옹관묘·옹관묘와 함께 평행으로 있고, 이 중간층 위에 다시 토광묘 10호와 토광적석묘·옹관묘 3호분·4호분·5호분이 있다. 그리고 현 지표인 그 위에 적석총 3호분·적석총 破壞墳·석곽묘 등이 있다. 그러므로 여기의 遺構들은 각기 다른 4개의 층위를 이루고 있으며, 이것은 바로 이들 매장시설의 상대 편년이 되는 것이다.535)서울대학교박물관,≪石村洞3號墳東쪽 古墳群整理調査報告≫, 1986.

 이것을 기초로 한다면, 대형 적석총인 3호분과 4호분은 가장 늦은 시기에 축조된 것이다. 그리고 연대가 가장 올라가는 것은 토광묘이고 그 다음이 토장과 부석장들이 된다. 그런데 석촌동 A호분·1호분·5호분·4호분 등은 일단 토축묘로 형성된 뒤에 적석총으로 변조한 것이므로, 그것들의 최후의 연대는 적석총이 들어와서 영향을 미친 후의 시기가 되는 것이다. 여기에 적석총의 연대가 필요하게 되는 것이다.536)위와 같음.

 그런데, 4호분의 연대는, 구조에서 보는 것과 같이 羨道가 부설된 石室形이라는 점에서 이 지방 횡혈식석실분의 상한 연대를 넘을 수 없으므로, 결국 4∼5세기로 추정된다.

 석촌동 1호분의 경우는 상부에 있는 부석장(석곽묘)에서 나온 회백색 연질토기가 늦어도 4세기초 이후로는 내려가지 않으므로, 결국 그 하층 위에 있는 1호분은 3세기의 후반기가 될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한편 토축묘의 전형적인 유적으로 볼 수 있는 가락동 2호분은 黑色磨硏土器壺 등으로 미루어 2∼3세기대로 추정한 바 있다.537)尹世英,<可樂洞百濟古墳第一第二號墳發掘調査略報>(≪考古學≫3, 1974), 139쪽.
姜仁求, 앞의 글(1997), 263쪽.

 이상은 불확실한 요소가 있고, 또 대략적인 연대 추정이라고 생각되지만, 가락동·석촌동의 고분은 대략 2∼5세기 사이에 축조된 것이라는 것만은 틀림없는 것이다.

 토축묘는 영산강 유역에서 다수가 발견된 것 이외에는 대동강과 압록강 유역, 요령성 지방과 中原의 황하 유역에서도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양자강 유역에서는 土墩墓라는 유적으로 다수 분포되어 있으며, 太湖부근과 寧鎭산맥 부근에서는 신석기시대 후기로부터 戰國시기까지 오랜 기간 전승된, 이 지방 특유의 매장 형식인 것이다.

 대표적인 유적으로 江蘇省의 句容유적을 예로 들어 그 특징을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묘지를 하천과 호수변의 구릉상 또는 평지에 택하고, 매장시설은 지상에 축조하며, 多葬이며, 葬法은 토장을 원칙으로 하고, 간혹 옹관이나 자갈바닥·목판바닥을 만들기도 하나, 특징적인 것은 木質의 관곽을 전혀 사용하지 않는 점이다. 그리고 追加葬할 때마다 분구를 확대하고, 부장품은 토기가 주종을 이루고 생산 공구나 장신구가 없는 간루한 편이다.538)姜仁求,≪三國時代墳丘墓硏究≫(嶺南大 出版部, 1984), 9∼4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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