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8권 삼국의 문화
  • Ⅳ. 문학과 예술
  • 7. 고분
  • 2) 백제 고분
  • (3) 주구토광묘

(3) 주구토광묘

 周溝土壙墓는 토광의 주위에 周溝(도랑)를 돌린 형태인데, 한반도내에서 처음 알려지는 고분이며, 현재는 錦江水系와 그 부근 지방인 天安 淸堂洞539)국립중앙박물관,≪淸堂洞≫, 1993.·鎭川 松斗里540)忠北大 박물관,≪鎭川松斗里遺蹟發掘報告書≫, 1991.·淸州 松節洞541)忠北大 박물관,<학술조사보고 5>(≪年報≫2, 1993).·公州 下鳳里542)이한상,<公州下鳳里遺蹟發掘調査報告>(≪박물관신문≫275, 국립중앙박물관, 1994). 등지에서 발견되고 있다. 유적의 명칭에 대하여 각 보고서에서는 ‘原三國時代 墳墓’ ‘原三國時代 木棺墓’ ‘周溝를 갖춘 墳墓’ 등의 명칭을 사용하고 있고, 일본학계에서는 같은 구조형식의 고분을 ‘方形(圓形)周溝墓’라고 하는 등 통일되어 있지 않다. 필자는 이 형식의 고분이 앞으로 점차 많이 출토될 것으로 보고, ‘주구토광묘’라는 새로운 명칭을 제안한 바 있다.543)姜仁求, 앞의 글(1994).

 주구의 형상에는 一面溝(一字형), 二面溝(ㄱ자형과 ㄴ자형), 三面溝(ㄷ자형), 四面溝(ㅁ자형), 圓形溝(◎자형) 등 다섯 종류가 있으며, 위치는 일면구와 이면구의 경우 토광의 위쪽에 주로 있다. 주구의 기능은 流水로부터 토광을 보호하는 防水의 기능이 가장 기본이고, 그 외에 묘역의 구획과 토광의 覆土用 흙의 채취 등의 기능과 용도가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매장 주체시설인 토광 내에는 목관과 목곽이 설치되어 있는데, 그것의 結構에 ‘ㅐ’자형 ‘ㅠ’자형 등의 방식이 보이고, 목관 내부에 구획을 설치하거나 공간을 연장하여 유물의 부장칸으로 사용하는 등 종래 일반적인 목관이나 목곽형과는 차이가 발견된다. 이와 같은 형식의 목관이나 목곽은 중국의 新疆 長城地帶·遼寧省지방 등지의 羌族·匈奴族 등 북방민족의 고분에서 발견되는 木框시설과 흡사하다.

 출토유물 중에는 토기와 靑銅帶具가 가장 중요한데, 대구의 다량 출토는 특징적이다. 종래 馬形帶鉤는 漢문화의 영향으로 간주되어 왔으나, 실제로 중국에서 출토된 대구 270여 개 중 마형대구는 1개도 포함되어 있지 않으며, 동물 전신을 표현한 문양과 간결한 조각 수법으로 미루어 볼 때 북방계 문화의 영향으로 추측된다.

 주구토광묘의 조영 시기는 대략 2∼4세기로 추정되며, 분포구역·주구의 존재·토광묘의 구조 형식·출토 유물의 형식 차이 등으로 볼 때, 한강 유역의 초기 백제의 문화와는 구별된다. 주구토광묘의 분포지역은 후기 마한의 중심지역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백제는 아직 지금의 경기도 구역에 머물러 있고, 4세기 중엽까지의 백제 영역은 安城川을 南限 경계선으로 하고 있었으며, 후기 마한도 끝내 영산강 유역까지는 미치지 못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 시기의 마한의 영역은 현재의 충남 및 충북의 서부, 전북, 전남의 북부지역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주구토광묘의 기원에 관하여 현재로서는 확언하기 어렵다. 한반도 내에서는 금강수계 유역과 그 부근 지방에서만 발견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동강 유역의 台城里에서의 가능성을 찾을 수 있고, 중국의 산서성에서 B.C. 4∼3세기에 속하는 주구토광묘의 실례가 발견되었으며, 주구토광묘의 木框과 馬形帶鉤 등이 장성지대와 요령성 지방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판단되어 주구토광묘의 기원은 중국의 북부지방에 있고, 그것이 대동강 유역으로 들어왔을 것으로 추측된다.544)姜仁求, 위의 글, 12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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