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8권 삼국의 문화
  • Ⅳ. 문학과 예술
  • 7. 고분
  • 2) 백제 고분
  • (4) 적석총

(4) 적석총

 석촌동·가락동에 현재 남아 있는 순수 積石塚(고구려식)은 석촌동 3호분이 유일하다. 이 고분은 基壇式 석곽적석총이며, 集安에서 많이 보이는 형식으로 밑변의 길이가 약 55.5m, 높이는 4.5m나 되는 대형 고분이다. 1974년 조사 이후 약 10년의 시간을 들여서 복원하였으나, 원형을 찾기에는 시기가 늦었던 것으로 보인다. 분구 上面과 내부는 민가의 건축과 철거시 이미 상당히 파괴되어 외형과 내부구조의 조사는 충분하게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석곽은 분구 상면 서북부에 치우쳐서 길이 200cm, 너비 150cm, 깊이 80cm의 과히 크지 않은 장방형 석곽이 발견되었으며545)金元龍·李熙濬,<서울 石村洞 3號墳의 年代>(≪斗溪李丙燾博士 九旬紀念韓國史學論叢≫, 지식산업사, 1987)., 내부는 4호분에서와 같은 土層으로 된 시설이었고, 봉토의 원형은 없고, 전부 돌로 채워졌다. 구조상으로만 볼 때, 집안의 太王陵·千秋塚과 같은 전형적인 고구려식 적석총임에 틀림없다. 따라서 석촌동 3호분과 같은 순수적석총과 석촌동 4호분과 같은 변형된 석촌동식 적석총, 즉 적석토축묘의 적석부는 압록강중류 지역의 고구려식 적석총이 남하하여 이루어진 것임에 틀림없다.

 석촌동 3호분의 연대는 분구의 형상이나 석곽의 구조 및 출토된 토기와 靑磁盤口壺 등을 근거로 할 때 4세기 전반으로 추정할 수 있다.546)姜仁求,<漢江流域의 土築墓社會>(≪考古學으로 본 韓國古代史≫, 學硏文化社, 1997), 260쪽.
김원용은 4세기 후반에서 5세기 초로 추정하였다(註 41 참조). 그러나 석촌동 3호분의 분구형식도 기단식 곽적석총으로 집안의 경우 4세기 전반에 유행하고, 흑색마연토기는 가락동 2호분에서 완전한 것이 나온 일이 있는데 3세기까지도 가능하며, 청자반구호도 녹색기가 있는 황색의 유약은 소위 원시청자라고 하여 서진과 동진에서 많이 제조되었다. 따라서 이러한 여러 측면에서 볼때 석촌동 3호분의 연대는 늦어도 4세기 중엽 아래로는 내려가지 않는다고 보여진다. 최근에 이 고분의 연대를 4세기 후반으로 추정하고, 被葬者를 近肖古王으로 보는 견해가 제출된 일이 있는데, 이에 대하여는 재고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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