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8권 삼국의 문화
  • Ⅳ. 문학과 예술
  • 7. 고분
  • 2) 백제 고분
  • (9) 전축분

(9) 전축분

 塼築墳은 기원 후 2∼3세기경 대동강 유역에서 유행한 후, 5세기 후반경 공주에서 다시 나타났는데, 이곳의 전축분은 대동강 유역의 그것과는 달리 중국의 南朝 揚子江 유역의 영향으로 이루어진 새로운 묘제이다.

 송산리 고분군은 왕릉군일 뿐만 아니라 웅진시기의 고분군을 대표하는 유적이다. 우선 묘지 선택부터 한강 유역의 고분과는 상이하다. 강변 야산의 南斜面 중턱에 묘지를 마련하고, 고분을 橫列로 배치한 것은 풍수지리 원리를 적극적으로 활용한 결과이다. 분구는 원형봉토분인데, 규모가 작고, 塼으로 축조되어 터널식 천정으로 된 매장주체 시설은 벽체가 지하로 내려 간 半지하식이다. 현재 완전하게 남아 있는 전축분은 송산리 6호분과 무령왕릉의 단 2기뿐이지만, 당시에는 여러 고분이 축조되었을 것으로 추측되고, 해방 전에는 교촌리에도 일부가 잔존하고 있었다.566)輕部慈恩,<公州におげる百濟の古墳1-8>(≪考古學雜誌≫23-7·23-9·24-3·24-5·24-6·24-9·26-3·26-4, 1933∼1936).

 송산리 6호분을 보면, 장방형 현실에 남벽 중앙에 연도를 부설하였는데, 천정형식은 터널형식으로 하였다. 그리고 1인용 관대를 현실의 동벽 가까이에 설치하였다. 동서남북 사면 벽에는 벽돌 위에 진흙을 바르고 그 위에 사신도를 그렸는데, 고구려 후기 평양지방에서 유행한 양식을 보이고 있어 흥미롭다.567)金元龍, 앞의 글, 186쪽.

 1970년에 발견 조사된 무령왕릉은 장방형 현실에 남벽 중앙에 연도를 부설한 형식으로서, 全面 棺臺를 설치하고, 천정은 6호분과 같이 터널형식으로 하였다. 벽체는 벽돌을 四平一立을 1단으로 하여 7단을 쌓고, 그 위는 曲面으로 하여 아치형을 만들었다. 그리고 벽체의 상단에 壁龕을 장벽에 2개, 북쪽 단벽에는 1개를 각각 만들고 등잔을 놓았다. 유물은, 왕과 왕비의 관을 중심으로 금제 관식·금제 이식·환두 대도·동경·동제 다리미·은제 탁잔·청자 광구 호 등 모두 2,600여 개의 많은 유물이 부장되었는데, 가장 특징적인 것은 買地券과 鎭墓獸이다. 매지권으로 피장자와 매장 경위 등을 알 수 있는 유일한 삼국시대 고분이 되었다. 이 능의 발견으로 백제의 역사와 문화는 말할 것도 없고, 동시대의 신라·고구려·가야·倭의 문화연구에도 좋은 기준이 되었다.

 송산리 고분군에서 특징적으로 나타나는 풍수지리형국의 묘지 선정·塼築式·전면관대·매지권·진묘수의 부장 등은 모두 중국의 南朝에서 크게 성행한 형식이 영향을 미친 것으로 생각된다.568)姜仁求,<百濟의 歷史와 思想>(≪考古學으로 본 韓國古代史≫, 學硏文化社, 1997), 302∼310쪽.
金元龍,≪韓國考古學槪說≫(一志社, 1986), 186쪽.
姜仁求,<中國墓制가 武寧王陵에 미친 影響>(≪百濟硏究≫10, 1979), 10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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