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8권 삼국의 문화
  • Ⅳ. 문학과 예술
  • 7. 고분
  • 3) 신라 고분
  • (4) 횡혈식 석실분

가. 구조와 형식

 ①횡구식 석실분은 출입시설의 구조 차이에 따라 2종으로 나누어진다. 하나는 출입할 때마다 벽을 헐었다 쌓았다 하는 閉塞式과, 출입할 수 있는 시설을 먼저 마련하여 두고 출입하는 出入口式이 있다. 폐새식은 황남동 151호분585)문화재관리국,≪慶州皇吾里第一 三三號 第一五一號古墳發掘調査報告≫, 1969.을 대표 유적으로 들 수 있는데, 완전 지하식으로 묘실의 평면은 장방형이며, 동서 2장벽과 북 단벽을 쌓고 개석을 올린 후, 남쪽을 통하여 시체를 격납하고 退室한 다음 밖에서 남 단벽을 쌓고 분구를 축조한 것인데, 追加葬시에는 남벽을 헐고 매장한다. 여기에는 3인을 추가장하여 모두 4인을 매장하였다. 천정은 몇 개의 판상석으로 이루어진 평천정식이며, 벽체는 할석을 성글게 쌓았다. 출입구식은 보문동 부부총의 婦塚586)朝鮮總督府,≪朝鮮古蹟圖譜≫3, 1916.에서 볼 수 있다. 묘실의 평면은 장방형이고, 서쪽 단벽의 폭을 약간 좁히고 묘실 바닥보다 약간 높게 함으로써 그 벽이 출입구임을 표시하고 있다. 천정은 평천정식이고, 벽체는 괴석과 할석을 섞어서 성글게 쌓았으나 벽면은 整面 하였다.

 ②횡혈식 석실분은 3종으로 나누어진다. 첫째는 順興己未銘壁畵墳 형식이다.587)문화재연구소,≪順興邑內里壁畵古墳≫, 1986. 묘실의 평면이 장방형으로 되고, 연도는 장벽의 한쪽 끝에 붙여서 설치하였다. 천정은 평천정식으로 하고 벽면과 함께 전면에 두터운 白灰발이를 한 다음 그 위에 벽화를 그렸다. 구조도 그렇고 벽화의 내용에서도 고구려의 양식이 보여 일단 고구려가 5세기경 남하하였을 당시의 영향으로 추측하고 있다. 둘째는 雙床塚588)國立博物館,≪雙床塚馬塚一三八號 調査報告≫, 1955.이나 傳神德王陵589)朴日薰,<慶州三陵石室古墳-傳新羅神德王陵->(≪美術資料≫8, 國立博物館, 1963).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형식으로 묘실의 평면은 방형이고, 연도는 남벽의 중앙 또는 한쪽에 편재하여 설치하였으며, 천정은 돔식으로 하였으되 굴뚝처럼 높게 축조한 형식이다. 이런 형식은 集安의 萬寶汀 1,368호분에서도 볼 수 있는 것으로 신라에서의 유행은 대략 6세기경으로 추측된다. 축조시 穹窿狀天井을 목표로 하였으나 천정을 曲面으로 축조할 기술이 미발달하였기 때문에 높이 올리게 된 것으로 추측된다. 세째는 忠孝洞 고분군에서 다수 보는 것과 같은 형식인데, 묘실의 평면은 방형이고, 연도는 중앙과 편재가 골고루 섞여 있으며, 천정은 완전한 궁륭상 천정식으로 되었다. 이런 형식은 한반도에서 경주에만 특징적으로 분포되어 있는데, 횡혈식 석실분의 완성형이라고 할 수 있다. 신라가 수·당과의 빈번한 교통 속에서 유입된 北朝式의 석실형인 것이다. 연대는 대략 6세기 후반에서 7세기경에 유행하고, 통일 후에도 성행하고 내부에 火葬骨壺를 격납하는 것이 보통이며, 불교와의 관계가 깊다.590)姜仁求, 앞의 글(1993), 294∼29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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