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8권 삼국의 문화
  • Ⅳ. 문학과 예술
  • 9. 무용·체육
  • 2) 체육
  • (1) 무예

(1) 무예

 삼국시대는 삼국이 서로 전쟁하던 시기이니만치 兵制가 상당히 발달하여 고구려·백제에서는 국민개병제, 신라에서는 징병제를 채택하고 있었다. 따라서 각종 무기가 발달되고 이 무기를 효율적으로 사용하기 위한 기술 즉 무예가 체계화되었을 것이다.

 당시의 무예 중에서 현재의 체육개념-교육으로서의 신체운동-에 가장 유사한 것으로 弓術이 있었다. 궁술에는 말을 타고 하는 騎射와 서서 쏘는 步射가 있는데 삼국은 두 가지 모두를 중시하였다. 고구려에서는 扃堂에서 청소년들에게 궁술을 가르쳤으며,662)≪舊唐書≫권 199上, 列傳 149上, 東夷 高麗. 신라의 화랑 官昌은 기사에 능했기 때문에 부장으로 발탁되었다.663)≪三國史記≫권 47, 列傳 7, 官昌. 백제에서는 일반인들까지도 모아서 활쏘기 연습을 시켰다.664)≪三國史記≫권 24, 百濟本紀 2, 아신왕 7년 9월.

 <그림 4>는 삼국시대의 활의 유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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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4>삼국시대의 활 유물
<그림 4>삼국시대의 활 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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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국시대의 활은 그 형태로 보아 彎弓-활체가 굽어져 있고 활고자가 활체의 반대방향으로 굽어진 활-이었으며 제작기법은 복잡하나 성능이 우수한 활이었다. 이 같은 한국활의 좋은 점은 중국에까지 널리 알려져 저들은 우리 활을 石弓·檀弓·角弓 등으로 부르고 好弓으로 높이 평가하였다. 활의 길이가 짧고 힘이 강한 만궁은 騎射에 특히 유용하다. 고구려를 비롯한 삼국이 모두 기사를 중시하였다는 기록을 보면, 모두 말타고 활쏘기를 많이 하였던 듯하다. 그것은 고구려의 벽화, 신라와 가야의 고분에서 발굴되는 馬具에 의해서도 명백하다.

 기사란 말을 다루는 馬術과 활을 쏘는 弓術이 함께 복합된 신체운동으로 상당히 고난도의 기술이 요구되는 운동이다. 중국인들이 고구려의 무사들을 騎寇라 하여 대단히 두려워 한 것도 이들의 기사 실력이 탁월했기 때문이다.

 고구려의 벽화에서 우리는 각궁으로 鳴鏑을 말 위에서 쏘는 장면을 볼 수 있다. 활을 쏘는 무사의 자세가 통일된 형태를 나타내고 있는데 그것은 騎射法이 통일되고 체계화되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활쏘는 사람이 달리는 말 위에서 상체를 뒤로 틀어 올리고 활시위를 힘껏 귀밑에까지 당겨 짐승을 노려 바야흐로 화살을 쏠 태세를 취하고 있다. 이 자세는 신라의 경주에서 발견된 狩獵文塼에서도 보이는데, 두 마리의 사슴을 쫓는 무사의 모습을 묘사한 것이다. 말은 질주하면서 활을 당기는 기사의 자세가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이 같은 射法은 기원전의 페르시아지방에 번영한 파르티안제국의 무사들로부터 연유한다 하여 파르티안 숏(Parthian Shot)이라 부른다. 이와 같은 자세는 특별한 훈련이 없이는 도저히 불가능한 것으로 騎射에 관한 특별한 훈련이 행해지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德興里 고구려 고분벽화에는 기사경기에 관한 그림이 묘사되어 있다.665)金基雄,≪고구려고분벽화≫(서문당, 1989), 16쪽. 4명의 경기자와 2명의 심판원 1명의 기록원이 보인다. 경기는 긴 5개의 말뚝위에 네모난 표적을 5개 세워 놓고 쏘아 맞히는 것이다. 4명의 경기자들 가운데에서 한 사람은 말을 달리며 활을 힘껏 당겨 쏘는 자세를 취하고 있다. 또 한 사람은 파르티안 사법의 완전한 자세를 취하고 있다. 5개의 과녁 중에 2개는 두 동강이 나서 땅에 떨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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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5>기사경기도(덕흥리 고분벽화)
<그림 5>기사경기도(덕흥리 고분벽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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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벽화는 射戱라는 벽화 속의 문자로 알 수 있듯이 승패를 가리는 경기희의 성격을 갖는다. 고구려는 언제나 3월 3일이 되면 낙랑의 언덕에서 모여 대규모의 수렵대회를 개최하였다.666)≪三國史記≫권 45, 列傳 5, 溫達. 이 수렵대회에서 말타고 활쏘는 기사의 실력이 발휘되고 좋은 성적을 거둔 사람은 발탁되어 등용되기도 하였다. 수렵대회장이 그대로 인재등용의 시험장으로 되었던 것이니, 고구려에서 활쏘기는 당시의 민중생활과도 밀접히 관련되어 있음을 알게 한다.

 활쏘기를 인재등용의 한 방법으로 채택한 나라는 비단 고구려뿐만은 아니다. 신라에서도 8세기에 讀書三品科가 생기기 이전에는 弓箭術로 인재를 뽑아 썼던 것이다.667)≪三國史記≫권 10, 新羅本紀 10, 원성왕 4년 春.

 7세기까지의 한국은 삼국이 정립하고 있었던 시기이며 서로 전쟁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삼국이 모두 武를 숭상하고 있었다. 당시의 상황에서 보아 무예에 뛰어난 사람이 인재등용의 최선단에 서 있었을 것임은 틀림없다. 특히 그 선발방법을 활쏘기로 한 것이 한국적 특색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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