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8권 삼국의 문화
  • Ⅴ. 과학기술
  • 2. 고구려의 과학과 기술
  • 1) 하늘의 과학
  • (2) 천문관측제도와 활동

(2) 천문관측제도와 활동

 ≪삼국사기≫와≪삼국유사≫에는 단편적이고 부분적이기는 하지만, 고구려의 천문 관측 기록들이 남아 있다. 11회의 일식 기록과, 10회의 혜성 기록, 그리고 11회에 이르는 그 밖의 천체 현상들의 기록이 그것이다. 이 천체 관측 기록들은 고구려의 기록들에서 옮긴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678)지금까지 몇 사람의 일본 학자들은 고구려의 천체 관측 기록들이≪삼국사기≫를 편찬하면서 김부식이 중국의 기록에서 옮겨 넣었을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예컨데 飯島忠夫가 1926년에≪東洋學報≫에 쓴 논문<三國時代の日食記事について>와 齋藤國治가 1990년에 쓴≪古天文學の道≫의 12장<新羅·百濟·高句麗の天文記錄>등이 그렇다. 이러한 주장에 대해서 박성래는 1980년에≪傳統科學≫제1집에 쓴 논문<韓國의 災異와 災異觀>에서 그 잘못을 지적하고 반론을 제기했다. 고구려의 천체 관측 기관과 관측제도가 어떠했는지 알 수 있는 기록은 없다. 그런데 고구려의 관측 기록 중에는 영류왕 23년(640) 9월 “해에 빛발이 없다가 3일이 지나서야 다시 밝았다”는 태양 흑점이라고도 여겨지는 태양 표면의 이변과, 양원왕 11년(555) 11월 30일 “태백성이 낮에 보였다”는 기사와 같이 고구려의 독자적 관측 기록의 존재가 분명한 주목할 만 한 것이 나타나고 있다.679)≪三國史記≫권 20, 고구려본기 8, 영류왕 23년 9월.
齋藤은 위의 책, 214쪽에서 금성의 관측 조건을 들어 고구려의 독자적 관측기록의 존재를 인정하고 주목할만한 것이라고 했다.
그러한 독자적인 관측 기록의 존재는, 고구려에 국가적인 천체 관측 기관과 시설이 있었고 거기 소속된 천문 관리가 활동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日者라는 관직명은 천문 관측과 관련된 관리중의 하나였을 것이다.680)洪以燮,≪朝鮮科學史≫(正音社, 1946), 42쪽.

 천체 관측 활동은 천문대를 중심으로 행해졌다. 고구려 천문대의 유적이나 유물은 남아 있지 않으나, 조선 초의 두 지리지는 그 때까지 그 유적이 있었음을 말해주고 있다.≪세종실록≫의 지리지에는 평양부에 첨성대가 있다고 기록하고 있고,≪동국여지승람≫에는 “첨성대의 유적이 평양부의 남쪽 3리에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681)≪世宗實錄≫권 154, 평안도 평양부.
≪東國輿地勝覽≫권 51, 평안도 평양부, 고적.
평양에 천문대를 세운 것은 5세기쯤이었을 것이다.682)全相運,<高句麗의 科學과 技術, 그 硏究現況과 課題>(≪東方學志≫49집, 1985), 274쪽. 돌을 쌓고 위에 난간을 두른 관측대였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고구려의 역법은 중국의 천문 역법의 영향을 받아서 이루어졌을 것이다. 영류왕 7년(624)에 당에 曆書를 구한 일이 있다는 기록은683)≪三國史記≫권 20, 고구려본기 8, 영류왕 7년. 고구려의 역법이 중국의 그것과 같았으리라는 강력한 시사를 준다. 그 역서는 당에서 쓰인 傳仁均의 戊寅曆이었을 것이다.684)물론 역법의 도입이나 역서를 중국 것을 그대로 썼다는 말과 반드시 같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현재로서는 그 시기에 고구려가 독자적인 역법을 썼다고 생각하기는 어렵고, 다만 그 뒤 어느 시기에 고구려에서 독자적인 역서를 만들어 썼을지도 모른다. 고구려는 1년의 길이를 중국에서와 같이 365 1/4 일로 계산했을 것이고, 1년을 24절기 12개월로 나누었다. 그리고 時制는 중국의 그것과 같은 12시 100각의 제도였다. 시간의 측정에는 해시계와 물시계가 사용되었을 것이지만, 그 기록이나 유물은 남아 있지 않다.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