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8권 삼국의 문화
  • Ⅴ. 과학기술
  • 2. 고구려의 과학과 기술
  • 2) 산업기술 및 생활과학
  • (4) 도구와 기계장치

(4) 도구와 기계장치

 7세기 초, 고구려는 비교적 규모가 큰 연자맷돌을 쓰고 있었다. 잘 알려진 것처럼 曇徵이라는 중이 610년에 일본에 건너가서 碾磑 즉 연자맷돌을 만들었다는≪日本書紀≫의 기사로 확인된다. 그것이 물레바퀴로 움직이는 장치인지 畜力으로 움직이는 연자매인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고구려에서는 물레바퀴를 동력으로 하는 연자매와 연자방아가 대체로 5∼6세기경에는 쓰이고 있었을 것이다. 4세기 중엽의 안악 제3호분의 방앗간 그림과 5세기경의 무덤들에 그려진 수레의 그림은 그 기술 수준을 보여주고 있다. 고구려에서는 쌀보다 조와 밀이 많이 경작되고 있었으므로 탈곡 제분용 방아와 연자매의 동력으로서 물레바퀴가 보급되었으리라고 생각된다.

 고구려는 그 넓은 땅을 주로 육로를 이용해야 했기 때문에 일찍부터 교통 운송 수단으로 수레가 이용되었다. 우차와 마차가 제작된 것이다. 견고하고 경쾌하며 넉넉한 짐을 실을 수 있는 수레의 제작과 힘센 가축이 끌기에 알맞는 수레장치의 개량은 중요한 기술의 영역이었다.

 여러 무덤에서 발굴된 수레의 부품들과 4세기 후반에서 5세기 전반의 무덤들에 그려진 수레의 그림들과 수레바퀴 제조기술자의 그림은 그 시기 고구려의 수레 제작기술이 높은 수준에 있었음을 나타내고 있다. 가장 완전한 옛 수레의 모습은 무용총 벽화에 그려진 소가 끄는 수레와 오회분DB주석신편 한국사 책자에 '오괴분'으로 잘못되어 있어서 DB 구축 작업에서 바로잡았다. 5호분 벽화에 그려진 수레바퀴에서 볼 수 있다. 이 아름다운 그림은 5세기경의 고구려 수레가 훌륭하게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어, 우리에게 그 시기의 수레와 멍에를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수레바퀴는 철판을 테두리에 씌운 이른바 쇠바퀴가 등장하고 있었음을 나타내고 있다.

 고구려 사람들은 옷감을 어떻게 짰으며 원료가 무엇인가, 물감은 어떻게 만들었는가. 고구려 무덤의 벽화에는 많은 사람들이 등장하고, 그들이 입은 옷은 색깔과 모양이 다양하다. 문헌에 의하면, 고구려에서는 오색 비단과 푸른색·붉은 색 및 흰색의 모직물 등의 고급직물이 생산되었다. 고구려 사람들의 옷감은 비단·명주·삼베·가죽 등이었다. 대안리 1호분에 그려져 있는 베짜는 여인의 그림은 유명하지만, 너무 간결해서 그것으로 고구려의 직조기나 그 기술을 헤아리기는 어렵다.691)朱榮憲,≪高句麗の壁畵古墳≫(東京;學生社, 1972), 83∼109쪽.
全相運, 앞의 글(1985), 282쪽.

 안악 제3호분에는 고구려 사람들의 생활 과학의 모습을 보여주는 훌륭한 그림들이 그려져 있다. 외양간·차고·방앗간·부엌·우물 등 4세기 중엽의 고구려인의 일상생활과 주거시설을 생생하게 그려 놓았다. 그것은 어떤 기록에 못지 않는 정확한 살아 있는 고구려 생활과학의 자료로서 아주 중요하다. 우물가의 정경에서는 우물의 모양과 옆에 놓인 물항아리들, 그리고 특히 우물에서 물을 길어 올리는 지레장치가 주목을 끈다. 이런 장치는 조선시대에도 널리 쓰인 드레의 원형이다. 똑같은 지레장치는 곡식을 탈곡하는 데 쓰인 발방아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碓라고 씌어 있는 그림에서 두 사람이 발방아로 작업을 하고 있는 장면은 조선시대의 그것과 똑같다. 4세기에 이미 이러한 장치들이 쓰이고 있었던 것이다.

 이 시기 고구려 상류층의 주거 설비는 매우 기능적이고 효율적으로 배치되고 있었다. 실림살이 공간과 응접실에서 침실에 이르기까지의 여러 방들과 음식을 마련하는 데 필요한 공간들이 근접해 있었고, 수레와 수레를 끄는 소와 말이 있는 공간들이 중요시되고 있었다. 부엌시설도 훌륭하다. 화덕에 걸린 솥, 시루의 사용이 확인된다. 가축이 사육되었고, 육고에는 고기가 많이 걸려 있어 음식물이 잘 조리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물을 담거나 저장용으로 큰 토기 항아리와 독이 쓰였고, 유약 질그릇 식기들이 사용되었다. 3세기 초 이전에 생겨난 유약을 바른 질그릇 제조기술은 4∼5세기경에는 매우 높은 수준에 이르게 되었다. 알칼리질 유약을 입힌 경질토기가 만들어지게 되었고, 대량생산이 가능해졌다. 그래서 5세기경부터는 일반 평민들도 유약 질그릇을 널리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692)최무장, 앞의 책, 829∼833쪽. 고구려 경질토기 제조기술이 그만큼 발달한 것이다.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