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8권 삼국의 문화
  • Ⅴ. 과학기술
  • 3. 백제의 과학과 기술
  • 3) 산업기술
  • (4) 요업기술

(4) 요업기술

 요업기술도 금속기술의 창조적인 발전과 함께 높은 수준에 도달하고 있었다. 흙과 불의 과학이 빚어내는 기술의 흐름이 함께 전개되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청동과 철의 생산을 바탕으로 한 금속기술과 얽히고 조화된 기술과 고구려의 경질토기의 기술이 한반도 서남지역에서 산출되는 질이 좋은 흙으로 빚어 구어 내던 토기의 기술과 상승하여 백제토기가 만들어진 것이다. 백제토기는, 고구려 토기도 그랬지만, 그 단단함과 그릇의 질감이 토기의 단계를 벗어나 굳은 질그릇(陶器)으로 발전하고 있었다. 4∼5세기에 높은 온도에서 그릇을 구어낼 수 있는 터널식 언덕가마(登窯)를 짓는 기술이 개발되면서 백제의 질그릇은 한 단계 높은 수준에 도달하게 된 것이다.

 백제의 질그릇 제조기술은 기술 그 자체에서는 고구려와 신라의 그것과 별로 다른 것이 없다. 다만 무령왕릉으로 대표되는 벽돌과 전돌이 보여주는 요업기술은 그것이 6세기초의 제품이라고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로 높은 기술수준에 도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토록 우아하고 세련된 아름다운 무늬를 벽돌과 전돌에 찍어 구어 내는 기술 또한 매우 훌륭하다. 또 백제의 유적에서 수없이 출토되는 기와의 제조기술도 높은 수준에 도달하고 있다. 수막새 기와들의 아름다운 연꽃무늬의 디자인을 멋있게 살려낸 기와제조 장인들의 솜씨와 기술은 일품이다. 588년에 일본에 건너간 瓦博士가 그 시기 일본의 궁전과 사원들의 장대한 건물·기와·지붕을 영조할 수 있게 한 기술 이전의 파급은 획기적인 것이었다. 飛鳥와 奈良의 궁전과 사원에 이전된 백제의 기술은 우리 나라에는 남아있지 않는 우수한 백제 건축기술을 실증하는 자료이다.711)吉田光邦, 앞의 책, 80∼84쪽 참조. 거기서 볼 수 있는 거대한 기와들은 백제 요업기술의 유산으로 주목되는 것이다. 전돌 중에서 또 하나 속이 비어 있는 블럭과 같은 직사각형의 두꺼운 전(塼)이 만들어졌다. 아마도 벽체를 쌓기 위해서 제조되었을 것으로 생각되는 이 블럭형 전은 뛰어난 기술적 아이디어가 매우 돋보이는 기술 개발의 산물이다.

 제철기술과 요업기술이 이어진 흙과 불의 과학을 전개하면서 백제의 기술자들은 유리를 만드는 기술도 개발했다. 백제 고분에서 많이 발견된 여러 가지 유리구슬(관옥)은 백제의 기술자들이 만든 것이다. 최근에 진천 석장리에서 유리구슬과 함께 출토된 유리구슬 거푸집의 발견은 여러 가지 유리구슬이 백제에서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것이다. 35㎜×27㎜크기에 두께가 5∼8㎜의 이 진흙거푸집 조각에는 지름 7㎜ 정도의 녹은 유리구슬을 성형할 수 있는 9개의 구멍이 있다. 유리구슬은 서남지역의 초기 철기시대 유적인 부여 합송리, 당진 소소리, 공주 봉안리 등에서 주조된 쇠도끼와 함께 출토되어, 기원전 2∼3세기에는 유리가 만들어지고 있었다고 생각되고 있다.

 그런데 1995년에 보령 평라리 청동기시대 유적에서 출토된 유리구슬이 기원전 5세기에 한반도에서 만들어진 납유리임이 밝혀지면서,712)최주·이융조·정동찬 외,<기원전 5세기의 保寧郡 平羅里 출토의 유리구슬에 대하여>(≪한국전통과학기술학회지≫3:1, 1996), 15∼32쪽. 백제 유리기술의 원류는 상당히 이른 시기부터 찾아볼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그 기술이 토착기술로 한반도에서 자생했을 가능성이 크다는 생각을 가질 수 있게 했다. 그러나 그 후, 유리기술의 전개과정을 알 수 있는 유적이나 유물이 매우 단편적으로 나타나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기원전 2∼3세기로 건너뛰고 또 그 다음 백제시대에 그 기술이 어떻게 이어지고 발전했는지 정리할 수 있는 자료도 아직 없다.

 백제 유리기술의 걸작은 6세기 중엽에 이르러 무령왕릉에서 훌쩍 나타난다. 왕비의 허리 부분에서 한 쌍의 유리 童子像이 발견된 것이다. 높이 2.5㎝의 이 동자상은 초록색의 알칼리 유리로, 비슷한 시기의 유물로 한국에서만 발견되는 유리곡옥과 아주 비슷한 재질이다.713)李仁淑,≪한국의 古代유리≫(, 1993), 48쪽. 이 동자상은 한 눈에 그것이 한국인의 모습을 연상하게 한다. 선을 그어 소박하게 조각한 얼굴 모습, 다소곳한 손과 발의 자세와 몸체의 전체적인 인상이 매우 부드럽다. 백제 유리工匠의 따뜻한 조각 솜씨를 보여주는 오직 하나밖에 없는 귀중한 작품이다. 6세기의 백제 유리 공장들은 이런 유리제품을 만들어낼 수 있는 기술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백제 고분에서 발견되는 珠玉의 재료로는 유리가 많이 쓰이고 있고 그 질도 우수하지만, 백제의 유적에서는 유리그릇이 거의 발견되지 않는다. 백제 사람들이 유리그릇을 만드는 일을 별로 하지 않았는지 잘 알 수가 없다. 다양한 색깔의 아름다운 구슬류의 유리제품은 주로 목걸이와 같은 장신구로 쓰였다. 천연석과 함께 유리구슬은 보석의 일종으로 생각되었고, 금 장식품에 박아 넣어 장식효과를 더하는 데도 쓰였다.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여러 가지 색깔의 유리구슬들은 알칼리 소다유리 계통의 유리로 만들어진 것으로 보고되어 있다.714)金元龍·安輝濬,≪韓國美術史≫(서울大 出版部, 1993), 93쪽.
李仁淑, 위의 책, 50쪽 및 79∼80쪽.
무령왕릉에서 나온 유리구슬 중에서 주황색 구슬과 같은 특이한 것은 인도에서 인도네시아·타일랜드 등 동남아시아 지역의 유리구슬과 이어질 수 있어서 주목된다.
유리곡옥들은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이다. 그것은 진흙 거푸집으로 만든 것이고, 곡옥은 우리 나라에서 만들어진 것을 확인해주는 유물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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