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8권 삼국의 문화
  • Ⅴ. 과학기술
  • 4. 신라의 과학과 기술
  • 3) 산업기술
  • (3) 요업기술

(3) 요업기술

 가야에서 크게 발전한 우수한 질그릇 제조기술은 신라로 이어져 더욱 발전하였다. 3∼4세기에 이르면서 가야와 신라의 질그릇은 경질토기로의 기술혁신을 하게 된 것이다.723)金元龍·安煇濬, 위의 책, 130∼134쪽 註에서 인용한 저서와 논문들은 토기에 관한 대표적인 연구들이다. 가야토기와 신라토기는 정선된 흙으로 빚어 1,000°c 이상의 고온에서 구어내고 물레로 성형한, 기술적으로 완성된 질그릇이다. 유약은 바르지 않았으나 태토 중의 유리질이 녹아 나오거나 가마 안에서 재가 날아 붙어 잿물을 뿌린 것 같이 되는, 말하자면 자연유가 부분적으로 입혀지는 경우가 많다. 그것은 토기라기 보다는 잿물을 제대로 입히면 그대로 자기가 될 수 있는 그런 그릇이다. 그래서 가야토기와 신라토기는 토기로서는 더 이상 새로운 기술이 나올 것이 없었고, 4세기에서 5세기를 지나면서 그릇 모양이 달라지고 새로워지는 조형기술의 발전이 있었다.

 질그릇 제조기술의 발전은 기와와 전돌의 제조기술로 이어졌다. 기와의 기술은 6세기부터 7세기 전반에 이르기까지 백제의 기술적 영향을 크게 받았다. 6세기 후반부터 시작된 대규모의 사찰 건조는 신라의 기와 제조기술의 발전과 연결된다. 이 시기의 유적에서 발견되는 기와들은 회백색의 소성 온도가 높은 우수한 품질이다. 이렇게 6세기에서 7세기에 이르면서 신라의 요업기술은 최고의 기술수준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황룡사터에서 발견된 높이 180㎝가 넘는 거대한 망새는 그 압권이다.

 신라에서 특히 발달한 요업기술의 산물에서 유리를 빼놓을 수 없다. 유리구슬이 대량으로 만들어졌는데, 4세기 이후의 무덤들에서는 유리 곱은옥도 적지 않게 출토되고 있다. 이러한 유리구슬과 곱은옥은 목걸이로 가장 많이 쓰였고, 귀걸이나 금관의 장식으로도 쓰였다. 유리구슬과 곱은옥은 비취나 수정·마뇌·호박과 같은 옥류와는 또 다른 다양한 색깔과 유리의 질감으로 고대인의 장식품으로서 매우 귀중한 것이었다. 신라의 유리기술자들은 유리 곱은옥을 만들어내는 그들 나름의 유리 공예기술을 개발한 것 같다. 금관총에서만도 130여 개의 유리 곱은옥이 발굴된 것은 5세기 후반 경에는 그 제조기술이 완숙했음을 말하는 것이다.

 많은 유리 곱은옥을 만드는 유리 공예기술이 축적되면서, 숙련된 신라의 유리기술자들은 유리그릇을 만들어내는 공예기술에서 부드러운 아름다움을 낼 수 있는 단계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서역에서 들어온 아름다운 유리그릇에 자극되어 그들의 축적된 유리 공예기술을 가지고 만들어 낸 유리그릇들이 5∼6세기의 신라 왕족의 무덤들에서 발굴되고 있다. 4세기 후반에서 5세기말까지의 신라의 큰 무덤에서만 발견되는 서역의 화려한 유리제품들이 어떤 경로로 신라까지 들어오게 되었는지를 밝히는 것과 함께 신라의 유리기술은 그 기술 문화의 성격을 해명하는 데 중요한 과제로 남아 있는 것이다. 신라의 고분에서 출토된 유리그릇이 그 시기의 동아시아의 여러 나라들 중에서 중국과 일본보다도 더 많이 그리고 더 훌륭한 것들이라는 사실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신라의 유리공예 기술자들은 서역에서 들어 온 유리그릇을 보고, 그들이 축적한 유리기술의 노하우를 가지고 신라의 유리그릇을 만들어 냈다. 4세기 후반 무렵부터 5세기초에는 구경이 10㎝가 넘는 비교적 큰 유리그릇도 만들 수 있게 되었다. 98호 고분 남분과 북분에서 발견된 감색 유리대접과 담록색 유리잔은 신라의 유리기술자들이 만든 대표적 유리그릇이다. 그 한국적인 그릇 모양과 장식을 하지 않은 단순한 디자인이 돋보이는 멋있는 작품이다. 비슷한 유리잔은 5∼6세기 무렵의 안계리 4호분에서도 발견되었다. 이러한 유리그릇들은 납유리로 만들어졌으리라고 생각된다.724)李仁淑, 앞의 책, 61∼67쪽.
98호분에서 출토된 유리그릇 파편의 성분 분석에서 납유리임이 확인되었다.
그리고 신라에서는 칼륨 유리와 알칼리 소다 유리구슬도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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