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8권 삼국의 문화
  • Ⅵ. 의식주 생활
  • 2. 식생활

2. 식생활

 삼국은 그들이 처한 자연지리적 환경에 따라 제각기 식생활 문화를 발전시켰다. 이 시기는 철제 농기구의 사용, 농업기술의 발전, 벼농사의 확대 등 농업생산력의 두드러진 발전이 주목된다. 이는 식생활에 지대한 영향을 미쳐 쌀을 비롯한 보리·조 등 주식의 생산이 늘어나고, 주·부식의 분리가 이루어졌다고 보여진다.

 고구려가 위치한 한반도 북부지역과 만주 일대의 자연지리적 조건은 밭곡식을 재배하는 데 적합하였다. 고구려인들은 조를 주식으로 이용하였고, 이전 시기의 유적들에서 기장·수수 등이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이러한 곡물도 食料로 이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753)黃海道 鳳山 智塔里(피 또는 조), 咸北 茂山 虎谷(수수·기장·조), 咸北 會寧 五洞(콩·팥·기장), 平壤 南京(쌀·조·기장·수수·콩) 등. 그러나 고구려는 산악지대가 많고 농경지가 적어서 항상 식량이 부족했고, 이 때문에 음식의 양을 줄여서 먹는 풍속이 있었다.754)음식의 양을 줄여 먹는 節食에 대한 것은≪後漢書≫권 85, 東夷列傳 75, 高句麗 ;≪三國志≫권 30, 魏書 30, 東夷, 高句麗 ;≪梁書≫권 54, 列傳 48, 東夷, 高句麗 ;≪魏書≫권 100, 列傳 88, 高句麗 ;≪南史≫권 79, 列傳 69, 東夷, 高句麗 ;≪北史≫권 94, 列傳 82, 高句麗 참조. 한편 동옥저를 복속시켜 이곳에서 나는 생산물을 날랐다고 전해진다.755)≪後漢書≫권 85, 東夷列傳 75, 東沃沮.
≪三國志≫권 30, 魏書 30, 東夷, 東沃沮.
이러했던 고구려도 평양천도 이후에는 철제 농기구의 보급, 농경법의 개선, 火田法의 이용 등으로 농경이 근본적인 산업이 되었다고 여겨진다.

 백제는 비교적 넓은 평야와 수리시설에 알맞은 하천이 있어 일찍부터 농업국가의 면모를 갖추었다.≪三國史記≫에 의하면 多婁王 6년(32)에 벼농사가 시작되었다.756)≪三國史記≫권 23, 百濟本紀 1, 다루왕 6년. 백제의 농업기술은 수리의 방면에까지 이르렀는데 金堤의 碧骨堤, 古阜의 訥堤, 全州의 大堤, 益山의 黃登堤 등이 남아 있다. 백제가 처한 자연환경과 이 지역의 수리시설들은 벼농사가 발달하였음을 보여주어 백제는 미곡의 산출과 쌀밥의 주식화를 일찍부터 진전시켰다고 보여진다.

 ≪三國史記≫新羅本紀의 기록을 보면 신라는 초기부터 농경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권농기사들757)≪三國史記≫권 1, 新羅本紀 1, 시조 혁거세거서간·파사니사금 3년·일성니사금 12년 ; 권 2, 新羅本紀 2, 벌휴니사금 4년·미추니사금 11년·흘해니사금 9년 등에서 권농 및 농사의 시기를 보장해주는 기사가 보인다.과 많은 旱災·蝗災·雨雹 및 서리의 기사들이 그 예이다.758)旱 ; 일성니사금 12년, 흘해니사금 4년, 내물니사금 17년, 눌지마립간 4년 등.
蝗 ; 남해차차웅 15년, 파사니사금 30년, 기마니사금 11년, 아달라니사금 8년, 조분니사금 8년, 첨해니사금 13년, 흘해니사금 4년, 내물니사금 34년·42년·44년, 실성니사금 5년 등.
雨雹·霜 ; 기마니사금 3년, 아달라니사금 17년, 나해니사금 10년·27년, 미추니사금 11년, 흘해니사금 28년 등.
이외에도 수리시설759)≪三國史記≫권 1, 新羅本紀 1, 일성니사금 11년 ; 권 3, 新羅本紀 3, 눌지마립간 13년 ; 권 4, 新羅本紀 4, 법흥왕 18년.과 牛耕760)≪三國史記≫新羅本紀 4, 지증왕 3년.에 대한 기록도 있다. 신라의 주작물은 보리였던 것으로 보이며761)≪三國史記≫권 1, 新羅本紀 1, 파사니사금 3년, 기마니사금 3년 ; 권 2, 新羅本紀 2, 나해니사금 27년 ; 권 3, 新羅本紀 3, 눌지마립간 4년. 그 밖에 조·콩 등이 있었고 쌀도 재배가 가능하였다.762)≪北史≫권 94, 列傳 82, 新羅. 신라는 보리농사를 위주로 하여 적지를 택해 벼농사를 확장시켜 나갔으며 가야의 합병, 한강유역의 점유를 통해 벼농사에 적합한 영토를 확보하였다.

 가야는 철의 생산으로 널리 알려지기도 했지만 김해평야를 중심으로 하여 농업을 발전시켰고, 이를 바탕으로 성장하였다. 가야가 위치한 弁辰지역은 토지가 비옥하고 벼농사가 일찍부터 시작된 것으로 알려졌으며763)≪三國志≫30, 魏書 30, 東夷, 弁辰. 수로왕이 허왕후와 함께 온 뱃사공들을 돌려 보내면서 15명에게 각각 쌀 열섬씩을 주었다764)≪三國遺事≫권 2, 紀異 2, 駕洛國記.는 기록을 보면 쌀이 풍부했던 것으로 보인다.

 삼국 및 가야는 모두 농업을 기본적인 생업기반으로 하였고 삼국시대에는 농업생산력이 크게 발전하였다.765)李春寧,≪韓國農學史≫(민음사, 1989), 36∼40쪽. 철기문화의 전래 이후 철제 농기구가 보급되었고, 4∼6세기경에는 보습·따비·가래·괭이·쇠스랑·낫·삽 등 중요 농기구의 대부분이 정비되었다.766)김광언,<신라시대의 농기구>(≪신라사회의 신연구≫, 서경문화사, 1987), 289쪽. 또한 우경을 비롯한 농업기술의 발달도 있었고 이와 더불어 永川 菁堤, 벽골제와 같은 수리시설도 축조되었다. 수리시설의 축조는 벼농사의 발전과 궤를 같이하는 것이었고767)權丙卓,<신라관개제도연구>(위의 책), 174쪽. 당시 자연환경이 적합한 김해일대 평야, 한강유역 평야, 서해안 평야에서 벼농사가 이루어졌다고 보여진다.

 삼국시대 사람들은 농업생산의 발전을 통해 풍부하고 다양해진 식료를 활용하였다. 기록이나 유물들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곡물의 종류를 보면 벼·조·보리·콩·피·기장 등이 있다. 벼농사의 확대는 쌀을 주식으로 하는 식생활을 가능하게 하였다. 그러나 보리·콩·조 등의 잡곡은 이전 시기부터 계속 경작되었고 자연적 조건으로 벼농사가 발달하지 못한 고구려에서는 잡곡이 주식이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삼국의 稅制를 보면 주로 쌀을 비롯한 곡물로 징수하였는데,768)≪北史≫권 94, 列傳 82, 高句麗·百濟.
≪隋書≫권 81, 列傳 46, 東夷, 高麗.
여기에서도 이런 곡물이 주식이 되었던 상황을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곡류를 주식으로 하여 부식으로는 채소와 과일, 육류, 수산물 등이 이용되었다. 중국의 기록을 보면 백제와 신라의 오곡·과일·채소·짐승의 물산·술·음식·약품 등이 중국의 것과 같다고 하였다.769)≪周書≫권 49, 列傳 41, 異域 上, 百濟.
≪北史≫권 94, 列傳 82, 百濟·新羅.
≪隋書≫권 81, 列傳 46, 東夷, 新羅.
당시의 채소류로는 고구려에서 千金菜가 유명하였는데770)韓致奫,≪海東繹史≫권 26.
李晬光,≪芝峰類說≫권 19, 食物部.
이는 상치로 보인다. 그리고≪濟民要術≫771)≪濟民要術≫은 北魏 高陽郡 太守 賈思勰이 530∼550년 사이에 저작한 것으로 보이며 농업에 관한 고전으로 우리 나라의 식생활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전 10권으로 3권에서 채소의 재배·관리·이용·조제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을 통해서 보면 아욱(葵)·상치(萵苣)·미나리(芹}·오이(瓜·胡瓜)·가지(茄子)·순무(蔓菁) 등이 이용되었다고 보여진다. 과일류로는 밤·잣·복숭아와 오얏 등이 기록에 보인다.772)≪隋書≫권 81, 列傳 46, 東夷, 百濟 ;≪梁書≫권 54, 列傳 48, 東夷, 高句麗 ;≪南史≫권 79, 列傳 69, 東夷, 高句麗.
≪三國史記≫권 2, 新羅本紀 2, 나해니사금 8년.
육류는 사냥 또는 축산을 통해 공급되었다. 안악 3호분 동측실의 肉庫를 그린 벽화에는 꿩·돼지·노루 등이 걸려 있다.773)최무장·임연철,≪고구려벽화고분≫(신서원, 1990), 497쪽. 이 벽화에서는 외양간·마구간도 보이며774)최무장·임연철, 위의 책, 42∼43쪽. 기록을 통해 보면 소·돼지·닭·개 등이 사육되었음을775)≪隋書≫권 81, 列傳 46, 東夷, 百濟.
≪三國史記≫권 28, 百濟本紀 6, 의자왕 20년.
알 수 있다. 그리고 김해패총에서 발견된 패류776)≪大正九年朝鮮古蹟調査報告≫(조선총독부, 1920), 44쪽.를 비롯하여 고구려가 동옥저에서 날라온 물고기, 해중 식물777)≪後漢書≫권 85, 東夷列傳 75, 東沃沮.
≪三國志≫권 30, 魏書 30, 東夷, 東沃沮.
등 다양한 수산물도 중요한 부식이 되었다.

 이렇게 삼국시대에는 농업 중심의 경제생활과 벼농사의 확대를 통해 식생활이 비교적 안정되었다고 보여진다. 쌀·보리·조 등의 곡물이 주식이 되었고 부식으로 채소류·육류·과일류 등 다양한 식품이 이용되었다. 여기에서 주목되는 점은 이러한 생산의 안정과 풍부해진 식품을 바탕으로 주·부식이 분리될 수 있었던 것이다. 주·부식의 분리는 곡물 조리기술 및 각종 음식의 조리·가공기술의 발달을 통해 우리 나라 일상식의 구조로 발전하게 되었다.

 이러한 식생활에서의 진전이 있었지만 모든 사람이 넉넉한 식생활을 누리지는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평민들은 조세 및 부역을 담당하여 이들에게 큰 부담이 되었고, 자연재해는 큰 재난이 되었다. 고구려에서 시행된 賑貸法778)≪三國史記≫권 16, 高句麗本紀 4, 故國川王 16년.등 기록이 전하는 많은 구휼기사779)≪三國史記≫권 1, 新羅本紀 1, 남해차차웅 15년·일성니사금 12년 ; 권 2, 新羅本紀 2, 나해니사금 31년·흘해니사금 4년 ; 권 3, 新羅本紀 3, 내물니사금 17년 ; 권 4, 新羅本紀 4, 지증왕 7년 ; 권 18, 高句麗本紀 6, 고국양왕 6년 ; 권 19, 高句麗本紀 7, 안장왕 5년·안원왕 6년 ; 권 24, 百濟本紀 2, 고이왕 15년.는 이러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삼국은 왕족과 왕비족을 중심으로 한 귀족들이 지배하였던 사회였다. 이러한 사회구조는 식생활에도 반영되어 신분에 따른 식생활의 분화 및 계층화가 나타났을 것로 여겨진다.

 우선 왕실의 식생활 모습은 화려한 생활양상을 보여주는 고구려의 벽화와≪삼국유사≫에 실린 태종무열왕이 하루에 먹었던 음식의 양을 묘사한 기록780)≪三國遺事≫권 1, 紀異 2, 太宗春秋公.에서 살필 수 있다.≪삼국지≫위서 동이전을 보면 고구려에서는 下戶들이 먼 곳에서 식량·물고기·소금을 날랐고 이를 앉아서 받아먹는 계층이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781)≪三國志≫권 30, 魏書 30, 東夷, 高句麗. 삼국의 귀족들은 조세 또는 전리품을 독점하여 풍요로운 식생활을 누렸던 것으로 보인다. 이에 비해 일반 백성들은 가난한 생활을 하였고 나무껍질을 벗겨 먹기도 하였다.782)≪三國史記≫권 3, 新羅本紀 3, 눌지마립간 16년. 그러나 식생활의 분화를 통해 이루어진 귀족층의 음식문화는 식생활 및 식품을 다양화하고 발전시킬 수 있는 조건이 되었다고 보여진다.

 삼국시대의 부엌시설 및 경리시설들은 고구려벽화를 통해서 살펴볼 수 있다. 안악 3호분과 무용총의 벽화에는 부엌이 방과 분리되어 있다. 이외에도 태성리 1호분, 약수리 벽화무덤 등에도 부엌시설이 있다. 약수리 벽화의 부뚜막은 아궁이에 굴뚝이 직각으로 구부러져 달려 있다. 그리고 안악 3호분의 부엌벽화에서는 여자들이 부뚜막에 시루를 걸어 놓고 음식을 만들고 있는데 이러한 부뚜막들은 근래의 형태와 별로 다르지 않다. 부엌시설 이외에 디딜방아가 안악 3호분의 벽화에서 보이는데, 한 여자가 발로 방아를 딛고 섰으며 그 아래 한 여자가 키질을 하고 있다. 디딜방아는 평양 역전고분, 요동성 무덤의 벽화에도 보인다. 이외에 안악 3호분의 벽화에서는 우물의 모습도 볼 수 있고 육고간·외양간·마구간 등의 경리용 시설도 나타난다.783)최무장·임연철, 앞의 책, 34·42∼43·119∼124·314쪽. 이러한 자료들은 이 시대에 식생활에 필요한 제반의 시설들이 갖추어졌음을 보여준다.

 식기로는 토기가 주를 이루었다. 식기로 이용된 토기로 바리·사발·쟁반·굽다리그릇·잔·목긴 항아리 등이 발굴되었다. 출토된 토기들은 주로 부장품으로 쓰인 것이지만 이들을 통해 이 시대 식기의 모습을 살필 수 있다. 토기들은 음식물의 종류·건습 등의 상태에 따라 다양하게 이용되었을 것이다. 백제와 신라 그리고 가야에서는 출토된 실용식기가 비교적 많으나 고구려에서는 출토유물이 적어 그 모습을 자세히 알 수 없다. 그렇지만 고구려에서의 모습은 벽화를 통해서 알 수 있다. 무용총 주실 북측벽의 벽화를 보면 3개의 짧은 굽이 달린 큰 대접 위에 과일이 높이 괴어 있고, 뚜껑이 있는 바리 모양의 그릇, 짧은 굽이 달린 사발, 뚝배기 모양의 그릇, 보시기, 종지와 같은 그릇들이 보인다. 각저총의 실내생활도에서는 잔·사발 등이 개인용 밥상 위에 놓여 있다. 그리고 기록을 보면 고구려에서는 籩豆·簠簋·罍洗가 이용되었고784)≪舊唐書≫권 199上, 列傳 149上, 東夷, 高麗.
≪新唐書≫권 220, 列傳 145, 東夷, 高麗.
신라에서는 버드나무 그릇, 동제 그릇, 질그릇을 사용하였고 한다.785)≪舊唐書≫권 199上, 列傳 149上, 東夷, 新羅.
≪新唐書≫권 220, 列傳 145, 東夷, 新羅.
식생활의 분화는 식기에도 나타났으며 금속기·유리기·칠기 등은 귀족들의 소용이 되었을 것이다.

 부엌세간 중에서 중요했던 것은 시루와 솥이다. 이들은 곡물을 조리하는 데에 필수적인 도구였다. 시루는 곡물을 쪄내는 도구로 이전 시기부터 널리 이용되었으며 출토 유물들과 벽화에서 그 모습을 많이 볼 수 있다. 그리고 경주시 노서동 제138호 고분과 황오동 제4호 고분, 평양시 정백동 등에서 청동제 鼎이 발굴되었다. 정은 세 개의 발과 두 개의 귀가 달려 있는 것이 특징인데 다리와 귀가 없어진 솥으로 발전하였다. 가마솥은 고구려의 고분벽화에 자주 나타나며 금령총에서는 두개의 쇠솥이 출토되었다.786)≪大正十三年 朝鮮古蹟調査報告-慶州 金鈴塚·飾履塚 發掘調査報告≫(조선총독부, 1924), 121∼123쪽. 벽화에서 보면 솥은 화덕 위에 놓고 사용한 것으로 보이는데 곡물조리에서 큰 변화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식생활의 안정과 분화는 음식의 조리와 가공기술을 발전시켰다. 우선 도정에는 방아가 이용되었다. 백결선생의 이야기에 방아가 등장하고787)≪三國史記≫권 48, 列傳 8, 百結先生. 벽화에 디딜방아가 보인다. 곡물조리에서도 쌀을 가루로 하여 죽을 쑤거나 쪄서 먹던 것에서 발전하여 솥에다 쌀을 끓여 익히는 밥을 짓는 단계로 발전하였다. 이외에도 시루를 이용하여 떡을 찌는 방법도 계속되었다. 떡에 대한 기록은 儒理王과 脫解王이 떡을 물어 잇자국으로 왕위를 정하는 이야기에서 보인다.788)≪三國史記≫권 1, 新羅本紀 1, 유리니사금. 떡의 주원료는 잡곡에서 쌀로 바뀌었으며 쌀과 잡곡의 혼합물이 많았을 것으로 보인다.789)이성우,≪동아시아속의 고대 한국식생활사연구≫(향문사, 1992), 385∼391쪽.

 그리고 각종 음식이 만들어져 부식으로 이용되었다. 가장 기본적인 상비식품은 醬이었다. 장의 원료인 콩은 일찍부터 재배되었고 널리 이용된 곡물이었다. 또한 뚜껑이 있는 壺形土器는 장과 관련하여 이해할 수 있다.790)윤서석,<신라의 음식>(≪신라사회의 신연구≫, 서경문화사, 1987), 207쪽. 통일신라시대의 기록이지만 神文王이 왕비가 될 집안에 보낸 예물에서 장·메주 등이 보이는데791)≪三國史記≫권 8, 新羅本紀 8, 신문왕 3년. 이것은 삼국시대부터 사용되었다고 보여진다. 장 이외에 소금은 조리에서 필수적인 요소였으며, 신문왕의 예물에 들어 있는 꿀과 기름도 조미료로 이용되었다.

 생선과 육류의 가공식품으로는 신문왕의 예물에서 脯와 醢를 볼 수 있다. 포는 고기를 통채로 말리는 방식에서 진전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해는 소금에 절여서 만든 음식이었다. 따라서 생선과 육류의 가공과 저장에 말리거나 절이는 방법이 주로 이용되었다고 보여진다. 이외에 장의 가공과 양조에서와 같은 발효에 의한 가공법도 발달하였다.792)강인희,≪한국식생활사≫(삼영사, 1990), 124쪽. 또한 음식물의 저장에는 얼음이 이용되었다. 智證王대에 처음으로 얼음을 저장하게 하였다고793)≪三國史記≫권 4, 新羅本紀 4, 智證王 4년. 하며 여름에 음식물을 얼음 위에 둔다는 기록도 있다.794)≪新唐書≫권 220, 列傳 145, 東夷, 新羅. 얼음은 결빙기에 천연빙을 채취하여 빙고에 저장하였다가 사용하였으리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이들 식품들이 왕의 예물에 들어 있는 것을 보면 상류층에서 이용되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특별음식으로는 술이 있었다. 고구려 사람들은 술을 잘 빚었다고 한다.795)≪三國志≫권 30, 魏書 30, 東夷, 高句麗.
≪梁書≫권 54, 列傳 48, 東夷, 高句麗.
그리고 백제에서는 곡식이 부족할 때 사사로이 술빚는 것을 금지하기도 하였다.796)≪三國史記≫권 23, 百濟本紀 1, 다루왕 11년. 술은 발효시켜 만든 곡주였으며 음식 가공기술의 발달과 밀접한 관련을 가졌다. 술은 주로 제사에 쓰였으며, 신라에서는 혼례에서 술과 음식을 내었는데 빈부에 따라 차이가 있었다고 하였다.797)≪隋書≫권 81, 列傳 46, 東夷, 新羅. 또한 각종 행사와 모임에서 술이 중요한 역할을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토기로 된 술잔 및 벽화에 나타나는 술잔들은 발달된 술문화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 시기에는 계절음식도 생겨났다. 신라에서는 정월 초하루에 하례식과 함께 연회를 열고 일월신에 제사하였으며798)≪隋書≫권 81, 列傳 46, 東夷, 新羅.
≪舊唐書≫권 199上, 列傳 149上, 東夷, 新羅,
≪新唐書≫권 200, 列傳 145, 東夷, 新羅.
정월 보름에 찰밥을 지어서 까마귀에 제사하였다799)≪三國遺事≫권 1, 紀異 1, 射琴匣.는 기록이 있다. 그리고 유리왕대에는 길쌈을 하여 팔월 보름에 승부를 정하고 진 편에서 술과 음식을 내었다고 전해진다.800)≪三國史記≫권 1, 新羅本紀 1, 유리니사금. 이들 節日은 지금에도 전해져 오고 있으며, 이를 통해서 계절음식이 발달하였다고 보여진다.

 지금까지 삼국시대 식생활의 모습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자료가 풍부하지 않아 많은 부분은 유추를 해야 했다. 또한 이들 자료는 기록에 남아 있거나 유물로 남아 있는 삼국시대 귀족층의 식생활에 국한된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자료로 이 시대의 식생활을 전체적으로 이해하기에는 매우 제한적이다. 그러나 삼국시대에 형성된 식생활 문화는 계층간의 차이가 있었지만 서로 넘나들면서 확대·발전되었다고 보여진다. 그리고 삼국이 형성한 식생활 문화는 그 특징들을 유지하면서 우리 민족의 식생활에 기여하였다고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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