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8권 삼국의 문화
  • Ⅶ. 문화의 일본 전파
  • 1. 선사시대 문물의 일본 전파

1. 선사시대 문물의 일본 전파

 한국과 가장 가까운 이웃은 일본이다. 그러므로 일본은 선사시대부터 한국을 통하여 대륙의 문화와 한국의 선진문화를 받아 점차 개척해 나갔으며 드디어는 농경사회를 이룩하고 부족국가를 세운 뒤에 급속도로 발전하였던 것이다. 즉 한국은 아시아대륙 東端의 반도국가로서 3면이 바다에 면하였다. 그리하여 중국 역사의 변천에 따라 많은 영향을 받았으며 때로는 禍를 당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대륙과 해양의 중간에 위치하여 우리의 문화를 일본에 전하는 교량적인 역할을 크게 하였다.

 한국과 제일 가까운 일본의 영토는 對馬島(쓰시마)이다. 한국에서 대마도 까지의 직선 거리는 48∼52㎞이며 대마도에서 일본 본토는 150㎞나 된다. 그러므로 대마도는 일본에서도 가장 먼저 한국의 문화를 받아들였을 것으로 생각되는데 실제 고고학적인 연구 결과 이러한 사실이 입증되었다.

 1969년에 부산광역시 영도구 東三洞 貝塚에서 櫛文土器가 발견되었는데 이후 1976년 대마도에 있는 越高(고시다까:長崎縣 上縣郡 大宇 越高)유적에서 우리 나라의 즐문토기가 출토되어 당시 이 유적을 발굴 조사한 坂田邦洋 교수는 월고유적을 부산 동삼동 패총과 직접 연결지어 한국의 신석기시대 문화가 이곳에 전해졌음을 주장하였다.817)坂田邦洋,≪韓國隆起文土器の硏究≫(1978).
永留久惠,≪對馬の文化財-古代の遺産-≫(杉屋書店, 1978), 27∼28쪽.
이러한 즐문토기는 이후 九州(큐슈)의 서북 연안에서 잇달아 발견되어 당시 한국의 문물이 이곳에 전해졌던 사실이 밝혀졌다. 長崎縣 福江市 下大津町 江湖 패총에서 발견된 曾田(소바다)式 토기, 大分縣 龍宮 동굴에서 발견된 토기, 壹岐(이끼)의 鎌崎(가마사끼)유적에서 발견된 소바다식 토기 등은 한국의 즐문토기와 직접 연관되어 한반도에서 건너간 것임을 일본학자들이 주장하고 있어,818)坂田邦洋,<曾畑式土器に關する硏究>(≪江湖貝塚≫, 長崎, 1973), 69쪽.
永留久惠, 앞의 책, 26쪽.
對馬島와 壹岐는 당시 일본 본토에 한국의 문화를 전해주는 길목 역할을 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후 청동기시대로부터 고분시대에 이르는 한국의 문물은 대마도, 일기를 거쳐 일본 본토에 가득히 전달되고 있음을 여러 곳에서 볼 수 있다. 우선 대마도의 ‘塔の首’(도노구비)유적을 들면, 이 유적은 대마도 東北端의 比田勝(히다가쓰) 항구를 내려다보는 언덕에 있는 4基의 石箱墳으로 1971년에 발견되었으며 九州大學에서 발굴·조사하여 비로소 학계에 알려졌다. 대지 위에 4기가 있었으나 아래쪽에 위치한 1기는 대부분 파괴되어 약간의 흔적으로 석재가 남아있을 뿐이다. 2기의 석상분이 완전하여 유물이 수습되었는데 이들은 거의가 한국의 호남지역에서 출토되고 있는 유물들과 같다는 것이 일본학자들의 견해이다.819)對馬 上縣町敎育委員會,≪上縣町の文化財≫(1983). 이밖에 대마도 각 처에서 많은 청동기시대의 유적 유물이 발견되고, 일기에서도 여러 곳에서 청동기시대의 유적 유물이 발견되었는데 특히 일기의 ‘가라까미’유적 출토유물과 鄕浦(고노우라) 사료박물관 소장의 銅劍과 戈 등은 모두 한국에서 직접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졌다.

 ≪三國志≫魏志 東夷傳 弁辰條에 의하면 倭와의 관계를 약간이나마 알 수 있는데 倭人傳에는 대마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拘耶韓國(金海)에서 처음으로 一海를 건너 千餘里에 對馬國에 이른다. 그 大官은 卑拘, 副官은 卑奴母離라 한다. 사는 곳은 絶島이고 넓이는 대략 四百餘里이다. 土地는 山이 險하고 深林이 많고 道路는 짐승이 다니는 좁은 길과 같다. 千餘戶가 있다. 良田이 없고 海物을 먹고 自活하는데 배를 타고 南北에서 쌀을 사들인다(≪三國志≫魏志 東夷傳 弁辰).

 위지 동이전이 만들어진 것은 297년으로 3세기인데 이 내용을 보면 대마도의 자연과 인문을 간결하면서도 정확하게 설명하고 있다. 한편 이 기록에 의하여 철기시대에 대마도의 상황이 파악되어 문헌에까지 기록되었음을 알 수 있어 이때에는 더욱 많은 문물의 전파를 짐작하게 한다.

 九州 지역의 청동기시대를 비롯한 이후의 유적 유물은 곳곳에서 많이 발견 조사되었는데 福岡(후꾸오까)의 板付(이다쓰께) 유적은 일본 최초의 畓(논) 농사 유적으로 유명하며 이 유적에서 나온 옛날 쌀(古代米)이 우리 나라에서 발견된 옛날 쌀과 같다는 것이다. 벼농사의 경로를 고찰함에 있어서 중요한 문제는, ‘문화의 영향’으로 벼농사가 시작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年中 계획적으로 일을 해야 하기 때문에 간단하게 익힐 수가 없는 기술이며 따라서 벼농사에 익숙한 사람들이 건너와 직접 벼농사를 지었음을 생각하게 된다. 여기서 벼농사에 익숙한 사람들의 渡來 경로가 문제될 것이나 이곳의 옛날 쌀이 한국의 옛날 쌀과 같다는 것은 곧 우리의 조상이 일찍이 이곳에 와서 벼농사를 지었음을 부정할 수 없게 하는 것이다. 벼농사의 경로를 고찰함에 있어서 또 한가지는 구주지역에서 출토되는 石器들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汲田(쿤덴) 유적에서 발견된 석기는 벼이삭을 훑는 半月形石刀와 蛤刀石斧·有溝石斧·磨製石劍·長柳形石鏃 등인데 반월형석도와 합도석부는 중국과 한국에서 볼 수 있으나 유구석부와 마제석검, 장류형석촉은 한국에서만 출토되는 석기이다. 그러므로 이곳의 벼농사 유적은 곧 한국과 직결됨을 알 수 있는 것이다. 한편 한국의 중·남부지방에서 성행하였던 南方式支石墓(일명 바둑판 지석묘)가 구주의 唐津(가라쯔)市의 葉山尻(하야시리)에 산재해 있음을 볼 수 있으며 이곳에서 출토된 유물들이 한국의 것과 연결되었음은 이미 학계에 알려진 사실이다.

 벼농사의 문제를 形質 인류학의 입장에서 논한 것은 金關丈夫씨이다. 金關씨는 山口縣 土井ケ浜(도이가하마) 유적과 佐賀縣 三津(미쓰) 유적에서 발견된 人骨의 신장이 당시 일본인보다도 크며 오늘날의 경상도지방 사람들에 가깝다는 점을 들어 “새로운 종족의 상당수가 일본에 건너와서 구주지방 뿐만 아니라 畿內(기나이) 지방까지 퍼져 나갔다”고 주장하고 있다. 벼농사는 쉽게 배울 수 없는 기술이라는 점과 농경에 따르는 석기와 옛날 쌀을 한국에서 볼 수 있는 사실에 비추어 金關씨의 설은 설득력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구주지방에서의 ‘벼농사의 시작’은 그 재배 기술을 익힌 사람들의 도래 없이는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 지방에 뿌리를 내린 벼농사는 백년 후에 名古屋(나고야) 지방인 伊勢灣(이세완) 연안에까지 파급되었으며 수천 년 동안 이어오던 채취경제와는 멀어지게 되었다. 이와 같이 쌀을 주식으로 하는 일본문화의 기반은 한반도로부터 건너간 사람들에 의하여 이루어졌던 것이다.820)李進熙,≪韓國과 日本文化≫(乙酉文化社, 1982), 11쪽.

 이렇듯 벼농사가 일본 본토에 미치면서 구주 일대는 새로운 문화가 밀려들었으니 한반도의 남부지역에서 볼 수 있는 無文土器와 甕棺이 이곳 구주 지역에 나타나게 된 것이다. 청동기시대 말기의 일로 佐賀縣 唐津市 宇木汲田(우키쿤덴) 유적에서 백 수십 기의 옹관묘가 발견되었으며 일부 옹관에서는 銅劍과 銅鉾가 출토되었고 최근에 이르러는 佐賀縣 神崎(간사끼) 지역의 ‘吉野ケ里(요시노가리)’ 유적에서 수많은 옹관이 출토되어 크게 주목되고 있다.

 죽은 사람을 옹관에 넣어 묻고 청동제의 무기를 부장품으로 넣는 풍속은 경상남도 김해 지방에서 볼 수 있는 것으로 기원 후 1세기경의 한반도 남부와 구주의 북쪽 지방이 같은 문화권이었다는 사실을 입증해 주는 것이다. 이와 같은 사실은 여러 곳에서 볼 수 있는 바 福岡市 西區 周船寺千里(스젠지센리)에 있는 三所神社(산쇼진자)의 飛石(도비이시)에 얽힌 이야기를 대표로 들 수 있다. 이 도비이시는 支石墓인데 이 마을 사람들은 옛부터 ‘가라구니(韓國)’에서 날아온 것이라고 전해진다는 것이다. 이 고장의 기록인 糸島郡誌(이도시마군지)에는 “고구려로부터 천리나 되는 먼길을 거쳐왔기 때문에 이러한 이름이 생겼다. 千里라는 地名도 여기에서 유래된 것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시기에 중국 대륙에서는 큰 변동이 일어났으니 기원 후 8년에 王莽이 漢나라를 쓰러뜨리고 新나라를 세웠으며 12년에는 匈奴 정복을 에워싸고 고구려와 대립하였고 25년에 光武帝가 後漢을 세웠던 것이다. 그런데 왕망이 신나라에서 14년에 주조한 화폐인 貨泉이 44년까지 사용되었는바 이 화천이 金海와 제주도에서 발견되었고 일본에서는 대마도 豊玉町(도요도마 마찌)과 壹岐의 原辻(하라노쯔지), 糸島(이또시마)반도의 志摩町(시마쬬) 등지에서 출토되었다. 이와 같이 문헌과 유적 유물이 보여주듯 1세기로 접어들면서 한국의 문물은 모든 것이 九州지방에 들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2세기는 일본의 청동기시대의 말기로 한반도에서 조성한 동검과 동모, 銅戈 등이 자취를 감추고 그 대신 그것들을 모방한 大形의 劍과 鉾가 나타났다. 이들의 모양은 한국의 것을 닮았으나 대형으로 과장되어 있는데 이것은 실용적인 무기가 아니라 제사를 지내기 위한 도구로서 주조되었던 것이다.821)李進熙, 위의 책, 20쪽.

 이렇듯 한반도의 문화가 구주지역에 새롭게 자리잡을 때 이곳의 문화는 瀨戶內海(세도나이까이)를 거쳐 大阪灣(오오사가완) 연안을 비롯한 일본 본토에 상륙하였으니 이 지역에서 발견되는 銅鐸들이 그 증거인 것이다. 이것은 한국의 작은 동탁이 크게 변하고 장식적으로 변화한 것으로 농경사회에서 풍년을 기원하는 제사에 없어서는 안 될 도구였던 것이다. 이 시기에 이르러는 銅鏡이 나타나고 石器가 자취를 감추게 되었으니 鐵로 만든 무기와 농기구가 보급되었기 때문이다.

 이상과 같이 선사시대의 한반도 문물이 일본으로 전달된 상황을 살펴보았는바 우선 신석기시대의 자취가 역력하다. 특히 기원전 3세기부터 기원후 2세기에 이르는 기간에 한반도로부터 수많은 사람이 일본으로 건너가 청동기, 벼농사의 기술, 철기 등의 새로운 문화를 전했으며 이에 따라 墓制·思想 등 많은 문물을 전하였으니 일본의 ‘새로운 문화의 서광’은 항상 한국으로부터 왔다.

 고구려·백제·신라는 기원전 1세기에 초기 국가로서의 면모를 갖추기 시작하였으며 이후 3세기부터는 고대국가의 체제를 정비하면서 점차 발달하고 있었다. 4세기후반에 불교를 수용하면서 삼국의 문화는 사상·학문·제도·예술 등 모든 면에 획기적인 변화와 발전을 가져오게 되었다. 그리하여 고도화한 삼국문화는 곧 일본으로 전해져 일본 고대문화 형성의 기틀이 되었다. 문화의 전파는 수준 높은 문화권에서 미개한 곳으로 흘러가는 것이 필연적 사실이다. 신석기시대부터 청동기시대에 걸쳐 일본에 전달된 우리의 문화는 일본을 깨우쳐 주었다. 이제 삼국의 문화는 역사시대에 이르러 보다 차원 높은 문물이었으니 이러한 고도의 문화가 일본으로 전해져 일본의 고대국가 성립과 문화형성의 기반을 이룩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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