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8권 삼국의 문화
  • Ⅶ. 문화의 일본 전파
  • 2. 학문과 사상

2. 학문과 사상

 삼국의 찬란한 문화는 한국과 이웃하고 있는 일본에 전파되어 많은 영향을 주었다. 삼국문화의 일본전수에서 가장 큰 역할을 한 것은 백제였다. 그것은 백제가 삼국 가운데 일본과 정치적으로 연결되어 친선관계가 유지되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일본에 학문을 제일 먼저 전해준 나라는 백제였으니 일본의 史書인≪古事記≫와≪日本書紀≫에 잘 보이고 있다.

 즉≪고사기≫중권 應神天皇 20年 己酉條에 보면 백제의 照古王(近肖古王)이 阿知吉師와 和邇吉師를 일본에 파견하였는바 이때 화이길사는≪論語≫10권과≪千字文≫1권을 가지고 갔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들은 후일에 아지길사는 阿直史等의 祖가 되고 화이길사는 文倉等의 祖가 되었다고 한다.

 ≪일본서기≫應神天皇 15年 甲辰條와 應神天皇 16年 乙巳條에 보면 백제인 阿直岐는 능히 經典을 탐독할 수 있는 자로서 일본에 건너가 菟道稚郞子의 스승이 되었고 그후 博士 王仁이 일본에 초빙되어 가서 역시 經學을 전해 주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 두 책의 내용을 좀더 주목해 보면 당시 일본에서 荒田別(아라다 와께)와 左別(가무나기 와께)를 백제에 보내어 학자를 구하니 임금의 명령으로 왕인이≪논어≫10권과≪천자문≫1권을 가지고 일본으로 건너갔는바 그의 해박한 經書의 지식으로 하여 일본 應神主의 신임을 받고 太子의 스승이 되었으며 이후 일본의 ‘學問의 祖上’으로 숭배되었다는 사실이다.

 한국에는 고대의 관계기록이 없으나 조선시대에 이르러 몇 가지 문헌에 전라남도 靈巖郡 郡西面 鳩林里 지역의 왕인박사 史蹟에 관한 내용이 보이며 현재 이곳에는 구전되는 왕인박사에 관한 역사와 유적이 여러 곳에 남아 있다. 현지에서는 영암군 당국은 물론 王仁博士顯彰協會 등 여러 모임에서 그 동안 국내·외의 왕인박사 관계 사적을 조사하여 많은 論著를 발표하기도 하였으며 일본에서도 왕인박사 묘소 등 관계 사적을 보호하는 모임이 있어 여러 권의 논저를 출간하고 있다. 그러나 사학계에서는 왕인박사에 관한 사적조사와 연구가 아직은 미흡한 것 같으며 혹자는 부정적인 시각마저 보이고 있는 것 같다. 그것은 왕인박사가 일본으로 건너갔다는 기록이 한국의 史書에는 없으며 漢城 도읍기인 당시의 상황에서 渡日이 가능하였겠느냐는 생각에서 나타나는 의문인 것 같다.

 한국에서 일본으로 전파된 문화는 이미 삼국시기 이전부터 다양한데 신석기시대와 청동기시대의 문물을 비롯하여 삼국시대에는 고구려·백제·신라의 문화가 일본 각 지역에 넓게 펴졌음을 볼 수 있으므로 한성 도읍기의 왕인박사 도일은 충분히 가능한 것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도일 사실의 기록문제는 당시 젊은 왕인박사가 도읍지인 한성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靈巖에서 일본으로 건너갔으니≪三國史記≫나≪三國遺事≫에 누락될 수도 있는 일이 아니었던가 한다. 오늘날 우리는 이들 史書에 누락된 역사적 사실을 각 지방 답사에서 얼마든지 찾아내고 있음으로 누락문제로 의문시 할 수는 없을 것 같다. 한편 일본에서는 문자를 전해주고 학문을 가르쳐준 국가의 은인이니 그들의 사서에서 명확히 밝히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러한 일은 마치 고려 제4대 光宗 때 과거제도를 실시케 해준 중국의 雙冀가 중국측 사서에는 보이지 않으나≪高麗史≫와≪高麗史節要≫에는 명기되어 있는 일과 같다고 하겠다.

 현재 영암군의 구림리에는 왕인박사의 生家址인 聖基洞이 있고 이에 따르는 몇 곳의 遺址와 도일시 출항 포구였다는 上台浦 등의 사적지가 있다. 그리고 일본에는 大阪府內 각 市 지역에 왕인박사와 관련된 많은 유적과 그의 자손들과 관계된 각종 사적이 다양하게 남아있다. 일본에서 조사된 왕인박사 관계 사적은 오히려 한국내의 사적보다 훨씬 많다.

 예컨대 八尾神社(大阪府 八尾市 近鐵 八尾驛 근방)는 왕인의 후손이 그의 祖神 왕인을 제사 지내는 곳이며 八坂神社(大阪市 淀區 大仁本町)는 곧 王仁神社로 왕인을 제사 지내는 곳으로 王仁像이 봉안되어 있고 王仁聖堂址(大阪府 松原市 岡町)는 일찍이 왕인이 이곳에서 講學하던 자리라 하여 추앙하고 있는 곳이다. 王仁墓(大阪府 杖方市 藤坂元町)는 왕인의 묘소로 많은 참배객이 끊이지 않고 있는데 이밖에 方違神社·高石神社·白鳥神社·西琳寺·藤井寺·野中寺·王仁池·和爾下神社·왕인마을 등 20여 곳에 왕인과 관계된 사적이 있음이 조사되었다. 그런데 九州 佐賀縣 神埼郡 神埼町 竹原지구에 鰐大明神社가 위치하고 있는데 여기에 왕인석상과 ‘王仁天滿宮’이라 새겨진 석비가 전하고 있다. 신사가 위치한 죽원지구는 한국으로부터의 도래인이 최초로 상륙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지역인데 인근에 ‘吉野ケ里’ 역사공원유적이 있어 더욱 주목된다. 따라서 왕인이 이곳을 거쳐 일본 내륙으로 들어갔을 가능성이 있다는 현지 관계자들의 말은 주목을 끈다. 이와 같은 연유로 인하여 이 신사에서 왕인을 神으로 모시고 있는 것이다. 신기정에서 세운 안내판을 보면 “王仁이 지금으로부터 천 수백 년전에 應神天皇의 초청을 받아 백제로부터 많은 기술자 집단을 데리고 옴으로써 일본 최초의 漢字 교본인≪천자문≫과 유교의 원전인≪論語≫를 전하였다. 왕인박사 일행은 조선반도의 南西端의 목포항으로부터 渡海한 것으로 전해지는데 일본의 어디에 상륙하였는지는 기록에 없다. 혹시 吉野ケ里의 도래인들처럼 이곳 죽원지구 부근에 상륙한 것은 아닌가”라고 쓰여져 있다.

 이와 같은 모든 점을 종합해보면 백제로부터 일본에 학문이 전해지고 그 주인공은 왕인이었는데 이러한 문제에 대해서는 최근에 연구결과가 집성되어 출간된 바 있다.822)鄭永鎬,≪百濟王仁博士史蹟硏究≫(韓國敎員大 博物館 學術調査報告書 第9輯), 1∼188쪽.

 당시 백제의 왕인박사가 일본에 가지고 갔다는≪논어≫는≪阿晏集解論語≫이고,≪천자문≫은 魏나라의 鍾繇의 것이라고 李丙燾 박사는 말하고 있다.823)李丙燾,≪韓國古代史硏究≫(박영사, 1976), 579쪽. 백제는 일찍부터 漢郡縣과 접촉이 있었고 근초고왕대에는 東晋과 직접 통교하여 동진으로부터 鎭東將軍領樂浪太守라는 칭호를 받기도 하였다.824)≪晋書≫권 9, 簡文帝 咸安 2년. 그러므로 동진이 학술과 사상이 백제에 전달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한자가 일본에 전해진 것은 이보다 앞서서≪삼국지≫위지 동이전 왜인조에 보이는 바와 같이 왜의 작은 나라들이 중국 및 낙랑·대방군과 교섭함으로써 이루어지게 된 것이나 본격적으로 한문이 전달된 것은 왕인박사의 일본행을 시발로 잡아야 할 것이다. 이렇듯 백제가 일본에 한문을 전함과 동시에 유학을 전수시킨 것은 백제가 이후 한성으로부터 熊津·泗沘로 도읍을 옮기고 나서도 끊임없이 계속되었는데, 이러한 사실은≪일본서기≫에 자주 보이는 백제의 五經博士 파견 사실로서 충분히 알 수 있는 것이다.825)≪日本書紀≫繼體天皇 7년 및 欽明天皇 15년. 백제는 이미 근초고왕대에 博士制가 갖추어져 있었으므로 유학에 대한 이해도 백제적인 것으로 소화되고 유학사상 역시 정리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며, 따라서 일본에 전달한 유학과 그 사상도 백제적인 것으로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이 백제로부터의 학문과 유학사상의 일본 전수는 곧 일본에서의 학문과 유학사상의 보급을 보게 되고 유교정치이념의 이해를 가져오게 되어 정치적인 측면에서도 반영되기 시작하였다.≪일본서기≫推古天皇 11년조와 12년조를 보면 당시 섭정을 하고 있었던 聖德太子(쇼도구다이시)가 12階冠位와 17條 헌법을 제정하였다는 것이다. 冠位 12階는 德·仁·禮·信·義·智를 각각 大小로 나누어 12계로 한 것인데, 이것은 유교 덕목 그 자체를 이용해서 만든 것임을 알 수 있다. 17조 헌법은 儒彿사상에 입각하여 여러 신하들을 훈계하는 지배 원칙으로서 제2조의 ‘篤敬三寶云云’을 제외하고는 각 조목의 대부분은≪논어≫나≪孝敬≫·≪禮記≫·≪管子≫등 유교 典籍의 사상을 따거나 구절을 이용하고 있어서 이것 또한 유교사상을 바탕으로 하여 이루어진 것임을 알 수 있다.

 한편 이 관위 12계와 17조 헌법을 제정한 성덕태자는 불교관계는 고구려 승려인 惠慈에게 배우고, 유학은 박사 覺哿에게서 배워 통달했다고≪일본서기≫추고천황 원년조에 기록되고 있다. 여기에서 각가에 대한 인적 사항은 분명하지 않으나 일본에 유학을 전달한 나라가 백제이고 또 백제가 일찍이 박사제를 수립하여 오경박사를 일본에 파견한 일이라던가 각가가 박사란 칭호를 갖고 있었다는 점 등으로 미루어보아 백제사람으로 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따라서 그의 유학사상은 성덕태자에게 큰 영향을 주었을 것이고 그것은 바로 백제의 유학사상의 영향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일본에서 유학이 보급되고 유학사상이 이해되며 관위 12계와 17조 헌법을 통한 유교정치이념이 정치에 반영되었다는 점 등을 생각해 볼 때 백제의 유학사상이 짙게 반영되었을 것이며 일본으로 건너간 백제계 사람들이 그 구심적인 역할을 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한편 道家思想과 五行思想이 삼국시대에 자리잡고 있었으나 언제 한반도에 들어왔는지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고구려에서는 4세기말부터 5세기초에 걸쳐 四神圖가 고분 벽화에 나타나기 시작했고 7세기에 이르러는 벽화 고분의 주류가 사신도로 변하게 되었다.

 ≪삼국사기≫고구려본기 榮留王 7年條(624)를 보면 “唐나라 高祖는 道士에게 명하여 天尊像 및 道法을 가져와서 老子를 講論하게 하므로 王과 國人이 이를 청강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백제에서는 근초고왕대의 장군 莫古解가 근초고왕의 태자에게 간하기를 “일찍 道家의 말을 들으면, 만족할 줄 알면 욕되지 않고 그칠 줄 알면 위태롭지 않다고 하는데 지금 소득도 많거늘 어찌 더 많이 구하려 하리오” 즉 ‘知足不辱 知止不殆’라는 老子道德經의 구절을 인용한 것이≪삼국사기≫백제본기 近仇首王 즉위년조에 보인다. 이것은 근초고왕 30년(375)에 고구려의 故國原王이 친히 군사를 이끌고 백제를 침공했을 때 太子(後에 근구수왕)가 이를 격퇴하고 또다시 추격하려고 함에 장군 莫古解가 태자에게 간한 이야기이다. 이와 같은 고구려와 백제의 역사로 보아 도가사상이 일찍부터 한반도에 전래하였음을 알 수 있다.

 고구려 사신도 고분 벽화의 영향은 곧 백제에 미치어 公州 宋山里 6호분과 부여 陵山里 1호분과 같이 사신도 벽화 고분이 나타나게 되었고 이러한 四神思想과 五行思想은 묘지 선정에도 반영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밖에 부여에서는 山景文塼이 출토되었는데 이 塼에도 도가사상과 오행사상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周書≫百濟傳에는 ‘又解陰陽五行’이라 하여 백제사람들이 음양과 오행사상을 이해하고 있었음을 전하고 있다. 이와 같은 사실은 삼국시대에 이미 도가사상과 오행사상이 성립되어 성행하였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일본에서 도가사상과 오행사상이 비롯되는 것은 학문의 전수와 같이 백제로부터 전달된 것으로 생각된다. 백제본기의 막고해 사례로 보아 근초고왕대에 이미 도가사상이 짙었음을 알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여기에 주목되는 일은 백제의 왕인박사가 일본에 전한≪논어≫가≪아안집해논어≫라는 점이다. 당시 중국은 남북조시대로서 도가의 학문이 성행하던 때였다. 이때에 阿晏은 동진시대의 유명한 道家였으므로 도가적 입장에서 유교경전을 해석하고 주해하였을 것이다.826)馮友蘭,≪中國哲學史≫, 602∼605쪽. 그러므로 아안이 집해한≪논어≫에는 도가사상의 요소가 다분히 들어있었을 것이고 따라서≪아안집해논어≫를 전수한 왕인도 도가사상을 이해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827)李能和,≪韓國道敎史≫(東國大, 1959), 58∼61쪽. 이렇게 이해한다면 왕인이 일본에≪논어≫와≪천자문≫을 전한 것은 유학만의 전수에 그치지 않고 도교사상의 전달도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러한 점은 그의 후손들로 이루어져 있다고 하는 東六部·西六部가 훗날 도교의식의 제사를 담당하고 있었다는 사실에서도 짐작이 된다.828)李能和, 위의 책, 50쪽.

 한편≪일본서기≫추고천황 10년조를 보면 百濟의 승려 觀勒이 曆本及天文地理遁甲方術之書를 전하고 또 선발된 書生 가운데 大友村主 高聰에게는 天文遁甲을, 産背臣 日立에게는 方術을 가르쳐서 盛業케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관륵스님 자신이 일본 불교계의 중심 인물로서 그에 의한 천문·방술의 교육은 도가 및 오행사상의 유포에 중요한 작용을 하였을 것이다.

 이와 같이 백제인에 의한 도가사상과 오행사상의 전수는 정치적인 면에서도 반영되었으니 聖德太子傳曆에 의하면 태자가 12계 관위를 제정함에 있어서 “太子始制五行位 德仁義禮智信各有 大小德攝五行也 故置頭首”라 하여 유교 덕목에 오행사상을 가미시킨 것을 알게 한다. 12계 관위의 제정이 관륵스님이 일본으로 건너가 오행사상을 전수한 바로 이듬해라는 점을 생각할 때 성덕태자가 오행사상을 이해, 터득함에 있어서 관륵의 영향이 강하였던 것으로 짐작된다. 이밖에 오행사상은 일본에 있어서의 고분 벽화에도 반영되어 이후 조성된 飛鳥의 高松塚 고분에서는 人物行列圖와 함께 사신도가 배치된 벽화가 나타났다. 이 고분 벽화는 여러 학자가 주장하듯이 벽화를 그린 사람이 고구려 계통이라 하겠는데 이러한 점으로 보았을 때 고구려인에 의한 오행사상의 전달도 추측할 수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모든 점들을 종합해 볼 때 일본에 있어서 도가사상과 오행사상의 성립도 백제와 고구려에 의하여 이루어졌으며 이 두 나라 사람들의 활동에 의하여 일본의 정치와 사회생활에 크게 반영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한편 불교사상에 있어서는, 고대국가 성립 과정에 있어서 사상적 통일에 크나큰 공헌을 한 것이 곧 불교였다. 삼국에 있어서 불교의 수용은 고구려는 소수림왕 2년(372)이었고 백제는 침류왕 원년(384)으로 4세기 후반의 일인데 신라는 법흥왕 14년(527)에 공인되었으니 두 나라에 비해 약 150년이 늦은 셈이다. 그러나 신라에는 눌지왕대(417∼457) 초년에 이미 낙동강유역에 불교가 들어와 있었으므로 신라의 불교 전수도 4세기 후반에서 그리 멀지 않은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일본의 불교 전수는 두 가지 설이 있는데 하나는≪일본서기≫欽明天皇 13년조(552)에 백제 성왕이 釋迦佛金銅像 1軀와 幡蓋 若干, 經論 若干卷 및 流通禮拜功德의 讚表를 첨부하여 보냈으니 이것이 불교전래의 시초라는 것이고, 또 하나의 설은<元興寺迦藍緣起拜流記資材帳>의 戊午年(538)인데 538년 설은 백제의 성왕때 太子像과 灌佛器一具, 佛書一卷 등을 가지고 일본으로 왔다는 것으로 이 兩說은 각기 타당성이 있는 내용이다. 538년과 552년은 14년의 차이로 양설이 모두 백제 성왕때의 사실인 점이 주목되며 역시 일본 불교의 시발이 백제에 있었음을 분명히 해주고 있다.

 백제는 서울을 熊津(지금의 公州)으로 옮긴 후 大通寺와 같은 큰 사찰을 창건하였고 웅진 도읍기에 축조한 武寧王陵의 玄室 벽면은 蓮花紋塼으로 쌓여 있으며 부장품으로 불교적인 내용물이 출토되고 있어 불교 신앙이 융성했던 당시의 상황을 짐작할 수 있다. 성왕은 謙益이 인도에서 가지고 온 梵文五部律을 번역하게 하여 백제 新律을 성립시켰으며829)李能和,<百濟時代 彌勒佛光寺事蹟>(≪朝鮮佛敎通史≫, 新文館, 1918;韓國學資料叢書 4, 永信아카데미 韓國學硏究所, 1977, 영인). 중국의 梁나라로부터<涅槃經義疏>를 청해오는 등 敎學의 발전을 도모하였다. 그리하여 당시 백제의 불교가 성황을 이루었던 사실을≪周書≫백제전에 ‘僧尼寺塔甚多’라 표현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으로 미루어 볼 때 일본에 전수된 불교는 백제적인 불교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후 백제의 문물들은 끊임없이 일본에 전수되어 律師·禪師·比丘尼 등의 승려들을 파견하며 經論을 보내고 瓦博士·鑪盤博士·造佛工·造寺工 등 사원건축에 중심이 되는 기술자들을 파견하여 많은 사원을 창건하고 불상을 조성하였으니 이러한 사실이≪일본서기≫敏達天皇 6년조와 13년조, 그리고 崇峻天皇 원년조에 보이고 있다.

 일본에서 불교를 수용하게 된 것은 당시 불교 숭배를 적극적으로 추진한 蘇我氏와 불교를 배격하고 재래의 國神信仰을 주장한 物部氏와의 대결에서 소아씨가 승리하여 권력을 장악함으로부터 비롯되었다. 소아씨는 추고천황대의 실력자로서 이후 불교를 크게 장려하고 法興寺(飛鳥寺)를 창건하였는데 이 소아씨는 백제계통의 사람으로 한반도에서 이주한 세력 집단을 배경으로 하여 정계에 두각을 나타낸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는 것이다.830)李弘稙,≪韓國古代史의 硏究≫(新丘文化社, 1971), 344∼347쪽. 이러한 상황으로 볼 때 일본의 불교는 백제로부터의 전래뿐만 아니라 일본에서의 홍법과 장려에도 백제계 사람들의 역할이 절대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점은 불교가 전해진 후 일본지역에서 승려가 된 사람들의 대다수가 백제계 사람이 아니면 고구려와 가야계의 사람들이었다는 사실과831)金錫亨,≪古代朝日關係史≫(勁草書房, 1969), 456∼457쪽. 백제가 여러 차례에 걸쳐 승려와 기술자들을 보내어 불교신앙을 장려했다는 점으로도 입증할 수 있다. 이후 일본의 불교는≪일본서기≫추고천황 32년조에 “當是時有寺有冊六所 僧八百十六人 尼五百六十九人 幷一千三百八十五人”이라 함과 같이 신앙의 확대를 보았던 것이다. 이것은 또한 불교적인 면에도 자극을 주게 되어 善信尼 등 3명의 尼僧이 戒學을 배우러 백제에 왔으며832)≪日本書紀≫, 崇峻天皇 원년. 따라서 교학의 발전도 보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일본에서의 교학적인 면의 발전도 백제와 고구려 승려들의 활동에 의하여 이루어졌다는 사실에 유의해야 할 것이다. 우선 계학을 볼 때 백제의 계학은 이미 성왕대에 新律의 성립을 보아 독자적인 발전을 이루고 있었음이 짐작되거니와 백제가 일본에 율사를 자주 파견한 일이라던가 일본의 善神尼 등이 백제에서 계학을 공부하였다는 점 등을 생각해 볼 때 일본의 계학은 바로 백제의 것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다. 계학뿐만 아니라 三論을 講한 관륵스님은 백제의 승려였으며 원흥사에 살면서 三論宗을 弘布하고, 일본 三論宗의 시조가 된 혜관은 고구려의 승려였고 唐吉藏에게 三論을 전수받아 일본에 전한 道澄도 고구려의 승려였다고 한다.833)李能和, 앞의 글, 28∼30쪽. 이러한 점으로 미루어보아 일본의 삼론학이 삼국의 승려들의 활동에 의하여 성립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당시 법문의 領袖로 추앙을 받고 있던 道藏은 백제 사람인데 그는 成實論을 講하여 成實學을 펼쳤으며 그가 편찬한 成實論疏 16권은 이후 成實의 講學에 중심이 되었다고 한다.834)李能和, 위의 글, 43∼44쪽. 이것도 일본의 성실학이 백제인에 의하여 성립되고 전파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성덕태자는 고구려 승려인 惠慈로부터 불교를 배웠으므로 그의 불교 사상에는 혜자의 영향이 강하게 작용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것은 혜자가 三寶의 棟梁으로 칭송을 받았고≪일본서기≫추고천황 3년·4년조에 보이듯 추고천황 4년(596)에는 흥법사가 창건되어 그 주지로 임명되었다는 사실에서도 알 수 있는 일이다. 따라서 혜자의 활동은 고구려 불교사상이 일본 불교에 강하게 영향을 미치고 있었음을 짐작케 한다. 추고천황 32년(624)에는 어떤 승려가 祖父를 구타한 사건이 일어났는데 이 사건을 계기로 하여 처음으로 僧正·僧都 등의 僧官을 두어 사찰과 승려를 감찰하도록 하였다고 하는데 이 僧官制 설립에는 백제의 승려 관륵이 깊이 관여하였던 것 같다. 그것은 관륵스님이 ‘승려의 조부 구타사건’을 ‘以僧尼未習法律 輒犯惡逆’으로 파악했다는≪일본서기≫추고천황 32년조의 기록이라던가 또는 관륵스님이 初代 僧正으로 임명되어 僧尼의 기강을 바로 잡았다는 점에서 알 수 있는 것이다. 僧官濟 실시 이후 초대 僧都에 고구려의 德積스님이 임명되었고 2대 僧正에는 고구려의 慧灌스님이 임명되었다는 사실이≪일본서기≫초고천황 33년조에 기록되어 있다. 이 혜관스님은 일본 삼론종의 시조가 되었다는 것인데 이러한 사실 등은 결국 일본에 있어서의 승관제 실시도 백제와 고구려 승려들의 활동과 영향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임을 알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이상과 같이 살펴본 내용에서 볼 때 일본에 있어서 불교는 초기 전파 과정뿐만 아니라 교학의 발전, 승관제도의 수립, 불교사상의 정치에의 반영 등 모든 면에 있어서 백제와 고구려 승려들의 활동에 의하여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으며 고대국가 성립의 정신적 이념으로서의 불교사상은 三國에서 성립된 불교상이 전달된 바로 그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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