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8권 삼국의 문화
  • Ⅶ. 문화의 일본 전파
  • 4. 예술 문화

4. 예술 문화

 일본은 일찍이 선사시대부터 한반도의 문물을 받아들여 문화가 점차 발달하기 시작하였는데 6세기 초반(538∼552) 백제로부터 불교를 수용한 이후 조형적인 예술 문화가 더욱 발달되었다. 즉 불교신앙이 확대됨에 따라 불교적인 조형미술이 발달했다는 것이다. 그것은 불교의 弘法과 敎勢의 확장에 따라 사찰과 불탑의 건립으로 건축미술이 발달되고 불상과 불교적인 조각물의 조성으로 조각술이 발달되었으며 아울러 불교적인 회화(佛畵:幀畵)와 공예미술 등의 발달을 보게 된 것이다.

 이러한 일본의 불교문화는 문헌상으로나 현존 유적 유물, 그리고 불교 고고학적인 발굴 조사에 의하여 증명되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잊어서는 안될 것은 고대 일본의 불교문화, 즉 조형적인 미술의 성립과 발달에 있어서 어느 한 나라 뿐만이 아니라 고구려·백제·신라 삼국의 불교문화가 절대적인 영향을 주었다는 것이다. 일본에 있어서 불교의 전수와 교학의 발달이 한반도에서 건너간 세 나라의 승려들에 의해서 이루어지고 그들의 활동에 의하여 정착하였으므로 불교신앙과 불교사상은 바로 삼국이 定立시킨 것이라 하겠다. 따라서 사원과 불탑의 건축, 불상 조각, 불교 회화, 불교적인 공예 등 불교와 관련된 모든 불교예술이 삼국을 생각하지 않고서는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우선 문헌상으로 보면≪일본서기≫敏達天皇 6년조(577)에 백제가 造寺工과 造佛工 등을 파견한 사실이 있고 崇峻天皇 원년조(588)에는 佛舍利 奉送과 함께 많은 승려와 寺工·鑪盤博士·瓦博士·畵士 등을 파견한 사실이 보인다. 이와 같이 백제로부터 조사공, 사공이 파견되었다는 것은 사원 건축이 진행되었음을 알 수 있고, 조불공이 파견되었다는 것은 불상 조성 등 조각의 발달을 알 수 있으며, 화사가 파견되었다는 것은 회화나 불화 등의 발달, 와박사·노반박사 등이 파견되었음은 공예미술의 발달을 알 수 있다. 이렇듯 각 분야에 걸쳐 전문가들이 빈번하게 일본으로 건너갔다는 것은 고대 일본의 사원 건축과 불상 조각 등 모든 조형적인 미술 문화가 이들에 의하여 조성되고 지도되었던 사실을 알 수 있게 하며 이러한 상황은 삼국의 모든 예술이 직접적으로 일본에 옮겨져 큰 영향을 미치게 했음을 가리키는 것이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일본의 僧官制 성립에 있어 백제의 승려 관륵이 깊이 관여한 뒤 초대 僧正으로 취임하였고 初代 僧都에는 고구려 승려 德積이 취임하였으며 2대 승정에 고구려의 혜관스님이 취임하였는바 여기에 백제로부터 많은 불교문물의 기술자가 초빙되어 왔음은 우리의 불교문화가 그대로 일본에 심어졌음을 쉽게 알 수 있게 한다.

 우선 佛寺 건축에 있어서 伽藍배치를 살펴보면 大阪 四天王寺의 堂塔 배치가 백제의 一塔式 배치와 똑같다. 그것은 부여의 軍守里寺址에서 남쪽의 中門으로부터 木塔·金堂·講堂이 차례로 南·北 子午線上에 배치되고 그 주위를 廻廊으로 돌린 양식과 같다는 것이다. 즉 四天王寺도 2차대전후 복원된 현재의 모습이 자오선상에 남쪽으로부터 중문·불탑·금당·강당이 배치되고 그 주위를 회랑으로 돌리고 있다. 부여의 정림사도 같은 一塔一金堂의 배치로 불탑이 석탑인 점이 다를 뿐 역시 자오선상에 남쪽으로부터 중문·5층 석탑·금당·강당이 배치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일본 최초의 大伽藍인 飛鳥寺(法興寺)는 당시 세력가였던 蘇我씨의 願刹로 백제의 造寺工에 의하여 건축된 것인데 이 사찰의 배치는 불탑을 중심하여 東·西·北 세 방향에 金堂 1棟씩 배치하여 3금당의 가람양식을 보인다. 이러한 양식은 평양의 淸岩里寺址의 고구려 가람양식과 같은 것이다.837)朝鮮總督府,<平壤炭里癈寺址の調査>(≪昭和十三年度古蹟調査報告≫). 그리고 일본에서 가장 오래인 불탑인 奈良縣 법륭사 5층 목탑의 木造架構는 부여 錦城山의 天王寺址에서 출토된 금동탑재 양식과 흡사하여 그 연원을 백제에 두고 있음을 알 수 있게 한다. 한편 신라의 미륵신앙이 성덕태자 신앙으로 化成되었다는 신앙적인 측면에서 뿐만이 아니라 사탑의 건립에 있어서도 신라의 영향이 컸다는 것이다. 즉 국가불교의 실천이라는 목적으로 경영된 高麗大寺와 九層木塔을 모범으로 하여 만든 것이다.838)北野耕平,<日本에 있어서의 石造基壇의 成立과 初期의 新羅系要素>,≪韓日古代文化交涉硏究≫, 216∼217쪽. 이와 같이 불교가 전해진 후 일본에 있어서 불교사원의 표본이 되는 이들 중요 사원과 불탑 건립이 삼국의 寺工들에 의하여 이루어지고 또한 삼국의 가람배치와 그 건축 양식을 바탕으로 하여 이루어졌다는 것은 삼국의 불교문화가 직접적으로 크게 작용하였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불상 조각에 있어서≪일본서기≫흠명천황 13년조, 민달천황 8년조, 추고천황 26년조·31년조를 보면 백제와 신라가 불상을 보냈으며 백제가 造佛工을 파견하였다고 하므로 불상 조각에 있어 삼국의 영향을 짐작할 수 있는데 이러한 점은 실제 오늘날 남아있는 일본의 불상들을 보면 명백해 진다. 즉 법륭사 금당의 석가삼존불상은 鞍部島(止利)가 조성한 것이라 하는데 이 鞍部止利는 백제계 사람인 多須那의 아들이라고 하니 그는 백제의 조각가임을 알 수 있다.839)金錫亨,≪古代朝日關係史≫(勁草書房, 1969), 451∼452쪽. 그리고 현재 법륭사 보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百濟觀音像’은 그 명칭이 알려주는 바와 같이 백제인이 조성하였음을 알 수 있고 부여의 軍守里寺址에서 출토된 金銅菩薩立像은 법륭사 夢殿의 목조관음과 같은 계통이라 함에 주목된다.840)黃壽永,<百濟의 美術文化>(≪韓國思想≫9, 1968), 50쪽. 飛鳥寺의 금동대불은 높이 2.7m의 큰 작품으로 양쪽 눈 주위에는 아직도 鍍金의 흔적이 남아있다. 이 불상은 법륭사 석가삼존불상보다 17년이 앞서고 奈良市 東大寺의 大佛보다 150년이 앞서는 일본 最古의 金銅佛으로 606년에 역시 止利佛師가 조성하였다고 한다. 불상의 相好에서 양쪽 눈이 杏仁形이고 法衣가 두툼한 점 등은 이 불상에서 볼 수 있는 특징인 것이다. 이렇듯 행인형의 양쪽 눈과 두툼한 법의는 백제 불상의 특징의 하나로서 瑞山 磨崖三尊佛像이나 군수리 石造如來坐像 등에서 볼 수 있는데 이러한 모든 상황을 종합해 보면 이 대불의 조성은 우리 조상들에 의하였음을 쉽게 알 수 있다.

 長野市의≪善光寺緣起≫에 의하면 백제로부터 ‘請來佛三尊’이 모셔져 있어 일본 最古의 불상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오늘에까지 秘佛로 모셔져 있다. 다만 鎌倉시대의 模造像으로 금동삼존불이 알려져 있어 善光寺의 백제삼존불상의 형태를 짐작할 뿐이다. 선광사의 경우는 백제로부터 모셔온 불상이라 칭하지만 이밖에 神奈川縣 圓覺寺 金銅三尊佛像을 비롯하여 각 사찰의 삼존불상들은 三尊이라는 意匠과 그 양식이 한국의 영향인 것이다. 한국에 있어서 금동삼존불상은 삼국시대 각국에서 많이 조성되어 辛卯銘金銅三尊佛像, 癸未銘金銅三尊佛像, 皇龍寺丈六三尊佛像(현재는 燒失) 등을 꼽을 수 있는데 이들은 모두 6세기때 조성된 것으로 이러한 조형의 양식이 일본으로 건너가 7세기에 이르러 일본에서의 三尊佛 조성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石佛에 있어서도 奈良縣 櫻井市 忍坂(오쯔사카)의 石位寺 三尊石佛은 主尊佛을 중심으로 좌·우에 합장한 보살입상을 배치하고 있다.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주존불의 앉은 자세로 倚像인 점이다. 그런데 이러한 기상의 형태는 7세기 초반인 고신라시대(선덕여왕대로 추정함)에 조성한 慶州 三花嶺 三尊石佛의 本尊인 彌勒如來倚像에서 볼 수 있다. 이 본존에서 가장 큰 특징을 자세에서 볼 수 있는데 直立 또는 結跏跌坐形이 아니라 坐形이면서도 方座에 걸터앉아 양쪽 다리를 바로 내려 이른바 倚坐形을 보이고 있는 점이다. 일본의 석위사 삼존석불은 본존에서도 이러한 특징을 볼 수 있는데, 이 석불에 대해서는 일본 학자들 사이에 白鳳時代 혹은 奈良前期의 조성으로 추정하고 있다. 백봉시대나 奈良전기는 7세기 후반부터 8세기초에 걸치는 시대이기 때문에 우리 나라에서 많은 문물이 일본으로 전해진 이후여서 이미 고신라의 선덕여왕대에 조성된 경주 삼화령 삼존석불 본존상의 양식과 作風이 일본으로 전해져 석위사 삼본불상과 같은 불상이 만들어졌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후에도 한국에서는 石造倚像이 조성되어 충청북도 보은군의 法住寺 磨崖如來倚像과 같은 유례를 보이고 있는데 일본에서는 이러한 양식이 계승되지 않고 있어 기상이 그 당시의 영향으로 조성되었음을 분명히 해주고 있는 것이다.

 이밖에 일본에서 마애석불로 이름난 것은 頭塔藥師三尊石佛(奈良市 高畑町), 大谷寺 磨崖阿彌陀三尊佛像(栃木縣 宇都宮市 大谷町) 등으로 이들은 奈良시대 후기인 8세기 후반부터 平安시대 말기인 12세기 중반에 이르는 사이에 조성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한국에 있어서는 이보다도 훨씬 앞선 때에 마애삼존불이 조성되어 백제에서는 泰安 磨崖三尊佛像과 서산 마애삼존불상이 조성되었고 신라에서는 경주 남산의 삼화령 삼존석불 외에도 榮州 可興里 磨崖三尊佛像이 조성되었음을 볼 수 있으니, 이렇듯 한국에서의 마애불상 조성과 삼존불상의 양식이 일본에 전해져 일본에서도 삼존불상의 마애불 조성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오늘날 일본 국내에는 한국의 불상이 많이 전해져 있다. 전국의 국·공·사립 박물관과 미술관에 전해지고 있는 한국 불상을 비롯하여 개인이 소장하고 있는 불상들, 사찰과 神社 등에서 예배의 主尊佛로 봉안하고 잇는 불상 등 실로 그 수효는 상당하리라 생각된다. 아직까지 정확한 통계는 없으나 일본 학자들과의 대화에서 한국에 남아있는 금동불상보다 일본에 소장되어 있는 금동불상이 더 많을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고 어떤 학자는 1,000점은 넘으리라는 이야기를 하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1982년도에 奈良의 大和文華館에서 한국 불상 특별전을 개최하였으며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동경국립박물관이나 奈良국립박물관에서도 불교 미술전을 개최할 때는 반드시 한국의 각종 불상을 전시하여 한국인들의 눈길을 모으고 있다. 이렇듯 많은 한국 고대의 불상이 일본에 전해져 있다는 것은 일찍부터 한국으로부터 불상이 전해져서 일본의 고대불상 조각에 크나큰 영향을 주었음을 짐작케 하는 동시에 일본 기록에 보이듯이 불교 수용후 삼국으로부터 많은 불상을 일본으로 모셔갔다는 내용을 실증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한국 불상이 일본에 많다는 것은 對馬島에서 한국 불상을 조사한 수효만으로도 쉽게 알 수 있으니 1989년도까지 122점의 한국 불상이 조사된 사실이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841)鄭永鎬,<日本對馬島의 韓國金銅佛像硏究試論>(≪三佛金元龍敎授停年退任記念論叢 美術史學篇≫, 一志社, 1987).
―――,<日本對馬島의 韓國佛像新例>(≪歷史敎育論集≫13·14합집, 歷史敎育學會, 1990).
한국 불상이 일본으로 전해져 고대 일본 불상 조각의 모범이 되었음은 앞에서도 언급하였는바, 이러한 생각에서 일본의 국보 제1호로 지정 보존하고 있는 京都 廣隆寺의 木造半跏思惟像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이 불상에 대하여 田村圓登씨는≪日本史의 수수께끼와 발견≫에서 다음과 같이 풀이하고 있다.

四天王寺의 金堂에 안치되어 있는 半跏像은 聖德太子를 戀慕渴仰해서 만들어졌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 반가상은 難波吉士(나니와키시)의 私寺 시대부터 안치되어 온것 같다. 또한 太奏(우즈마사)의 廣隆寺의 本尊도 寶冠彌勒이라고 불리는 반가상이었다. 廣隆寺와 四天王寺, 즉 難波吉士씨의 절들은 다같이 新羅系 씨족의 소유 사찰이며 그리고 廐戶王(우마도노미코)와 긴밀한 관계에 있었던 사실을 지적했지만 어쨌든 간에 반가상은 聖德太子 신앙의 상징이었다. 반가상은 본래는 悉達太子像이었다.

 그런데 근년에 광륭사의 목조반가사유상이 고신라에서 조성하여 일본으로 보내졌다는 사실이 일본학자 毛利久씨에 의하여 다음과 같이 밝혀졌다.

飛鳥時代前期:이 시대에 신라로부터 일본에 수시로 불상이 전해졌는데 현존하는 것 중의 하나로 廣隆寺의 木造彌勒菩薩半跏像을 들고 싶다. 이 불상은 광륭사에 전해 내려오는 내력으로 미루어 推古天皇 31년(623)에 아마도 聖德太子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신라 궁실로부터 헌상되어진 것으로 생각된다. 양식상으로는 한국의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보살반가상을 닮은 고신라 독특의 수법으로 纖麗優美한 경향을 강하게 보이고 있다. 그런데 광륭사 불상이 만들어진 추고천황 31년은 法隆寺 釋迦三尊像을 止利씨가 조성한 연대이기도 하다. 兩 불상이 양식상으로 큰 차이를 보이고 있음은 명확한 사실이나 이러한 兩 불상이 거의 같은 시기에 並存했던 實例를 여기서도 볼 수 있는 것이다.842)毛利久,≪佛像東漸(朝鮮と日本の古代彫刻)≫(京都, 法藏館, 1983).

 한편 이 광륭사 목조반가사유상이 고신라의 조성물임을 고증한 논문은 毛利씨가 이미 1977년에 발표한바 있다.843)毛利久,<廣隆寺寶冠彌勒像と新羅樣式の流入>(≪白初洪淳昶博士還曆記念史學論叢≫, 1977). 모리씨는 여러 관계문헌 연구와 특히 조형 상 한국의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국보 제83호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을 비교 고찰하였는바, 실제 이 兩 반가사유상을 비교하면 각부 양식에 있어서 너무나도 같은 점이 많아 1975년도에 일본에서 열린 한국미술 5,000年展 전시회에서 양 불상을 兄弟佛이라고 까지 칭하기도 하였었다.

 이 양 불상이 같은 양식을 취하고 있음은 여러 부문에서 지적할 수 있으니 첫째, 寶冠 양식에서 매우 간소하여 이른바 三山冠을 이루고 있는 점이다. 둘째, 天衣에 있어서 上半裸身임이 또한 같은 점이다. 셋째, 台座가 圓形인 점과 그곳에 흘러내린 衣文의 표현이 보다 간략화되고 사실적이며 입체적으로 표현된 점이 너무나도 같다. 넷째, 상호의 細部와 三道, 그리고 兩手指의 표현 등에서도 같음을 볼 수 있고 상호에 나타난 미소도 똑같이 평화스러움을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비교 고찰은 필자뿐만 아니라 선학들도 이미 연구를 진행하고 있었던 바인데, 오히려 일본 학자에 의하여 이 광륭사 목조반가사유상이 고신라의 所作으로서 일본으로 모셔갔다는 論著가 먼저 발표되었으니 한국측으로서는 다시 언급한 필요조차 없게 되었던 것이다. 물론 당시 일본 학계에서는 이러한 주장에 대하여 저항과 물의가 있었으나 毛利씨의 치밀한 조사 연구에 따른 정확한 논리에는 이론이 있을 수 없었던 것이니 오늘의 일본 학계는 모리씨의 주장을 수용하여 정설로 통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

 다음으로 이와 같은 반가사유상이 일본으로 전해진 것 가운데 백제의 것으로 최근에 새로이 밝혀진 사례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對馬島 美津島町 久須保의 淨林寺 所藏 金銅半跏像인데 이 불상은 1984년 2월에 새로이 발견 조사된 것이다.844)鄭永鎬,<對馬島發見百濟金銅半跏像>(≪百濟硏究≫15, 忠南大 百濟硏究所, 1984).

둘째, 長野縣 北安曇郡 松川村의 觀松院 소장 金銅半跏像인데 이 불상은 오랫동안 秘佛로 모셔져 있어 공개되지 않다가 久野健씨(前 東京國立文化財硏究所 情報資料部長)에 의하여 조사 발표됨으로써 학계에 알려져 여러 학자의 주목을 받게된 것이다.845)久野 健,<中部地方の古代銅像>(≪美術硏究≫291, 東京國立文化財硏究所內 美術硏究所, 1974).

셋째, 松田光씨 소장 金銅半跏思惟像이다(神奈川縣 川崎市 麻生區 王禪寺 光ケ谷 거주). 이 불상은 오랜 동안 三重縣 一志郡의 積善寺에서 수장하고 있었던 것을 松田씨의 선친인 故 松田福一郞씨가 물려받았다고 한다. 이 불상에 대해서는 久野씨의 소개에 의하여 1987년과 1988년 두 차례 조사한 바 있어 그 출처를 자세하게 알 수 있었다.846)鄭永鎬,<日本松田光氏所藏金銅半跏思惟像-百濟金銅半跏思惟像 渡日의 一例->(≪蕉雨黃壽永博士古稀記念美術史學論叢≫, 1988).

 이밖에 일본에 전하는 고대의 한국 금동불은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이 많다. 神社나 사찰에 秘佛로 모시어 엄숙하게 간직되었던 불상이 근년에 조사되어 한국 조성의 금동불로 밝혀진 것 가운데 대표적인 것으로 宮城縣 船形山神社의 金銅菩薩立像, 新潟縣 關山神社의 金銅菩薩立像 등을 들수 있다. 久野씨가 그의 저서에서 한국으로부터의 渡來佛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소신을 밝힌바 있으니 이 兩 불상은 분명히 한국에서 조성된 불상인 것이다.

일본에 도래한 고조선의 불상에는 두 가지 경로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중 하나는 한국으로부터 北九州로 들어와 瀨戶內海를 통해 大和지방에 운반된 가장 일반적인 경로이고 또 다른 하나는 한국에서 일본해를 건너 조류를 타고 중부지방인 일본해 연안에 상륙한 경우이다. 오늘날 新潟縣 關山神社의 主尊佛로 되어있는 금동보살입상이나 長野縣 觀松院의 금동보살반가상 등은 후자의 例이며 장야현 善光寺의 本尊像 등은 전자의 예이다. 船形神社의 보살입상도 이 중의 어느 경로에 의하여 일본에 도래한 것이 아닐까 추정한다(≪渡來佛の旅≫, 日本經濟新聞社, 1981).

 이러한 구야씨의 주장은 현재 학계에서 통설화되어 있는데 한가지 아쉬운 것은 이들 보살상이 삼국시대에 조성된 것은 분명하나 삼국의 고구려·백제·신라 등 그 국적에 대하여 언급이 없는 점이다. 이 문제는 앞으로의 연구 과제로 남길 수밖에 없거니와 현재로는 이들 불상이 한국의 고대 불상이라는 점이 주목되며 이렇게 많은 삼국시대의 불상이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고대 불상 조각의 모범이 되었을 것임은 당연한 일로 생각된다. 이러한 상황은 대마도 정림사 백제 금동반가사유상의 경우 일본의≪善隣國寶記≫上卷을 보면<海外國記>의 내용을 소개하되 天智天皇 3년(664) 4월에 백제의 佐平 禰軍 등 백여 명이 대마도에 가서 많은 문물을 전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 이전부터 백제로부터 대마도에 간 것은 일본 본토를 가기 위하여 그 길목인 대마도에 수없이 들렸던 것이니 이러한 사실이≪일본서기≫에 수없이 보이며 추측도 충분히 가능한 것이다. 그러므로 백제의 금동불상이 대마도에 전해졌음은 당연한 일로 생각된다. 다른 불상들도 그 전수경로가 분명할 것인바 결국(요시노가리)은 모두 일본에 전달되어 일본 불상조각의 표본들이 되었으며 오늘날 각처의 主尊佛로 숭앙받고 있는 것이다.

 繪畵面에 있어서도 일본 회화의 원류는 삼국 회화에서 찾아야 할 것이며 삼국 회화의 영향은 곧 일본 회화 성립의 주역이었던 것이다.≪일본서기≫崇峻天皇 원년조(588)에 백제에서 畵工 白加가 파견된 사실이 보이고 추고천황 18년조(610)에는 3월에 고구려의 승려 曇徵이 五經을 비롯하여 彩色과 紙墨을 전해준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그러므로 일본에 있어서 회화 기술과 그림을 그리는 데 필요한 재료가 삼국으로부터 전수되었던 것이다. 삼국의 畵師들이 일본으로 건너가 많은 활동을 전개하였을 것인 바, 백제의 阿佐太子는 성덕태자의 모습을 그렸다고 하며 담징은 법륭사 금당의 벽화를 그렸다는 이야기가 항간에 전해지고 있다. 현재의 법륭사 금당 벽화는 근년에 새로이 그린 것이나 본래의 벽화는 담징의 그림으로 전한다는 것이다. 금당 벽화가 화재에 그슬리어 전체적으로 훼손되었는데 그 중에서도 몇 편이 수습되어 본래의 畵風을 짐작할 수 있다고 한다. 이 수습된 몇 조각의 그림에서 고구려의 화풍을 알 수 있어 고대 일본 회화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어 있다. 그리고 飛鳥時代 말기로 추정되는 中宮寺의≪天壽國曼茶羅繡帳≫의 畵本 집필자 중에는 고구려 사람인 加世溢의 이름이 나오고 있어 당시 고구려 화사의 활동을 짐작할 수 있다.847)末永雅雄·井上光貞 편,<大陸裝飾古墳との比較考察>(≪高松塚壁畵古墳≫, 1972), 67∼140쪽. 그리고 앞에서도 언급한 비조의 高松塚고분 벽화는 고구려 계통의 화가에 의하여 이루어 졌으니, 1972년 이 벽화의 발견 조사 당시부터 일본 학자들에 의하여 연구되어 이와 같은 결과가 학계에 알려졌던 것이다.

 공예면에 있어서는 공예의 부문이 범위가 넓어 모든 분야를 전부 살필 수 없으므로 불교 전수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불교적인 공예를 중심하고자 한다.≪일본서기≫崇峻天皇 원년조(588)에 백제에서 鑪盤博士 將德白昧淳과 瓦博士 麻奈文奴를 비롯하여 陽貴文, 小夌貴文, 昔麻帝彌 등이 파견된 사실이 보인다. 鑪盤은 露盤이라고도 하였으며 불탑에 있어서 相輪部의 基台를 말하는데 여기에 노반은 상륜 전체를 일컫는다. 당시 불탑의 상륜부란 불탑을 장식하는 부분으로서 박사는 鑄造 기술자 즉 鑪盤師인데 이때 백제에서 건너간 白昧淳은 당시 백제의 官位 16階 가운데 제7에 해당하여 대단한 기술자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불탑의 중요한 부분인 상륜부를 제작하기 위하여 백제로부터 능숙한 노반박사를 초빙하였을 것이다. 瓦博士는 造瓦師라하여 당시 寺院의 기와뿐만 아니라 궁전 등 중요한 건물의 지붕기와를 만드는 박사였는데 이렇듯 금속공예와 土陶공예의 기술관이 직접 일본으로 건너갔으니 당시의 일본 공예는 삼국의 기술자들에 의하여 이루어졌던 것이다. 비조사를 비롯하여 광륭사·법륭사·北野廢寺址 등에서는 백제의 막새기와와 똑같은 것이 나왔고, 때로는 고구려 계통의 막새기와가 함께 출토되기도 하여 삼국에 의한 기술 전수의 현장을 확인할 수도 있다.

 사찰에서 가장 성스러운 행사는 사월 초파일 석가탄신일의 灌佛 혹은 灌頂이다. 관불이란 부처님의 머리에 물을 정중히 적시는 작업으로 관정이라고도 하는데 이 행사는 본래 인도의 국왕 즉위나 태자를 책립할 때 행하여진 의식으로서 四大海의 물을 머리 위에 끼얹어 祝意를 표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관정을 행하는 방을 灌室이라 하며 관정을 위하여 특설된 도량을 ‘관정도량’이라 하는데 이러한 행사가 곧 석가탄신일에 그 탄생하신 모습에 향수를 정중히 뿌리는 관불의 행사가 된 것이다.

 한국에서도 일찍부터 관불의 행사가 있었으니 백제에서 일본으로 灌佛器를 전해준 사실이 일본측 기록에 보이고 있다. 즉≪元興寺伽籃緣起幷流記資材帳≫에 의하면 “… 治天下七年歲次 戊午十二月度來 百濟國聖明王時 太子像幷灌佛之器一具及說佛起書卷一篋度而言…”이라하여 灌佛器一具가 백제의 聖王때 일본에 건너간 사실을 밝히고 있다. 그런데 일본의≪佛敎語大辭典≫848)中村元,≪佛敎語大辭典≫(東京書籍株式會社, 1975)에 의하면 관불의 행사가 일본에서 최초로 행하여진 것이 추고천황 14년(606)에 원흥사에서 행해진 관불 의식이였다고 하였는데 혹시 당시에 사용하던 灌佛器가 성왕시에 백제에서 보낸 바로 그 관불기가 아니었던가 생각된다. 물론 백제의 성왕대와 일본의 추고천황대는 약 반세기 정도의 차이가 있으나 설사 백제로부터 전해진 바로 그 관불기를 사용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이 관불기를 모범으로 하여 만들어진 관불기를 사용하였을 것이니 결국 그 연원은 한국이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현재 한국에는 고대의 관불기가 전해지는 것이 없으며 최근에 고려시대의 조성으로 추정되는 金銅灌佛盤이 조사되어 학계에 보고되었을 뿐이다.849)鄭永鎬,<金銅佛器의 新例-高麗金銅灌佛盤의 推定->(崔永禧先生華甲紀念≪韓國史學論叢≫, 探究堂, 1987). 한국에 없는 문화재가 일본에는 많이 전해져 있다. 내용도 다채롭다. 그러나 그들의 연원은 모두 한국인 것이다.

 ‘삼국문화의 일본전파’를 생각할 때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滋賀縣 石搭寺의 삼층석탑이다. 석탑사는 옛 식의 석탑이 중심을 이루고 있으므로 붙여진 寺名인데 여기에는 백제식의 3층석탑이 건립되어 있으며 奈良의 般若寺十三重石塔, 平等院十三重石塔 등의 전형적인 일본식 석탑과는 전혀 다른 형태를 보이고 있다. 蒲生郡 蒲生町의 한적한 곳에 석탑사가 있으며 높직한 台地위에 3층석탑을 건립하였는데 이에 대하여≪日本の石塔≫에서는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850)若杉 慧,≪日本の石塔≫(東京, 木耳社, 1970)에서 일본 最古의 석탑이라고 初頭에 소개하고 있다.

안정감이 있어 大陸的인 감을 주는 탑이다. 天智天皇 8년(669)에 백제의 歸化人 7백여 인이 蒲生郡에 이주하였는데 이 탑은 그 사람들이 여기에 佛寺를 造營하고 母國의 양식에 의하여 건립한 것이다. 그러나 공양탑으로 세운 것이 아니고 伽藍經營의 塔으로 건립한 것이다. 奈良時代前期의 것으로 보인다. 이 탑은 聖德太子가 건립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寬弘 3년(1006)에 地中에서 古石塔 一基를 발견하였으니 寺刹은 이 古塔에 의하여 石塔寺라는 寺名이 붙게된 것이다. 이 탑은 俗傳에 阿育王所造 八萬四千塔中의 하나라고 전해져≪源平盛衰記≫에도 이미 이러한 기사가 있다.

 이 석탑은 一見하여 백제시대의 석탑임을 곧 알 수 있다. 넓직한 塔區를 마련하고 地台石위에 塔身部를 받고 있는데 각층의 광대한 屋蓋石이나 탑신석의 구성으로 보아 부여의 定林寺 五層石塔과 흡사함을 느낄 수 있다. 이러한 양식의 석탑은 일본에서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바 역시 백제인에 의하여 건립되었다고 하겠다.

<鄭永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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