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9권 통일신라
  • Ⅰ. 삼국통일
  • 1. 삼국통일 과정
  • 1) 7세기 신라의 내정변화

1) 7세기 신라의 내정변화

 7세기를 전후한 시기부터 新羅는 국내외의 정세변화로 말미암아 큰 시련을 겪게 되었다. 그것은 첫째, 내정에 있어서 眞平王이 眞智王을 폐위시키고 왕권을 장악하여 善德·眞德 두 여왕에게 계승되는 동안 진지왕의 아들 龍春과 그 아들 春秋로 이어지면서 왕권을 되찾기에 모든 노력을 다했을 것이다. 결국 김춘추가 太宗武烈王으로 나가기까지는 신라 지배층간에 상호 결속력이 약화되어 대외적 문제들을 적극 대처하지 못했을 것이라는 점이다. 둘째, 신라는 고구려·백제의 도발을 받아오던 중 특히 백제의 빈번한 침입으로 자국의 國土守護마저 불안하다는 위기의식이 고조되었던 상황이었다. 셋째, 과거의 역사적 사실로 보아 신라는 삼국간의 세력균형 속에서 존속·발전해 왔다. 4세기부터는 고구려와 親交하여 백제·가야세력을 견제해 왔고, 다시 고구려가 北守南進의 기세를 뚜렷이 보이자 신라는 백제와 羅濟共守同盟을 체결하여 訥祗王 17년(433)부터 진흥왕 14년(553)까지 120년간 고구려를 방어하고 자국의 발전을 거듭하였다. 그러나 백제가 聖王 7년(551) 고구려로부터 탈환한 漢江下流地域을 진흥왕 14년에는 신라가 백제로부터 탈취함으로써 나제동맹은 파기되고 삼국이 각각 대립항쟁의 국면으로 전환되었다. 바로 이 무렵 중국대륙에서는 2백여 년간 지속된 魏晉南北朝시대의 막을 내리고 6세기말부터 隋·唐이 통일제국을 이룩하면서 수·당중심의 국제질서로 재편성하려 했다.

 바로 이 같은 상황에 놓여 있던 신라는 내적 정권변동을 추진하면서도 정치적 안정이 요구되었고, 삼국간의 대립에서 국토를 팽창시켜, 자국의 발전을 도모하기 위해서는 가장 유력한 국제상황에 적응해야 했다. 이렇게 절박한 국가적 현실문제를 하나하나 최선의 방법으로 해결해 나가는 과정이 곧 신라의 삼국통일과정이었던 것이다.

 신라의 국가적 기반을 확립한 것은 眞興王代(540∼576)였으므로 통일기반도 이 시기에 마련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진흥왕에게는 銅輪과 舍輪(金輪)의 두 王子가 있었는데 太子로 책봉된 장자 동륜이 일찍 죽었기 때문에 차자인 사륜이 眞智王으로 즉위하였다. 그러나 진지왕 4년(579)에 왕위를 폐위시키고 동륜의 아들 白淨이 眞平王으로 즉위하였다.

 이런 사실로 보아 진흥왕 33년(572)에 동륜이 죽자, 정계는 왕위계승을 둘러싸고 그 지지세력이 사륜(진지왕)系와 백정(진평왕)系로 양분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정계가 양분된 이유는 각자의 정치권력상 이해관계가 작용했겠지만, 그들의 명분은 상이했을 것이다. 이 두 왕의 출자로 보아서 진지왕 지지파는 왕의 현실적 지배능력을 강조한 반면, 진평왕 지지세력은 王統의 원칙적 장자상속을 내세웠을 가능성이 높다. 또 두 세력의 핵심인물로서는 진지왕 원년에 上大等을 자임한 居柒夫를 중심으로 奈勿王系가 진지왕 추대의 핵심세력이라 믿어지고, 이에 반발하여 진평왕을 추대한 핵심인물은 진평왕 원년(579)에 상대등이 된 弩里夫였을 것이다. 거칠부는 진흥왕대≪國史≫편찬과 북방의 국토확장으로 유명하지만, 노리부는≪三國史記≫거칠부전에 보이는 8장군 중 奴夫이고<丹陽赤城碑>에 나타난 內禮夫와 동일 인물로 알려졌다.0001)李基白,<丹陽赤城碑 發見의 意義와 赤城碑 王敎事部分의 檢討>(≪史學志≫12, 檀國大, 1978), 28쪽. 따라서 이 두 사람은 함께 북방진출의 주역으로 활동했고 같은 喙部 출신이면서도 왕위계승 등 정치적 견해를 달리 해왔다고 보인다.

 결국 진지왕을 폐위시키고 진평왕을 즉위시키는 政爭의 와중에서 거칠부를 중심한 내물왕계가 몰락했을 것이다. 거칠부도 이후 기록에 보이지 않지만, 진평왕 9년에 내물왕 7대손 아찬 冬臺의 아들인 大世가 신라의 좁은 山谷을 한탄하며 吳越로 떠났다는 일화로 당시의 정정이 짐작된다. 또 진평왕 43년에는 唐으로 가버린 6頭品 出身 薛罽頭가 신라는 用人함에 있어 骨品을 논하여 그 族이 아니면 비록 鴻才傑功이 있다 하더라도 신분을 넘어설 수 없다고 불만을 토로하였다. 이는 골품제사회의 폐쇄성 위에 왕위계승을 둘러싼 정쟁이 타협에 의해서만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점도 고려될 문제이다.

 비록 진평왕이 쿠데타에 의해서 왕권을 장악했지만, 진지왕의 자손은 홀대할 수 없었던 듯하다. 진지왕의 아들 용춘(龍樹)과 그 아들 춘추가 진평·선덕·진덕왕대에 걸쳐 계속 중용되었고, 이런 정치적 활동을 기반으로 춘추의 王權 획득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진평왕대는 반대파인 진지왕 지지세력을 제거 혹은 흡수하면서 자파의 강화정책을 수행하였을 것이다. 行政機構의 신설과 확장만 보아도 位和府·調府·禮部·領客府·侍衛府를 설치하였다. 특히 진평왕 46년에 시위부를 설치했다는 것은 왕의 威儀와 신변보호라는 관점에서 주목된다.0002)≪三國遺事≫권 1, 紀異 2의 ‘桃花女 鼻荊郞’ 설화는 眞智王系에 대한 眞平王의 경계와 흡수라는 상징적 표현일 것이라는 면에서 주의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조치는 행정력의 강화인 동시에 和白會議라는 귀족집단의 발언권을 약화시키면서 왕권을 보호·강화하는 데 노력한 증거라고 할 수 있다.

 바로 이런 과정에 용춘이 활약하고 있었다. 즉 진평왕 7년에는 三宮(大宮·梁宮·沙梁宮)에 각각 私臣을 두어 관장케 했지만, 재위 44년에는 內省에 사신 1인을 두어 3궁을 兼掌케 하였는데, 그가 곧 이찬 용춘이었다. 내성은 왕실의 여러 업무를 담당한 宮內府와 같은 것으로서 왕성을 수호하는 시위부와 함께 왕의 신변과 王家를 보호하는 가장 중요한 기관의 하나였다.0003)≪三國史記≫권 4, 新羅本記 4, 진평왕 44년. 또 용춘은 진평왕의 둘째 공주 天明夫人과 결혼한 부마였으므로0004)李基東,<新羅 奈勿王系의 血緣意識>(≪新羅 骨品制와 花郞徒≫, 一潮閣, 1984), 83쪽. 진평왕과 밀착되어 왕실보호에 적격자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용춘은 처음부터 진평왕과 밀착했다기보다는 오히려 그 반대세력이었을 것이다. 만일 진평왕의 쿠데타가 없었다면 용춘은 父王인 진지왕을 계승하여 왕위에 오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용춘이 內省私臣에 오르고 부마가 되었다는 사실은 진평왕이 반대세력을 끌어들여, 왕권의 안정과 강화를 도모한 것으로 이해된다. 한편 진지왕의 지지세력이 도태되는 상황에서 용춘 또한 권력계에 살아남기 위해서도 자기의 현실적 불만을 잠재시키고 왕권과 결탁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진평왕 53년(631)에 伊湌 柒宿과 阿湌 石品의 謀叛事件이 발생했다. 이 사건의 성격은 씨족의 集團主義理念과 王子支配意識간의 갈등이라 하지만,0005)今西龍,<新羅骨品考>(≪新羅史硏究≫, 國書刊行會, 1960), 211쪽. 왕위계승문제를 중심한 왕권과 和白權의 대립으로 빚어진 산물이라 할 수 있다. 모반은 현체제에 대한 도전을 의미하며 그 시기가 진평왕말인 점을 고려하면 왕위계승문제로 모반했다 볼 수 있다. 결국 善德女王이 즉위한 것은 왕권의 승리이며 종래 진평왕 지지세력의 승리였다. 선덕여왕의 즉위는 聖骨의 男子가 없었기 때문이라 했는데, 이것은 용춘을 비롯한 眞骨貴族의 누구도 아직 확고한 지지기반을 갖고 있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여기서 의문시 되는 것은 眞骨王의 시초가 金春秋로부터 비롯되었다 했는데 왜 그가 진골이었느냐 하는 점이다. 이는 진지왕비의 父 起烏公이 葛文王 칭호가 없는 것으로 미루어 母系에 관계가 있으리라는 추측과,0006)池內宏,<新羅の骨品制と王統>(≪滿鮮史硏究≫上世 2, 吉川弘文館, 1960), 570쪽. 성골이 上代의 진골에 대한 후세의 追稱인 이상 奈勿王·眞智王도 진골이라는 견해가 있다.0007)李基東, 앞의 책, 88쪽에서 “眞智王에 대한 武烈王系의 始祖觀은 中代에 들어와서 비롯된 것은 아닐 것이고, 中古末의 어느 시기, 가령 眞興王의 直系인 銅輪 太子의 直系卑屬으로 구성된 小리니이즈集團이 排他的으로 나머지 王室親族集團의 구성원이 갖고 있는 眞骨보다도 한층 높은 신분으로서 聖骨을 주장했을 때 成立되었을 것이 아닌가 한다. 여기에 龍春을 眞骨인 것으로 생각한다면 그 시기는 善德女王의 卽位 以前이 아니면 안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성골이 언제 발생했는지 분명하지 않지만, 진지왕이 특별히 진골일 이유가 없다.0008)銅輪과 舍輪은 同腹兄弟라고 믿으며 사륜이 언제 결혼했는지 알 수 없으나 즉위 후 妃를 맞았다는 기록은 없다. 今西龍說을 믿는다면 그는 眞骨로 왕위에 오른 셈이므로 믿을 수 없다. 추측건대 진지왕을 폐위시키면서 그 자손을 진골로 강등시켜 일단 왕위계승권을 박탈했을 것이라 생각되며 이것이 진평왕으로 하여금 안심하고 용춘을 등용할 수 있는 유리한 조건이 되지 않았겠나 믿어진다.

 다시 용춘은 진평왕 51년에 大將軍으로서 金舒玄·金庾信 등과 고구려 娘臂城을 정복하였다. 또 선덕여왕 4년(636)에는 아찬 水品과 각 州縣을 순회하여 민심을 안정시켰고, 선덕여왕 12년에는 왕실과 국가적 사업이라 할 皇龍寺九層塔의 창건을 감독하였다. 이런 그의 역할은 일견 용춘에 대한 왕의 신뢰를 뜻하는 듯하지만, 핵심적 정치권력계에서는 소외된 부분에 종사하여 결정된 정책을 실천하는 위치였다고 판단된다. 여기서 용춘과 서현이 동일한 戰場에 참가하여 두 家門이 더욱 가까워질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된 것이고, 이는 양 가문이 戰功에 의한 공동이익을 추구하는 同病相憐의 처지가 투합되었을 것이다.

 김유신 가문은 法興王 19년(532)에 투항한 金官國主 金仇亥(仇衡)가 本國(金官國)을 食邑으로 받고 沙梁部에 정착하였다. 이후 그 아들 武力은 국토확장사업에 참여하여 진흥왕 14년(553)에 新州軍主가 된 것으로 보아 戰功이 컸다고 믿어진다. 군주는 단순한 外職이 아니라 兵部令·上大等에 버금가는 것으로서 중앙의 제일급 인물이 받을 수 있는 관직이었음을 고려하면,0009)申瀅植,<金庾信家門의 成立과 活動>(≪韓國古代史의 新硏究≫, 一潮閣, 1984), 246쪽. 중앙귀족사회에서 중요한 위치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유신 가문은 외래 투항인으로서 그 한계성이 있었다. 이는 그들의 결혼설화에서 엿보인다. 김무력의 아들 김서현은 肅訖宗(법흥왕의 동생 立宗 葛文王의 아들)의 딸 萬明과의 결혼이 野合에 의해 성취되었는데 이때 숙흘종이 딸 만명을 別第에 가두어 그들의 결혼을 반대했던 것이다. 이는 서현이 왕족과 혼인할 만큼 확고한 정치적 지위를 확보하지 못한 증거이다.0010)申瀅植, 위의 책, 249쪽. 또 김유신의 여동생 文姬(文明夫人)와 김춘추의 결혼 이야기는 김유신의 政略같은 설화로 느껴진다.0011)≪三國遺事≫권 1, 紀異 2, 太宗金春秋公條에서 善德女王 때라 했다.

 이와 같은 한계 속에서 김춘추 가문이 용춘·춘추의 父子에 걸쳐 왕실과 밀착하며 일정한 정치적 위치를 확보하는 동안, 김유신 가문 또한 구형·무력·서현·유신의 4代를 거치면서 신라의 발전과 왕실의 안정에 지대한 일익을 담당하였다. 더욱 중요한 것은 이 양가가 한층 결속해갔다는 점이다.

 선덕여왕 16년(647)에 毗曇·廉宗의 반란이 일어났다. 비담은 “여왕이 정치를 잘하지 못한다”는 이유를 들어 擧兵했지만, 결국 실패하여 비담 등 30여 인이 죽음을 당했다. 이 난을 진압하는 과정은≪三國史記≫金庾信傳(上)에 상세히 전한다. 비담의 군대는 明活山城에 포진하고 김유신이 지휘하는 王軍은 月城에 포진하여 10여 일 동안 공방전을 벌인 끝에 비담을 죽이고 그 九族까지 처형했다는 것이다. 이때는 선덕여왕말 진덕여왕초이고 처음 비담군이 여왕을 폐위시키려 했으나 “왕이 스스로 방어했다”는 것이다. 비담의 난이 일어난 선덕여왕 16년(647) 전후는 신라가 일대 위기에 봉착했던 시기였다. 즉, 선덕여왕 11년에는 백제에게 大耶城 등 40여 성을 빼앗겨 김춘추가 고구려에 청병외교를 갔었으나 실패하였다. 이때 김유신이 군대를 거느리고 고구려 접경에 가서 김춘추를 돌려보내라고 시위한 것도 양자의 관계를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될 것이다. 다시 진덕여왕 원년(647)에는 김춘추의 對唐外交로 羅唐軍事同盟이라는 획기적 성과를 얻었으나 이 동맹이 백제를 제압하는 데 직접 효과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선덕여왕 14년에는 唐의 고구려 침공을 도와 신라에서도 3만 군을 동원해서 고구려 南境을 공격함으로써 준군사동맹의 체제로 들어갔지만 이 틈에 백제에게 國西 7城을 빼앗겼던 것이다.

 문제된 비담의 반란 명분은 선덕여왕 12년에 당으로 파견된 신라사신에게 당 太宗이 말한 것과 일치하므로 주목된다.0012)≪三國史記≫권 5, 新羅本紀 5, 선덕여왕 12년. 태종의 발언은 신라의 독자성을 무시한 모욕적 언사였지만 비담 등은 현재의 왕실을 척결하기 위하여 이를 이용했을 것이다. 이런 면에서 비담의 난은 당의 책동에 자극받아 일어난 신라 내부의 국론분열상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즉 또다시 여왕의 즉위를 반대하는 세력과 王黨派 사이의 대립으로 표출된 것이다.

 비담의 난에 대한 견해는 첫째, 이 난을 일으킨 편은 실제 상대등 비담이 아니라 퇴위를 강요받은 善德女王측이라는 주장으로서, 곧 왕당파의 친위쿠데타라는 것이다.0013)井上秀雄,<新羅政治制度の變遷過程>(≪新羅史基礎硏究≫, 東出版社, 1974), 441쪽. 둘째, 정당한 왕위계승자가 없을 경우 왕위에 대한 결정은 和白의 의결사항이며 그 첫 대상은 상대등이므로 이 난은 상대등 비담이 왕위쟁탈을 목적으로 일으켰고 추대될 사람도 바로 비담이라는 주장이다.0014)李基白,<上大等考>(≪新羅政治社會史硏究≫, 一潮閣, 1974), 100∼101쪽. 셋째, 김춘추·김유신 등 新興勢力과 비담 등 舊貴族勢力간의 쟁패전이었으며, 선덕여왕 개인을 반대한 것이 아니라, 권력의 핵에서 밀려난 原銅輪系의 反眞智王系 運動이라는 견해이다.0015)申瀅植,<武烈王系의 成立과 活動>(앞의 책), 116쪽. 선덕여왕이 비담의 난중에 죽은 점으로 보아, 왕이 병석에서 일어나지 못할 줄을 알고 왕위계승을 의논하던 중, 비담 등은 진덕여왕의 옹립을 반대했고, 김춘추·김유신과 이들과 제휴한 閼川 등은 진덕여왕의 옹립을 적극 주장하였을 것이다. 여기에 여의치 않았던 비담이 직접 왕위획득을 목적으로 난을 일으켰다고 생각된다.

 그런데 이 비담의 난 결과, 진덕여왕을 옹립한 왕당파가 승리함으로써 신흥세력인 김춘추·김유신 등이 정치적 실권을 장악하고 나아가 김춘추의 태종무열왕권을 창출시킬 수 있는 결정적 계기가 된 듯하다. 따라서 진덕여왕 5년(651)에 설치한 執事部는 이런 정치세력의 변동과 그 맥락을 같이했다고 생각된다. 집사부의 기능이 王命의 시행과 일반 행정관부의 통제였다면, 화백회의 및 상대등으로 대표되는 귀족세력을 통제하려는 전제왕권의 필요에 의한 설치라고 보기 때문이다.0016)李基白,<新羅 執事部의 成立>(앞의 책), 151∼153쪽. 그렇다면 왕권전제화를 표방하면서 실은 김춘추·김유신 등이 실권장악을 위한 조치였다고도 할 수 있다. 이들 신흥세력이 확고한 권력기반을 형성했다지만 김춘추가 귀족사회를 대표하는 제1인자는 아니었다. 진덕여왕이 즉위하자 상대등에 오른 이찬 알천이 그 대표적 존재였다. 당시 다른 귀족이 김유신의 위엄에 복종하였지만, 알천이 席首의 위치에 있었다는 것은 당시 상황을 잘 전해준다.0017)李基白,<大等考>(위의 책), 80쪽. 결국 구귀족에 속하면서 신흥세력에 가까운 알천이 신·구세력의 중재에 적격자였을 것이다.

 진덕여왕이 죽자 김춘추가 태종무열왕으로 즉위하였는데(654) 그 과정은 결코 순탄하지 않았다. 처음 群臣은 알천을 왕위계승자로 추대했으나, 그가 김춘추에게 사양했다는 것이다. 이는 여러 귀족의 결의를 무시하고 김춘추의 合法性과 正統性을 확보하려는 수단에 불과했다고 믿어진다.

 요컨대 무열왕권은 신라 내부의 장기간에 걸쳐 전개된 政爭을 통하여 획득된 것이었다. 이것은 王室이 성골에서 진골로 전환된 시초였지만, 이런 갈등과정으로 인해 對麗濟抗爭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대내적 갈등으로 대외항쟁에 국력을 결집하지 못하여 신라는 장기간 守勢에 놓여 있었다고 판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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