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9권 통일신라
  • Ⅰ. 삼국통일
  • 1. 삼국통일 과정
  • 3) 백제의 패망과 부흥운동
  • (3) 새로운 나제관계

(3) 새로운 나제관계

 처음부터 나당관계는 불평등해서 신라가 당의「번신」임이 강조되더니, 백제정벌에는 태종무열왕을 嵎夷道行軍摠管으로 임명하여 신라왕이 당군의 일개 지휘군인 것처럼 당이 일방적으로 처우했다. 다시 백제국 부흥군을 진압하던 마지막 단계인 문무왕 3년(663) 4월에는 신라국을「鷄林都督府」로, 신라왕을「鷄林州大都督」으로 당 황제가 임명했다. 백제 故地에 熊津都督府를 두었으므로 신라는 패망한 백제와 하향식 평준화가 이루어진 것이다. 이것이 아무리 형식적이었다 하더라도 신라국은 당이 통치하는 일개 지방으로 편속된 것이며, 왕도 일개 지방장관으로 전락된 것이었다. 이런 조처는 당의 강압적 覇權主義 산물이었고 신라가 바라는 바는 아니었다. 따라서 만약 백제지역에서 그 부흥군을 진압키 위해 당병이 있었다면 진압한 뒤에는 당병의 철수와 동시에 백제 전역에 대한 통치권을 신라에게 양도해야 마땅했다. 왜냐하면 그것은 領土分割約定에 명시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백제국 부흥군을 거의 진압할 무렵인 문무왕 3년부터 당의 백제지배정책은 더욱 구체화되었다. 그 해 손인사가 別帥로 대동한 杜爽(杜大夫)과 부여융이 있는 바, 나당군이 주류성을 함락하고 임존성은 공파하지 못한 시점에 두상은 백제국 부흥군을 평정한 뒤 웅진도독부와 신라가 和親할 것을 요구했다. 신라에서는 아직 백제를 평정하지 못했고 또 백제는 간사하고 反覆이 심하여 이제 會盟하더라도 後患이 두렵다는 이유로 停盟을 요청했다.0057)위와 같음. 그런데 부여융을 웅진도독으로 삼아 백제유민을 무마케 하며 임존성을 공파한 뒤 신라에게 화친을 강요했다. 이미 유인궤는 무열왕 7년(660)말경 고구려를 멸하려면 먼저 백제를 주멸하여 留兵鎭守하여 백제를 心腹시켜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지만 이제 당의 계획된 海東支配政策의 일환으로 구현되었다.

 문무왕 4년 2월, 角干 김인문과 이찬 천존이 唐使 유인원, 웅진도독 부여융과 더불어 일차 회맹을 가졌는데, 이는 본격적 誓盟을 하기 위한 예비회담으로 여겨진다. 그리하여 문무왕 5년 8월 就利山(公州 鷰尾山)에서 문무왕과 부여융 사이에 화친할 것을 서맹하였다. 이때 盟文은 유인궤가 짓고 유인원이 서맹을 권유하였다. 그 맹문의 내용은 나제 양국이 형제처럼 結好和親하겠다는 것이며, 이것을「金書鐵券」으로 제작하여 각각 宗廟에 두고 자손만대까지 이를 犯하지 말라는 것이었다.0058)≪三國史記≫권 6, 新羅本紀 6, 문무왕 5년.
≪舊唐書≫권 199上, 列傳 149上, 東夷 百濟.
이미 나당에 의하여 패망된 백제가 신라와 대등한 국가로 부상되었다면 이는 엄청난 모순이었다. 더욱이 부여융은 앞잡이에 불과했고 파견된 당의 관리와 당병이 실권을 가졌을 것은 분명하다. 따라서 당이 신라에 대해 패권적 우위성을 과시한 이상, 웅진도독부가 계림도독부인 신라와 평등하더라도 오히려 웅진이 우월한 위치에 설 가능성을 내포했고, 회맹에서 보는 것처럼 당의 파견관리는 신라에 강압과 간섭을 했던 것이라 추측된다. 그러나 신라는 아직 고구려를 패망시키지 못한 상황에서 이러한 당의 처사에 불만과 적개심을 가졌더라도 노골적 반발은 보일 수 없는 처지였던 것 같다.

 그러면 문무왕 5년 서맹 당시 당이 지배한 百濟故地의 범위는 대강 어느 정도였을까.≪三國史記≫地理志 末尾에 기록된 “都督府一 十三縣” 이하는 1도독부 7주 51현이며 이것은 대충 충청남도 南半 및 全羅南·北道 전체에 해당하고 백제 패망 당시의 영역에 버금간다는 것이다.0059)池內宏,<百濟滅亡後の動亂及び唐·羅·日三國の關係>(앞의 책), 178∼185쪽. 이렇게 볼 때 신라가 백제국 부흥군 진압과정에서 일부 백제 토지와 유민을 흡수했다고 하더라도 기본적으로 백제영역은 당이 지배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그 지배영역에 대한 나당간의 분쟁이 야기되었음을 볼 수 있다. 즉 문무왕 8년(668)의 사실로서 신라는 會盟處에서 백제가 ‘移封易標’한다면서 境界에 대한 분쟁을 토로하고 토지와 노비를 침탈하여 신라 백성을 유인해서 내지에 숨겼다고 강조했다. 이것은 신라의 거짓이라고 보기도 하였으나, 다시 나제가 양립되고 웅진의 당 관리가 우위에 있던 당시는 가능했다고 믿는다.

 한편 당이 신라를 정벌하리라는 소문과 아울러 新羅內에는 “신라의 兵器를 盜取하여 1州의 땅을 습격하려는” 漢城都督 朴都儒와 같은 親熊津分子가 생겨나서 실로 어지러운 삼각관계를 볼 수 있다. 문무왕 10년 6월의 나제 사이의 인질교환 문제가 이루어지지 않은 것도 상호불신이 얼마나 컸던가를 알 수 있다. 그 해 7월, 나제간의 境界劃定문제가 다시 대두되었는데, 이 때 신라의 입장을 다음과 같이 밝히었다.

入朝使 金欽純(欽春) 등이 돌아와 장차 境界를 획정하려 할새 地圖에 의하여 披檢하면 百濟舊地를 통히 割還케 하라는 것이었다. … 3·4년간에 한번 주고 한번 뺏으니 신라의 백성은 모두 本望을 잃고 (아래와 같이) 말한다. “나제는 累代의 원수인데 지금 백제의 정형을 보면 따로 一國을 자립할 모양이니 百年 후에는 (新羅의) 자손이 반드시 呑滅될 것이다. 신라가 이미 國家(唐)의 州郡이 되어 양국으로 나눌 수 없는 관계이니 원컨대 一家되어 후환이 없도록 해달라” 하였다. 去年 9월에 이 사실을 具錄하여 使臣을 보내어 奏聞케 하였으나 漂流되어 도로 오게 되었고 또 다시 사신을 보냈으나 역시 도달치 못하였다. … 百濟가 (없는 사실을) 꾸미어 唐에 말하되 新羅가 배반한다 하였다(≪三國史記≫권 7, 新羅本紀 7, 문무왕 11년).

 이것은 문무왕이 薛仁貴에게 答한 일부로서, 백제가 당을 배경으로 신라를 참소·위협해서 신라가 분노를 토로했던 것인데, 당이 신라측에 전부 반환하라 한 백제 옛 지역은 地圖에 의한 무열왕 7년(660) 이전의 백제영토를 의미하는 것이다. 아마도 이것은 신라군이 백제국 부흥군을 진압하고「官守」한 그 지역을 반환하라는 것이며, 신라는 이를 거부하는 입장으로 보면 신라가 일부 영토를 점령하고 있었던 것이 사실일 것이다. 이와 같은 백제의 영토와 유민문제가 정확히 언제부터 제기되었는지 분명치 않으나 기록에는 문무왕 9년에 “또 欽純 角干과 良圖 波珍湌을 당에 보내어 사죄하였다”고 했으므로 이전에도 같은 문제로 遣使했음을 알 수 있다.

高宗은 欽純의 還國을 허락하였다. 良圖는 留囚하여 끝내 圓獄에서 죽었다. 왕이 백제토지와 유민을 擅取하므로 皇帝가 責怒하여 재차 使者를 유수했던 것이다(≪三國史記≫권 6, 新羅本紀 6, 문무왕 10년).

라고 하였다. 문무왕 9년(669)부터 나타나는 謝罪使는 첫째가 일부 백제의 영토와 유민을 신라가 取한데 대한 당의 힐책 때문임을 위의 예에서 알 수 있다. 둘째는 나·당전쟁을 지속하면서 당에 대한 신라의 무마책으로서의 사죄사였다. 여기는 첫째 조건에만 해당하는 것으로, 나제 사이의 경계획정 문제는 문무왕 5년 회맹 전후부터 대두되었으며 이런 강역문제는 상호간에 좀더 확장된 영토지배를 위한 분쟁이라 하겠다. 이런 면에서 신라는 방금의 나·제관계에서 “이미 국가(당)의 州郡이 되어(되었을 망정) 양국으로 나눌 수 없는 관계이니 원컨대 一家되어 후환이 없도록 해달라”고 역설적으로 불만을 제기하였던 것이다. 한편 이것은 주체적 신라 입장에서 간절히 소망한 삼국의 통합논리이기도 했다. 이렇게 간절한 소망을 성취하기 위하여 신라국을 대신한 사신인 金良圖는 당의 옥중에서 殉職해야 했다.

 요컨대 무열왕 7년부터 신라가 백제국 부흥군을 진압하여 일부지역을 관수에 의해 지배하였고 유민도 항복과 노획으로 흡수했으나, 문무왕 5년 회맹과 境界劃定 이후부터는 나당 사이에 지배 영역에 대한 분규가 격화되어 문무왕 10년경에는 더욱 이것이 심화되었다. 바로 이런 부차적 분규는 고구려를 패망시키면서 신라의 근본적 불만을 자극하여 당에의 정면적 대결로 신라는 응분의 대가를 찾겠다고 일어서게 되었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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