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9권 통일신라
  • Ⅰ. 삼국통일
  • 1. 삼국통일 과정
  • 4) 고구려의 패망과 부흥운동
  • (1) 고구려의 패망

(1) 고구려의 패망

 고구려는 對隋戰爭을 잘 극복하여 오히려 수를 멸망으로 몰아넣었지만, 이어 일어난 당과의 대결에서는 고구려가 패망하였다. 고구려가 嬰陽王 9년(598) 수의 요서지방을 선제공격한 이후 강한 독자성을 표방하며 수와의 정면대결까지 불사한 태도는 당과도 대립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치달아 당과의 전쟁이 불가피했던 것이다.

 이러한 고구려의 수·당과의 전쟁과정은 이미 소상히 밝혔으므로0060)≪한국사≫5(국사편찬위원회, 1996), 109∼138쪽 참조. 여기서는 당이 고구려를 패망시키는 과정에서 신라가 당의 군사동맹국으로서 어떠한 역할을 하였는가 하는 점을 중점적으로 살피겠다. 이러한 이유는 특히 신라의 입장에서 자국의 이해관계가 직결되어 나·당동맹이 와해될 수밖에 없고 신라의 대당전쟁이 불가피한 또 하나의 원인이었기 때문이다.

 당이 성립된 武德 원년(618)부터 高祖를 지나 太宗 18년(644)까지 27년 동안 당은 고구려에 대하여 표면상 평화정책을 구사하면서 道敎傳播를 통한 문화적 覊縻政策으로 고구려의 복속을 기대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에 고구려도 이런 당의 대고구려 정책을 어느 정도 수용하면서 화평을 지속하려고 했던 듯하다. 그것은 당이 전한 도교를 淵蓋蘇文도 적극 수용하여 자기의 獨裁權力을 유지하는데 사상적 무기로 사용하려 했다는 一說이 있는 까닭이다.0061)李乃沃,<淵蓋蘇文의 執權과 道敎>(≪歷史學報≫99·100합집, 1982) 참조.

 그러나 唐朝에서는 이미 고조 초기부터 고구려가 抗禮하면 四夷를 복속시킬 수 없다는 데 합의함으로써0062)≪舊唐書≫권 61, 列傳 11, 溫大雅·彦博. 당의 패권주의에 의하여 당 중심의 국제질서를 재편성해 가려고 하였다. 이런 면에서 수의 정책을 그대로 계승한 것이었다.0063)≪舊唐書≫권 63, 列傳 13, 裴矩.
≪三國史記≫권 20, 高句麗本紀 8, 영양왕 18년.
따라서 당의 입장에서 고구려가 스스로 굴복하여 복속해 오지 않으면 강제로 굴복시켜야 했고, 그것이 회유에 의한 부드러운 방법으로 불가능한 경우 戰爭이라는 극단적 방법을 동원할 수밖에 없는 카드가 마련되어 있었다. 그런데 “고구려는 수에 稱臣하다가 끝내 隋 煬帝를 拒逆”했으므로0064)≪舊唐書≫권 199上, 列傳 149上, 東夷 高麗 武德 7년. 사실상 전쟁의 카드만이 있을 뿐이었다. 이런 까닭에 武德 9년(626)에 당이 朱子奢를 내세워 三國의 화평을 仲裁하면서 번신인 신라를 두둔하는 입장이었고, 貞觀 15년(641)의 唐使 職方郞中 陳大德이 고구려의 지형과 내정을 살피어 전략에 이용하려 했던 것이다.

 이에 대하여 고구려에서는 수대의 포로교환(榮留王 5년, 622), 죽은 병사의 해골 매장, 수에 대한 戰勝塔인 京觀을 헐어버리는(영류왕 14년) 등 당의 요구에 부응하였고 당이 전파하는 도교의 적극적 수용을 통해서도 전쟁만은 피하여 당과 화평을 유지하고자 하였다. 특히 정관 14년에는 世子 桓權을 入唐시켰고 寶臧王 3년(644) 연개소문이 당에 白金을 보내는 한편 숙위 50명을 보내겠다는 마지막 카드를 던졌으나 거절되었다. 이런 한편 고구려는 천리장성을 부여성에서 卑沙城까지 축조함으로써(영류왕 4년) 국방력을 강화하였다.

 이상에서 보면 고구려의 외교적 강경책이 대당전쟁을 초래한 것만은 아니었다. 고구려는 그 독자성이 침해되지 않는 범위내에서 당의 화평을 가장한 문화적 기미정책에 부응·굴종하면서까지 오히려 양국간의 전쟁을 피하고자 외교적 타결을 다했다고 보인다. 당은 연개소문의 쿠데타로 영류왕을 죽이고 국정을 오로지 한다는 이유를 내세워 고구려 침공을 서둘렀다. 또 여기는 신라의 入唐路를 차단한다는 이유도 있으나 고구려의 내란을 틈탄 당의 침공이라 할 수 있다. 한편 고구려는 그 독자성을 유지하고 연개소문은 자기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도 弑君을 강조하는 당에게 대립·항전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당의 도전에 고구려의 응전은 너무나 불가피했다.

 당의 고구려 침공은 초기(645∼646)·중기(647∼666)·말기(667∼668)의 3기로 구분할 수 있다. 貞觀 19년(보장왕 4년, 645) 2월부터 당 태종이 수륙 15만 이상의 대병력을 거느리고 요동을 침공하였다. 그리하여 요동지방의 城 대부분이 함락되고 고구려 원병 15만을 거느린 高延壽·高惠眞도 패배하여 많은 병력과 군량·병기 등 막대한 손실을 입었으나 오직 新城과 楊(梁)萬春이 城主였다는 安市城에서 끝까지 당병을 방어하였다. 9월에 접어들면서 遼左는 寒氣가 닥치고 軍糧이 다하여 당 태종은 소득없이 退歸하였다. 한편 당은 신라·백제에도 출병을 요청하였지만, 백제는 출병하지 않았고, 신라만은 3만의 병력을 동원하여 고구려 남쪽 水谷城을 공격하였다. 이것으로써 신라는 당의 번신이며 동맹국임을 분명히 표시하였다.

 이 정관 19년의 실패로 당은 정관 21년부터 高句麗征伐 長期戰略으로 선회하였다. 즉 자주 小部隊를 보내어 교대로 요동지방을 侵擾해서 피곤케 하면 요동이 황폐화하고 인심이 고구려로부터 떠나서 鴨綠江 이북은 싸우지 않고도 취할 수 있다고 결론짓고 이를 결행하였다.0065)≪三國史記≫권 22, 高句麗本紀 10, 보장왕 6년. 그리하여 정관 19년부터 乾封 원년(보장왕 25년, 666)까지는 쉴 새 없이 요동을 침입했고 이것이 관례처럼 되어 고구려는 방어에 치중하였다.

 바로 당의 이 장기전략의 틈바구니에서 신라는 眞德女王 2년(648) 나당군사동맹을 더욱 확실히 체결하고 당에 백제의 선공을 제의하여 무열왕 3년(656)경에 합의됨으로써 나당연합군에 의한 백제멸망이 가능했다. 이렇게 되자 신라는 더욱 많은 부담을 안아야 했다. 이미 앞에서 말한 것처럼, 백제국 부흥운동을 진압하고 실체도 없는 백제와 형제같이 화친할 것을 웅진도독과 회맹해야 하였다. 이런 한편 4년간을 留鎭唐兵 1만 명의 식량·의복까지 제공해야 했다. 문무왕 원년(661) 6월에는 당에 숙위하고 있던 金仁問·儒敦이 귀국하여, 이미 35軍을 동원해서 당이 고구려를 침공하고 있었는데, 이에 ‘擧兵相應’할 것을 요청했다. 이때 신라는 김유신 등 9장군으로 편성된 대병력을 왕이 직접 거느리고 북진하다가 甕山城·雨述城의 백제국 부흥군을 진압한 것으로 끝맺었다. 여기에 다시 신라는 군량을 수송하라는 당의 요청을 받았다. 이에 문무왕 2년(662) 정월 김유신·김인문·김양도 등 9장군이 수레 2천여 량에 쌀 4천 석·벼 2만 2천 석을 싣고 平壤 근처에 가서 소정방에게 전하였다. 특별히 소정방 개인에게는 銀 5천 7백 分과 細布 30疋·頭髮 30兩·牛黃 19량을 증여하였다. 人馬가 凍死하는 추위 속에 고구려군과 싸우면서 왕복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당시 김양도는 군사 800명을 거느리고 海上으로 돌아왔다는 기록으로 보아 신라의 水陸軍이 나란히 북상했을 것으로 보인다.0066)≪三國史記≫6, 新羅本紀 6, 문무왕 2년조와 권 42, 列傳 2, 金庾信 中은 大同小異하다. 김유신전에는 문무왕 원년 12월 10일에 출발한 것으로 되어 있다. 新羅本紀에는 문무왕 2년 정월 출발→정월 18일 風樹村→정월 23일 七重河(臨津江)→䔉壤→梨峴→2월 1일 獐塞(黃海道 遂安)→2월 6일 楊隩에서 군량과 선물을 보낸 것으로 나온다.

 그런데 신라 문무왕 4년 7월에는 김인문·품일 등이 一善·漢山州兵을 거느리고 웅진의 당병과 더불어 고구려 突沙城을 攻滅하였다는 것이다. 이 해에는 당의 고구려 침공도 없었으므로 상응했다고 할 수 없다. 따라서 이 해 2월에 신라와 부여가 회맹하면서 다시 고구려 南京을 공격하여 고구려의 수비체제를 교란시키려는 나당의 책략이 아니었나 추측된다. 더욱 궁금한 것은 이 돌사성을 나당의 어느 쪽에서 留守했는지 알 수 없지만 신라에서 官守했을 것이다. 이후 문무왕 6년 2월에는 입당하여 숙위하고 있던 天存의 아들 漢林과 庾信의 아들 三光을 통하여 고구려정벌을 위해 청병했다는 것이다. 이에는 12월에 투항한 淵淨土를 통해서 莫離支 연개소문이 죽었다는 소식을 알았겠지만, 그 이전인 문무왕 5년말에 이미 그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고구려정벌을 요청한 것이 아닐까 본다.0067)≪三國史記≫·≪新·舊唐書≫·≪資治通鑑≫은 연개소문의 卒年이 666년으로 되어 있으나, 男生의 墓誌를 통하여 665년이 타당하다고 하였다(李丙燾,≪譯註三國史記≫, 341쪽).

 당에서는 乾封 원년(666)년 6월에 男生의 망명에 따라 급히 龐同善·高侃 등을 보내어 요동을 침공하였고, 그 이듬해 7월에는 당 고종의 칙령으로 知鏡(문무왕의 5弟)·愷元(문무왕의 6제)을 장군으로 삼아 요동의 전쟁에 참여케 하였다. 또 유인원·김인태軍은 卑列道로 진군케 했고 신라의 병력은 多谷·海谷의 二道를 따라 평양으로 모이게 하였다.0068)池內宏,<唐の高宗の高句麗討滅の役と卑列道·多谷道の稱>(앞의 책), 262∼263쪽에서 三道의 추정은 다음과 같다.
①卑列道(安邊):德源-阿虎飛嶺-陽德-成川-江東-平壤
②多谷道(大谷道):開城-平山(大谷城)-瑞興-黃州-平壤
③海谷道(水谷道):朔寧-新溪(水谷城)-遂安-祥原-平壤
이에 문무왕은 김유신 등 30장군과 병력을 거느리고 경주를 출발하여 9월에 漢城停(廣州)으로 와서 唐將 李勣을 기다렸다. 10월 2일 이적이 평양성 북쪽 200리에 도착하여 尒同兮村主 大奈麻 江深에게 契丹 騎兵 80여 명을 거느리게 해서 阿珍含城(江原道 安峽)을 지나 漢城에 이르러 편지로 兵期를 독촉하였다. 그러나 11월 11일 신라군이 獐塞(遂安)에 이르러서 이적이 철군했다는 소식을 듣고 돌아왔다.

 다시 이해 12월 유인원이 唐帝의 칙명을 전하고 문무왕에게 大將軍의 旌節(旗)을 주면서 高句麗 遠征을 협력하라는 것이었다. 또 總章 원년(문무왕 8년, 668) 6월 12일에는 유인궤가 숙위하던 金三光과 함께 黨項城에 도착하여 作戰의 약속을 마치고 유인궤는 泉岡으로 떠났다.

 이렇게 나당 사이의 빈번한 접촉이 이루어지는 동안 당병은 이미 요동을 거쳐 압록강을 건너서 평양 근처까지 육박하였다. 6월 21일 신라는 김유신을 대당총관으로 삼아 30여 장군의 20만0069)≪三國史記≫권 44, 列傳 4, 金仁問전에 20萬을 출동했다는 기록은 상당히 과장된 것으로서 2만 명으로 보아야 할 것 같다. 대병력을 이끌고 북진해서 남하한 당병과 연합한 후 평양성을 포위하였다. 결국 고구려는 寶臧王 27년(668) 9월 21일 평양성이 함락됨으로써 기록상 시조 東明王으로부터 28대 705년 만에 패망하였다.

 이에 신라군은 蛇水에서 蕃漢諸軍과 연합했는데 고구려군이 출전하므로 오직 신라군이 선봉에 서서 대파했으며 이적은 신라 驍騎 500명을 취하여 먼저 入城함으로써 평양성을 격파했다고 한다.0070)≪三國史記≫권 7, 新羅本紀 7, 문무왕 11년조 答薛仁貴書. 이러한 신라군의 전과는 문무왕 8년 10월 22일의 논공행상에 잘 나타나 있다. 여기서 혁혁한 전공자들은 下級將校나 지방출신인 바,0071)申瀅植,≪三國史記硏究≫(一潮閣, 1981), 50쪽<표>도 여기서 적출하였다. 이는 실전에서 각 소부대의 지휘자들이 가장 큰 역할을 했던 점과 동시 귀족장군들의 臨戰態度를 이해할 수 있는 것이라 생각된다.

전 투 지 관 직 인 명 공 적 승진·포상
蛇川戰 大幢小少監 本 得   一吉湌 租 1,000石
  南漢主少監 金相京 戰死 一吉湌(追贈) 租 1,000石
平壤城 內戰 漢山州少監 朴京漢 平壤軍主 殺害    〃     〃
平壤城 大門戰 黑嶽令 宣 極      〃     〃
平壤 軍營戰 誓幢幢主 金遁山   沙湌 租 700石
平壤 北門戰 南漢山軍師 山 渠   述干 粟 1,000石
平壤 南橋戰 斧壤人 仇 杞    〃 栗 700石
平壤 小城戰 比列忽假軍師 世 活   高干 栗 500石

<표 3>문무왕 8년 평양전의 논공행상

 아무튼 신라는 선덕여왕 14년(645) 이래 당의 요동 침공에 부응하여 대병을 대기시키고, 出動의 헛걸음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선덕여왕 14년엔 고구려 남경을 공격했고, 무열왕 7년(660)에는 백제를 패망시켰으며, 문무왕 2년(662)초에는 전쟁보다 어려운 運糧으로 평양 부근까지 적진을 뚫고 왕복했다. 이는 곧 백제국 부흥군의 진압에 이어 평양성 함락에 신라군이 선봉의 역할을 아낌없이 발휘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이 평양에 安東都護府를 설치하여 설인귀에게 2만 당병으로 유진케 함으로써 신라는 다시 대가없이 물러서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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