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9권 통일신라
  • Ⅰ. 삼국통일
  • 1. 삼국통일 과정
  • 4) 고구려의 패망과 부흥운동
  • (2) 고구려국 부흥운동

(2) 고구려국 부흥운동

 고구려가 패망한 보장왕 27년(668) 전후로 당에 망명한 자와 포로·강제로 이치된 고구려 유민은 엄청난 숫자였다. 20만 명을 포로해 간데 이어 평양의 安東都護인 설인귀가 總章 2년(669) 4월에 38,200戶를 수륙 양로로 내지에 옮기고 고구려에는 빈약자만 두어 안동을 지키게 했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고구려민으로 離叛者가 많기 때문’이라는 것이다.0072)≪資治通鑑≫권 201, 唐紀 17, 總章 2년(669). 따라서 당의 강제 徙民은 평양 부근의 부강자를 抽戶함으로써 抗唐勢力을 제거키 위한 수단이었다.0073)李丙燾,<高句麗 一部遺民에 대한 唐의 抽戶政策>(≪韓國古代史硏究≫, 博英社, 1976), 458쪽. 이러한 당의 강제 사민은 옛 고구려 領內의 고구려인에게 더욱 충격과 동요를 주었고 그것이 劍牟岑의 부흥운동으로 표출되었다는 견해도 있다.0074)村上四男,<新羅と高句麗國>(≪朝鮮學報≫37·38합집, 1966), 40쪽.

 그러나 백제가 패망하자 부흥군들이 사비성의 외곽지대에서 여전히 항쟁하던 백제군을 주축으로 모여든 유민을 조직하여 백제국 부흥운동을 전개했던 것처럼, 고구려국 부흥운동도 본래부터의 고구려군이 평양의 외곽지대에 산재하면서 일으킨 對唐抗戰의 연속으로 파악하여야 할 것이다. 이러한 고구려인들의 부흥운동은 신라의 대당전쟁과도 깊은 관련이 있었다.

6월에 고구려 水臨城人 牟岑(혹은 劍牟:鉗牟岑) 大兄이 遺民을 수습하여 窮牟城으로부터 浿江 南에 이르러 唐의 관리와 僧 法安 등을 죽이고 신라로 향하여 서해 史冶島(蘇斧島)에 이르러 고구려의 大臣 淵淨土의 아들 安勝을 만나 漢城으로 맞아들여 君王으로 삼고 小兄 多式 등을 (신라에) 보내어 哀訴하였다. “亡한 나라를 일으키고 끊어진 世代를 잇게 하는 것은 천하의 公義이니 오직 大國(新羅)을 바랄 뿐이다. 我國의 先王은 道를 잃어 멸망을 당하였거니와 지금 臣 등이 본국의 귀족 안승을 얻어 군왕을 삼았으니 (貴國의) 藩屛이 되어 永世토록 盡忠하겠다.” 그리하여 왕은 그를 國西 金馬渚(益山)에 있게 하였다(≪三國史記≫권 6, 新羅本紀 6, 문무왕 10년).

 본래 검모잠은 水臨城의 軍指揮官(酋長)으로 抗唐運動을 전개하면서 궁모성·패강(大同江) 남쪽과 사야도를 거쳐 여기서 안승을 만나 고구려왕으로 추대하는 동시에 한성으로 나와서 신라의 후원을 요청했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그들은 망해버린 고구려의 正統을 다시 계승한「高句麗國」을 한성에 수립한 것인데 신라로 망명한 뒤는「報德國」으로 명명되었다. 여기서 한성은 廣州說0075)李丙燾,≪譯註三國史記≫, 103쪽.도 있으나 載寧說0076)池內宏, 앞의 책, 426쪽 및 村上四男, 앞의 책, 43쪽에서 載寧으로 보았다.이 유력해 보인다. 그런데 司馬光의≪通鑑考異≫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實錄 咸亨 元年에 楊昉과 高侃이 安舜(勝)을 討伐하고 비로소 安東都護府를 拔하여 平壤에서 遼東州로 옮기었다(≪資治通鑑≫권 201, 唐記 18, 고종 원년 2년).

 이에 대한 해석의 一說을 좀 장황하게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즉 이들은 抽戶에 의한 안동도호부의 허술한 틈을 타서 함형 원년(670)초에는 평양을 점령하였다는 것이다. 따라서 종래 안동도호부의 移轉에 대해서도 儀鳳 원년(676) 遼東古城(遼陽)으로 옮기고 그 이듬해 新城(撫順)으로 옮겼다는 것만 받아들였는데0077)≪舊唐書≫권 39, 地理 21 및 池內宏, 앞의 책, 391쪽. 總章 2년(669) 4월 신성으로 移治되었다는 것이다. 여기서 총장 원년 12월에 安東都護로 평양에 주재하던 설인귀가 그 이듬해 4월에 신성에서 1년간 통치하다가 咸亨 원년(670) 4월에 吐蕃征討司令官으로 전임했다.0078)≪舊唐書≫권 196上, 列傳 146上, 吐蕃 上. 그런데 考異에서 引用文에 이어 “儀鳳元年(676) 二月甲戌 以高麗餘衆反叛 移安東都護府於遼東城 蓋咸亨元年(670)言移府者 終言之也”라고 676년의 移治說을 주장한 점은 문제가 된다. 그런데 그 해 3월에는 신라의 薛烏儒와 고구려 遺將 高延武가 각각 1만씩의 兵力으로 압록강(대동강)을 건너서 唐兵과 싸우고 있었다. 바로 이런 상황에 검모잠의 봉기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이것은 검모잠 등이 문무왕 9년(669)에 거병하여 그 이듬해초에 평양을 점령했으나 양방·고간 등 당병에 의해 후퇴하는데 이때 신라 설오유가 唐兵驅逐에 나섰던 것이라 볼 수 있다. 여기서 한성(재령)은 당시 신라영토와 평양의 緩衝地였기 때문에 한성의「小高句麗國」再興이 가능했다는 것이다.0079)村上四男, 앞의 책, 43쪽. 村上은≪朝鮮古代史硏究≫(開明書院, 1978) 속에서<漢城の小高麗國>을 재정리했으나 기본논지는 같다. 위의 고연무는 문무왕 20년 왕의 妹(혹은 金義의 딸)를 안승에게 시집보내자 그 답례로 안승의 奉表를 문무왕에게 전달한 大將軍 太大兄 延武였다. 그런데 검모잠 등이 한성에서 항당운동을 하던 중, 안승이 검모잠을 죽이고 신라로 왔다고 하였다.0080)≪新唐書≫권 220, 列傳 145, 東夷 高麗. 그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그들 사이에는 현실을 대처하는 데, 즉 부흥운동에 극한적 이견을 가졌던 것 같으며, 안승이 아직 어린 나이라면 고연무와 검모잠 사이의 대립적 내분일 것으로 추측된다.0081)≪三國史記≫권 7, 新羅本紀 7, 文武王 11년조 薛仁貴書에서 “高麗安勝 年尙幼冲”이라 했으나 이것을 단순히 나이가 적다는 의미로 볼 수 있을지 의문이다. 그러나 高·劍 두 장군이 실질적 지휘자였을 것이므로 나이 적은 安勝을 상징적 王으로 추대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三國史記≫권 22, 高句麗本紀 10, 寶藏王 下의 總章 2년(669) 2월에 安勝이 신라로 투항했다는 기록은 史冶島로 망명한 것으로 보아야 하겠다. 또 설인귀와 平壤에 留鎭하던 劉仁軌는 곧 病으로 돌아가서 監修國史로 있었기 때문에(≪新唐書≫권 108, 列傳 33, 劉仁軌) 總章 2년(669)∼咸亨 4년(673)까지의 활동이 나타나지 않는 것이다.

 이상과 같이 평양지역에서 고연무·검모잠 등이 고구려국 부흥운동을 활발히 전개하자 이에 자극된 것인지 알 수 없으나 요동지방에서도 항당운동이 일어났다. 즉 문무왕 11년 7월에는 부흥군이 안시성에서 봉기하여 고간에게 공파당하였다.0082)≪資治通鑑≫권 202, 高宗 咸亨 2년. 그런데≪三國史記≫地理志 끝에 “압록수 이북의 항복하지 않은 11성”이 기록되었는 바, 이들 11성은 고구려가 패망한 668년에 항복하지 않았다는 뜻일 것이다. 이것은 11성 중에 안시성이 들어 있는 점으로 보아서도 확신된다.0083)≪한국사≫권 2(국사편찬위원회, 1977), 523쪽에서 677년까지 11개 성이 항복하지 않았다고 한 대목은 해석상 주목된다. 이렇게 고간 등이 요동지방의 고구려국 부흥군을 격파하며 한반도로 남하하자 북진한 신라군은 당군에 대한 적극적 방어에 나서게 되었다.

 한편 요동지방에서 고구려국 부흥군의 항당운동으로 인해서 儀鳳 원년(676)·2년에 遼陽·新城으로 안동도호부를 옮긴 당 또한 고구려 유민지배에 부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의봉 2년에는 寶臧王을 遼東都督朝鮮王으로 봉하여 신성의 안동도호부에 부임케 해서 유민을 무마케 하였다. 그러나 부임한 보장왕은 오히려 靺鞨과 함께 고구려국 부흥운동을 전개하려다가 공주(邛州)로 유배되었다. 이후 그 손자인 寶元이 嗣聖 2년(685)부터 垂拱 4년까지 朝鮮王으로 봉해졌다가 聖曆 원년(698)에는 忠誠國王으로서 안동도호부 지배지역의 고구려인을 진무하도록 하였다. 이 보원도 고구려국 부흥운동세력과 內通하자 성력 2년에 보원 대신 보장왕의 아들 德武를 안동도호로 파견시켰다.0084)≪舊唐書≫권 199上, 列傳 149上 東夷 高麗 및≪新唐書≫권 220, 列傳 145, 東夷 高麗조 참조. 당의 이 같은 조치는 그것이 비록 안동도호부의 휘하에 있었다 하더라도 당이 고구려인을 무마하기 위하여 세운 또 하나의「고구려」이며 이를 당이 세운「小高句麗」라 해도 좋을 것이다.0085)日野開三郞,<小高句麗國の建國>(≪東洋史論叢≫8, 三一書房, 1984), 80쪽. 이와 같이 당의 강제적 徙民과 자치적 소고구려의 재건에 의한 기미정책에도 불구하고 처음부터 고구려인의 고구려국 부흥·抗唐운동은 여러 곳에서 치열하게 전개되어 끈질기게 계속되었다. 바로 이러한 고구려인의 항당과 독립정신은 渤海國을 수립함으로써 계승·성취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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