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9권 통일신라
  • Ⅰ. 삼국통일
  • 1. 삼국통일 과정
  • 5) 대당전쟁
  • (2) 대당전쟁의 승리

(2) 대당전쟁의 승리

 나당간의 상반된 이해 속에 문무왕 9년(669) 5월 欽純·良圖가 謝罪使로 入唐한 이유는 백제토지와 유민을 신라에서 취한 때문이라 했다. 이에 이듬해 정월 양도는 당의 圓獄에서 殉國하고 흠순은 7월에 귀국하였다.0086)≪三國史記≫권 6, 新羅本紀 6, 문무왕 10년 정월. 흠순은 문무왕 10년 정월에 還國을 허락받아 7월에 귀국했다(≪三國史記≫권 7, 新羅本紀 7, 문무왕 11년 答薛仁貴書). 이 상황에 당은 신라를 정벌하겠다고 겁박했을 가능성은 너무나 충분한데, 渡唐留學僧 義湘이 당에서 흠순으로부터 “당이 신라를 치려고 한다”는 말을 듣고 돌아와 신라정부에 이 말을 전하였다.0087)≪三國遺事≫권 4, 義解 5, 義湘傳敎. 의상의 귀국연대는 문무왕 10년(670)과 11년 양설이 있지만0088)閔泳珪,<義湘>(≪韓國의 人物像≫3, 新丘文化社, 1963), 89쪽. 위의 사실을 참작하면 문무왕 10년초임이 확실하다. 바로 四天王寺의 창건도 이 시기로, 佛力에 의존하는 것 이외에도 당병을 구축하기 위한 국민적 단결을 호소한 상징적 의미를 경시해서는 안된다. 또<답설인귀서>에서 문무왕 8년의 웅진을 통한 소식에, 당이 선박을 수리하여 밖으로 倭國을 공격한다는 구실을 내세워 실상은 신라를 치려고 한다는 말이 들렸다는 것이다.

 이렇듯 문무왕 8년 직후부터 이미 나당관계는 극히 불안정했고 신라는 위기의식을 느끼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따라서 이에 대응한 신라는 軍備를 강화하여 一戰을 불사할 태세를 갖춘 것이 사실이라 하겠다. 신라는 백제 패망 직후 당이 신라까지 침략하려 함을 알고 왕과 김유신·多美公 등이 그 대책을 의논하여 당병과 싸울 것을 결의하는 모습이 보인다.0089)≪三國史記≫권 42, 列傳 2, 金庾信 中. 이것을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어렵다 하더라도 당의 태도 여하에 따라 신라의 신축성 있는 대책을 숙의했을 가능성과 당의 웅진도독부 설치에 따른 신라인의 불만과 불안은 능히 추측될 만하다. 비단 문무왕 8년뿐만 아니라 비록 동맹국이라 할지언정 그들의 大兵을 신라가 접한 적국으로 불러들이게 되었으므로 무열왕 7년(660) 당시부터 그들이 신라까지 해하지 않을까 하는 의구심은 당연히 가졌을 법하고 만일에 그런 경우가 발생한다면 그 대책이 무엇인가를 신라는 고심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여하튼 문무왕 11년의<설인귀서>에서 “신라왕은 機心을 움직여 邊城에 무력을 기울인다”고 들었다면서 당에 반역하지 말라는 위협을 가하고 있다. 설인귀와의 서신왕래 시기가≪三國史記≫그대로 인지 모르겠으나, 문무왕 11년은 이미 북방에서 신라가 군사적 행동을 감행하여 당병과의 전쟁을 강행하고 있었던 시기였다.

 신라의 대당전쟁은 고구려국의 부흥군이 당병과 싸우는 현장으로 1만의 신라군을 투입함으로써 개시되었다. 즉 문무왕 10년(670),

3월에 沙湌 薛烏儒가 고구려 太(大兄高)延武와 더불어 각각 精兵 1만을 거느리고 압록강을 건너 屋骨에 이르렀다. 말갈병이 먼저 와서 皆敦壤에서 기다렸다. 夏 4월 4일에 싸워서 우리 군사가 크게 이겨 斬首는 헤아릴 수 없었다. 당병이 이어 이르므로 우리 군대는 후퇴하여 白城을 지켰다(≪三國史記≫권 6 新羅本紀 6, 문무왕 10년).

라 하여 3월과 4월에 신라 장군 薛烏儒와 고구려 장군 高延武가 함께 압록강까지 진출하여 당병과 싸웠다는 것이다. 여기서 압록강은 패강(대동강)으로 추정되기도 하는데,0090)池內宏, 앞의 책, 430쪽. 당은 漢兵을 고간과 말갈병을 가진 李謹行을 파견하였다. 이들 당병은 바다로 온 듯하고, 먼저 도착한 이근행 부대는 패배시켰으나 고간에게는 신라 및 고연무군이 패하여 白城(白水城:載寧平野)에 후퇴했던 것이다. 이렇게 당병에게 밀려 안승·고연무 등 고구려 부흥집단이, 문무왕 10년 6월, 신라로 망명하여 金馬渚(익산)에 안치되었더라도 그들의 정병은 여전히 신라군과 함께 북방에서 당병을 저지했을 것이다.

 결국 신라가 고구려국 부흥군과 합세하여 당병과 싸우는 이유는 기본적으로 그들을 한반도로부터 축출하려는 데 있었기 때문에, 우선 평양의 북방에서 남하하는 당병을 저지하는 동시에 百濟故地를 攻取하는데 더 큰 목적이 있었다고 본다. 그것은 문무왕 10년 7월부터 당이 지배하고 있던 백제고지를 대대적으로 공략하는 데서도 알 수 있다. 즉,

7월에 왕이 百濟餘衆의 反覆을 의심하여 大阿湌 儒敦을 웅진도독부에 보내서 和를 청한 즉, 듣지 않고 司馬稱(禰)軍(백제인)을 보내어 (신라를) 엿보게 하였다. 王이 우리를 도모하려 함을 알고 禰軍을 (신라에) 머물러 두어 보내지 않았으며, 군사를 들어 백제를 칠새, 品日·文忠·衆臣·義官·天官 등은 36城을 攻取하였고 그 人民을 內地(신라)로 옮기었으며, 天存·竹旨 등은 7성을 취하고 敵首 2千을 베었으며, 軍官·文穎은 12성을 취하고 狄兵(唐의 蕃兵)을 쳐서 7천을 베고 戰馬와 무기를 얻음이 매우 많았다(≪三國史記≫권 6, 新羅本紀 6, 문무왕 10년).

고 하였다. 백제가 신라의 請和에 不從했다든지 신라를 치려 했기 때문에 逆擊했다는 것은 구실에 불과했고, 왕이 직접 출정한 大兵力은 사전의 면밀한 계획없이는 불가능한 것이다. 실제 戰果만 보더라도 위 인용문의 누계인 82성은 7월 한달간에 획득한 성과였다.

 또 문무왕 11년(671) 정월에는 웅진 남쪽에서 백제인과 싸워서 幢主 夫果가 전사했는데, 당병이 백제를 來援하려 한다는 말을 듣고 대아찬 眞功에게 甕浦를 지키게 했다. 6월에는 죽지 등이 加林城(林川) 부근의 石城(임천 동쪽 石城里)에서 드디어 당병과 싸워 5,300급을 베고 백제 장군 2인, 당병 장교 6인을 포로한 대전과를 올렸다. 여기서 웅진 남쪽, 가림성 등 현재 충남지방을 공략했다는 것과 전년의 82성이 현재 전라남북도에 해당한다고 추정하면0091)池內宏, 위의 책, 450쪽. 신라의 전략은 우선 수비가 허술했던 전라도지방을 먼저 공략하고 이어 당병의 본부격인 웅진으로 압축하여 들어갔다고 하겠다. 따라서 석성전투의 당병은 사비성에 주둔했던 1만 명이며 이들을 크게 함몰시켰다는 의미일 것이다. 또 포로 속에 백제 장군과 당병이 들어 있는 것은 웅진도독부의 당병과 다수의 백제인으로 편성된 군대가 신라군에 맞섰기 때문이다.

 이것으로써 신라는 백제고지의 거의 全地城을 점령했던 것 같다. 이리하여 문무왕 11년 7월에는 所夫里州(扶餘)를 설치하여 阿湌 眞王을 도독으로 삼았다. 불과 1년간에 백제 전지역을 석권하기 위하여 그 이전에 점유했을 金馬渚에 문무왕 10년 6월 고구려 부흥집단을 안치하고, 다시 안승을「고구려왕」으로 책봉한 이유는 바로 당병·백제인을 견제키 위한 신라의 책략이었을 것이며, 나아가 이들을 백제 경략에도 동원해서 당병구축의 선봉에 내세웠을 가능성이 크다.

 신라가 백제 전역을 점거했을 무렵<설인귀서>가 문무왕에게 전달되어 고간의 漢人騎兵과 이근행의 말갈병이 구름처럼 몰려오고 있다고 한 것은 당의 신라에 대한 應戰을 뜻한다. 문무왕 11년 10월 6일, 級湌 千福 등 신라 수군이 당의 漕船 70여 척을 격파하여 무수한 당병을 水葬시키는 동시에 포로도 적지 않았다. 이것은 바로 설인귀가 수군을 錦江口에 정박시키고 웅진을 공격하려다가 신라군에 대패한 것이다.0092)池內宏, 위의 책, 458∼460쪽. 이러한 당병의 도래로 북방에서의 전투는 가열되었다. 신라는 남하하는 당병을 저지·구축하여야 했다. 문무왕 10년(670) 전후로 평양지방에서 고구려 부흥운동을 전개한 검모잠 등을 진압한 고간이 그 이듬해 안시성으로 옮겨가고 평양 이남에서 다시 고구려 부흥운동이 일어났는데 이들은 검모잠 餘衆의 봉기로 생각된다. 문무왕 12년에 고간·이근행군이 평양에 도착하여 泉山(白水城?)에서 싸웠는데, “新羅援兵 2천 명을 사로잡았다”고 하였다.0093)≪新唐書≫권 220, 列傳 145, 東夷 高麗. 이 전투에 대한 문무왕 11년 9월과 12년 7월의 기록을 보면, 고간이 1만 병·이근행이 3만 병인데 신라군과 고구려군이 합세하여 韓始城과 馬邑城에서 대승하고 백수성까지 진격한 사실이 확인된다. 여기서 후퇴하는 고간군을 추격하여 石門에서 싸우다가 대아찬 曉川 등 7장군이 전사하는 大敗를 기록하고 있다. 이 전투에서 패배한 羅麗軍은 牛岑城(황해도 金川郡 縣內面 牛峰里)을 거쳐 七重河(臨津江)에 이르렀고, 문무왕 13년 윤 5월에 신라 영내로 귀환한 듯하다.0094)村上四男, 앞의 책, 44쪽. 바로 이런 상황속에서 문무왕 12년 9월에는 당으로 사죄사를 보냈다. 즉, 백제토벌로 당에 獲罪하여 級湌 原川·奈麻 邊山을 사신으로 삼고, 신라에 억류중인 兵船郎長 鉗耳大候 등 5인과 군사 170인을 보내며 사죄했다는 것이다. 이는 신라의 兩端政策으로서 한반도내에 있던 당병을 격파하고, 새로 파견되는 당병과 싸우면서 사죄의 형식으로 당과 외교적 타결을 시도했지만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고 戰勢는 불리하였다.

 황해도 방면에서 싸우던 신라군은 후퇴하여 임진강과 한강 사이의 신라 북경에서 대치하게 되었다. 즉 문무왕 13년(673) 9월에는 당병과 아홉번을 싸워 2,000급을 베었고 瓠瀘河(임진강)·王逢(幸州 漢江)에 익사시킨 적도 많았다는 것이다. 또 당병은 大楊城과 童子城(江華 通津)을 멸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때 당병이 우잠성을 항복받았다는 것이다.

 이런 격렬한 전쟁 속에 신라는 대아찬 徹川에게 兵船 100척를 주어 서해를 지키게 함으로써 당 수군의 침략에 대비하는 동시에 제해권을 장악하였다. 또 처음 태종무열왕이 백제를 멸하고는 戍兵을 없앴으나 이때 다시 설치했다는 것이다. 이는 지방에 대한 통치를 강화하되 특히 百濟故地의 수병을 강화했던 것이라 보면 북방에서 당병을 방어하며 통합된 내지에 대한 통치질서를 세워가고 있는 것이라 믿어진다.

 이 같이 단호한 신라의 대당정책은 더욱 가열된 전쟁으로 고조되었고 문무왕의 왕권까지 부정하려는 감정으로까지 확산되었다. 즉 당은 왕의 官爵을 삭제하고 唐京에 있던 김인문을 신라왕으로 삼아 귀국하게 하였다.0095)≪資治通鑑≫권 202, 唐紀 18, 고종 上元 원년(674). 따라서 신라는 西兄山과 靈廟寺 前路에서 閱兵을 하였고 薛秀眞이 六陣兵法을 시험하는 등 전력과 전술을 강화하는 면이 현저하였다. 이는 응당 對唐戰爭을 승리로 이끌기 위한 노력이었다.

 그러나 한편 문무왕 14년 2월에는 宮內에 연못을 파고 산을 만들어 화초를 심고 진기한 禽獸를 기르며, 그 다음해 정월에 百司와 州郡의 印을 銅鑄하여 반포했다는 사실은 대당전쟁을 낙관한 나머지 內的 體制整備와 아울러 통일신라가 해체될 사치의 씨앗을 뿌리고 있었던 것이다.

 더욱이 문무왕 15년 2월에 당은, 유인궤가 七重城을 격파한 뒤 군사를 이끌고 돌아간 다음, 이근행을 安東鎭撫使로 삼아 경략하게 했는데, 신라에서는 다시 당에 사죄사를 보내어 왕의 관작을 회복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변동과 아울러 백제고지와 고구려 남경까지 州郡을 설치했다는 사실은 효과적 지배체제를 마련하는 동시에 대당전쟁의 종말을 예견한 조처였다고 생각된다. 특히 고구려 남경 지역에 대한 주군설치는 당에 대한 영토분할약정을 고수하겠다는 신라의 의지표현으로 주목된다.

 신라는 당병·거란병·말갈병이 내침할 것이라는 소식을 듣고 9軍의 대병력을 북방에 배치하였다. 그런데 문무왕 15년 9월에 설인귀는 風訓0096)伏誅된 장군 金眞珠의 아들로 당시 唐에서 宿衛學生으로 있었다.을 향도로 삼아 泉城에 침입했으나 신라 장군 文訓 등이 逆戰하여 당병 1,014급을 베고 병선 40척을 취했으며 戰馬 1,000필을 얻어 설인귀를 敗走시켰다. 여기서 대패한 설인귀는 다시 문무왕 16년(676) 11월에 부여 앞바다에 나타났다. 이에 사찬 施得이 선병을 이끌고 설인귀병과 所夫里州 기벌포에서 싸웠으나 초전에서 패배하였다. 다시 나아가 대소 22戰으로 적 4,000급을 베고 크게 이겼다.0097)≪三國史記≫ 권 7, 新羅本紀 7에 薛仁貴가 羅唐戰爭에 참전한 것은 문무왕 11년(671)·15년·16년의 3回로 기록했다. 池內宏은 설인귀가 上阮中 象州로 유배되었으므로 문무왕 15년·16년의 내침은 잘못이며 문무왕 11년 1回만 사실로 보았고 그의 패배도 인정하였다(池內宏, 앞의 책, 460·473쪽). 그러나 제미슨은 그가 유배 이후에도 참전 가능성을 시사했다(제미슨,<羅唐同盟의 瓦解>,≪歷史學報≫44, 1969, 4쪽). 이들 海戰은 전황으로 보아 신라의 수륙 양군이 서해의 남북을 누비며 당병을 가차없이 격파했던 것이다.

 이제 대당전쟁을 最大回戰이라 할 買肖城전투에 대해 언급키로 하겠다. 이에 대한 자료는,

① (上元 2년) 2월에 劉仁軌는 七重城에서 신라의 무리를 대파하였다. 또 말갈을 浮海시켜 신라 南(北)境을 經略하여 많은 무리를 斬獲하였다. 인궤는 병사를 이끌고 돌아왔다. 詔書를 내려 李謹行을 安東鎭撫使로 삼아 신라 매초성에 주둔하여 경략할새 세번 싸워 모두 이겼다. 신라는 곧 사신을 보내어 조공을 바치고 또 사죄하였다. 上이 赦하여 신라와 법민의 관작을 회복하고 김인문은 中道에서 돌아오자 임해군공으로 고치어 봉하였다(≪資治通鑑≫권 202, 唐紀 18).

② (文武王 15년 9월) 29일 (唐將) 이근행이 20만의 군병을 거느리고 매초성에 來屯하였으므로 아군이 이를 擊走시켜 戰馬 30,380필을 획득하고 기타 兵器의 노획도 이와 같았다(≪三國史記≫권 7, 新羅本紀 7, 문무왕 15년).

고 하는 두 기록의 전과가 상반되나≪삼국사기≫가 정확하다. 단지 이근행의 軍數는 문무왕 11년(671) 고간·이근행이 도합 4만을 거느렸으므로, 20만은 지나친 과장이다. 다음 매초성의 위치로 楊州說이 있으나,0098)池內宏, 앞의 책, 469쪽. 매초성은 현재 경기도 漣川郡 淸山面 大田一里「大田里山城」이고, 또 매초성은 買蘇川城이며 따라서 ‘매소성’으로 읽어야 하며 지금 漢灘江을 ‘매소천’이라 했을 것으로 보기도 한다.0099)≪中央日報≫, 1968년 6월 9일자 6면.
買蘇川城 전투에 대해서는≪三國史記≫권 43 列傳 3 金庾信 下에 앞서 唐兵에게 패한 元述에 대하여 “至乙亥年 唐兵來攻買蘇川城 元述聞之 欲死之以雪前恥 遂力戰有功賞”이라 하였다
이 천험의 요새에 이근행군이 주둔하기를 기다려 미리 대기하고 있던 신라 9군이 철통같이 에워싸고 대파해 버린 것이다. 이 매소성전투를 마지막으로 육지에서의 대당전쟁은 끝난 것이다. 앞에서 본 문무왕 16년 설인귀군과의 기벌포 앞 해전의 승리로 종결지었다. 이렇게 해서 참으로 길고도 험란한 대당전쟁은 문무왕 10년(670)부터 16년까지 7년간에 걸쳤고 신라의 승리로 끝맺었다.

 그러면 다시 생각할 것은, 당이 왜 전쟁을 종결지었는가 하는 문제이다. 누가 보아도 신라와 당은 국력의 비교가 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흔히 신라가 사죄사를 보냈기 때문에 고종이 이를 허락하는 형식으로 당의 체면을 세우고 더 이상 用兵하지 않았다0100)池內宏, 앞의 책, 484쪽.고 한다. 다른 이유없이 이것이 설득력을 갖는다면 唐帝의 寬大性일 수밖에 없으나 이것만으로 충족되지 않는다. 그런데 다음 자료는 주목된다.

그 뒤 신라가 外叛하니 高宗이 發兵하여 토벌하려 하였다. 그때 文瓘은 病으로 在家했다가 곧 병든 몸을 수레에 싣고 고종 뵙기를 청하였다. (장문관이) 아뢰되, “근래에 吐蕃이 犯邊하여 군대를 주둔시키고 邊境을 寇掠합니다. 신라는 아직 순종하지 않지만 군대가 唐土內를 침범하지 않습니다. 만약 동·서를 함께 정벌한다면 신은 백성이 그 폐해를 견디지 못할까 두렵습니다. 用兵을 멈추고 修德하여 백성을 안도하도록 청합니다.” 하여 고종이 이에 따랐다(≪舊唐書≫권 85, 列傳 34, 張文瓘).

 장문관은 더욱 급박한 토번의 당내 침입을 내세웠지만, 신라정벌 반대론자임이 분명하며, 그 뜻을 말할 수 있고 고종이 이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唐朝의 분위기와 外患의 상황이 긴박했다는 사실이다. 토번은 661년 6월에 吐谷渾을 공격함으로써 당과의 전쟁이 계속되었는데 700년에 잠시 당과 화해했을 뿐이다. 따라서 우리에게 익히 알려진 설인귀는 670년 4월에 토번정벌의 실패로 제명되었고, 676년 유인궤도 그 정벌에 참전하였다. 또 7세기 이후 거란과 돌궐의 鐵勒이 叛唐하고 있었다.0101)申瀅植,≪統一新羅史硏究≫(三知院, 1990), 15∼16쪽. 신라는 바로 이 같은 당의 외환을 알았을 가능성이 높지만, 여하튼 국가의 흥망을 걸고 대당전쟁을 전개하여 승리함으로써 신라의 자주성과 국익을 戰取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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