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9권 통일신라
  • Ⅰ. 삼국통일
  • 2. 삼국통일의 역사적 의의
  • 1) 민족융합의 문제

1) 민족융합의 문제

 신라의 삼국통일은 미리 민족적 동일성을 내세우면서 출발한 것이 아니고, 삼국간의 격렬한 대립 속에 자기보존의 방편이 상대국의 呑倂이라는 國家意識으로 깊이 작용한 결과였다. 삼국통일의 주체적 당사국인 신라는 三韓을 한 국가로 통합했다는 ‘一統三韓’의식을 가지고 있었고 삼한은 삼국을 상징했기 때문에 신라인은 고구려·백제가 같은 韓族이라는 동족의식을 가졌던 것이라 한다.0102)邊太燮,<三國統一의 民族史的 意味>(≪新羅文化≫2, 東國大, 1985), 58쪽. 그런데 동족의식의 가장 중요한 요소로 언어의 동질성을 꼽을 수 있다.≪三國史記≫本紀·列傳을 보면 삼국인 사이에 의사소통상 언어의 장애가 거의 없었던 것 같지만, 언어학자의 연구에서는 삼국간에 상당한 거리감을 갖고 있었다. 즉 오늘날 우리 국어의 가장 이른 단계를 夫餘韓祖語라 가정할 때, 고구려·신라·백제어는 여기서 갈려나온 것인데 삼국의 후기에 서서 볼 때 夫餘系와 韓系의 分岐를 1천 년 이상으로 추측하였다.0103)李基文,<古代 三國의 言語에 대하여>(≪27회 全國歷史學大會 發表要旨≫, 1984), 37쪽.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종적·문화적으로 동질적 성격을 지닌 國家群으로0104)盧泰敦,<三韓에 대한 認識의 變遷>(≪韓國史硏究≫ 38, 1982), 129∼156쪽. 상호의존적 균형을 취하면서 비교적 자주 접촉하는 동안에 비록 자각된 것은 아니더라도 동족적 친근감을 가져왔을 것이다.

 이것이 신라에 의한 國體의 통합과 새로운 지배질서를 마련하는 과정에서 차츰 신라국민으로서 더욱 동질성을 자각하면서 동족의식이 뚜렷해졌을 것이며 민족적 융화가 촉진되었을 것이다.

 무열왕 7년(660) 이래 신라는 일부 백제토지와 유민을 흡수하여 당과 마찰을 빚기도 했다. 11월에는 포로한 백제인 중에서 좌평 忠常·常永과 達率 自簡에게 一吉湌(7등위)을 주어 총관으로 임명하였고 恩率 武守에게는 大奈麻(10등위)에 大監職을 주었다. 또 은솔 仁守는 대나마에 弟監으로 삼았다. 이들은 才質을 고려한 임용이라 했는데, 실은 백제국 부흥군 진압에 동원키 위한 방편이었으므로 이들이 백제의 포로나 降卒을 인솔하고 출전했을 것이라 생각된다. 이후 문무왕 원년(661) 2월에는 충상을 아찬(6등위)으로 승급시켜서 사비성을 공격하는 백제국 부흥군을 진압하는데 참전시키고 있다. 다시 그 해 7월 17일에는 충상이 品日 등과 함께 上州摠管에 임명되고, 自簡은 眞欽 등과 下州摠管에 임명되었다. 이들 신라군은 당의 고구려 침공에 상응하여 북상하다가 백제국 부흥군을 진압하였다. 신라에서는 雨述城에서 항복한 달솔 助服을 급찬(9등)에 古陁耶郡(安東) 태수로 삼았고, 은솔 波伽에게 급찬에 田宅과 衣物을 주었다는 것인데, 이들 또한 일부 백제 유민과 동반시켰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와 같이 백제정벌과 백제국 부흥군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항복한 백제 장군들은 다시 전쟁터에 동원하기 위하여 임시로 관등과 관직을 수여하였으나 문무왕 11년부터 백제가 평정·통합됨에 따라서 백제 유민에 대한 대처방안이 대두한 듯하다. 그것은 주로 백제의 관료와 장군 등을 신라의 官僚組織體系內로 흡수할 때의 처우규정으로서 문무왕 13년에 확정되었다(<표 4> 참조). 그러나 바로 이 시기는 한창 나당전쟁을 수행하고 있던 중이었으므로 유민 가운데에서 대당전쟁에 동원될 수 있는 유용한 재질을 충분히 감안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런 면에서 신라가 백제 전지역을 정복하면서 대당전쟁을 더욱 활기있게 추진할 인적자원을 종래 신라인 수만큼이나 더 얻은 셈이지만 백제 유민은 대당전쟁에 그렇게 많이 동원된 것 같지는 않다. 신라로서는 단지 이들을 조속히 안정시키는 일 또한 큰 과제였을 것이었기 때문이다.

百 濟 官 階 新 羅 官 階
官 階 官 階 名 中央官階 中央官階名 地方官階 地方官階名
2
3
4
5
6
7
達 率
恩 率
德 率
扞 率
奈 率
將 德
10
11
12
13
14
15
大 奈 麻
奈 麻
大 舍
舍 知
吉 舍(幢)
大 烏
4
5
6
7
8
9
貴 干
選 干
上 干

? 伐
? 尺

<표 4>백제 유민에게 주어진 신라 관계

 한편 고구려가 패망한 문무왕 8년을 전후하여 그 유민도 적지 않게 신라로 망명·투항해 왔다. 즉 문무왕 6년에는 고구려 대신 淵淨土(淵蓋蘇文의 弟)가 12城 763戶 3,543人을 가지고 투항하였다. 신라는 연정토와 그 從官 42인을 왕도·州府 등에 안치시키고 衣物·糧料·家舍를 주어 새로운 정착에 지장이 없도록 하였다. 그리고 12성 중에서 8성은 성읍 백성이 온전함으로 士卒을 보내서 지키게 했던 것이다. 또 문무왕 8년 11월 5일 신라군이 고구려정벌을 마치고 개선할 때 포로 7,000人과 함께 입경하였다. 다시 문무왕 10년 6월에는 안승 등 고구려국 부흥운동 4,000호가 망명해 왔다. 문무왕 13년에 호로하(임진강)에서 신라군이 唐將 이근행의 군에게 밀리면서 “餘衆은 모두 신라로 달아났다”고 한 이 ‘여중’은 신라군과 함께 항당하던 고구려국 부흥군일 것이다.0105)≪三國史記≫권 22, 高句麗本紀 10, 말미 總章 4년. 이렇게 수차에 걸쳐 신라로 망명·투항한 고구려 유민은 공식적 집계만도 30,543명인데 이 숫자는 7세기 당시로는 엄청난 것이다. 여기에 점령한 고구려 남경의 토지와 유민까지 참작하면 놀라운 팽창이었다.

 이들 고구려 유민의 상당수는 문무왕 10년 이후 백제고지의 정복과 대당전쟁에 동원되었을 것이나 문무왕 16년에 나당전쟁이 신라의 승리로 끝남에 따라 이들 고구려 유민에 대한 조치가 정책적 문제로 제기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일부 투항·포로한 고구려 유민은 따로 신라 內地에 분산·안치했으므로 별다른 문제가 없었겠지만, 고구려국 부흥운동을 주도하던 안승집단은 신라로 망명하면서 금마저에 머무르게 했는데 거의 독립적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들 안승집단은 문무왕 14년까지「고구려」라 했을 것이며, 그 이후부터는「報德國」으로 冊命하여 신라 스스로 宗主的 의미를 강화하면서 그들의 독자성을 부인하는 정책으로 전환하였다. 아직 나당전쟁이 계속되는 동안은 이들 집단의 성격은 그런대로 유지될 수 있었다.

 그러나 신라에서는 문무왕 20년에 왕의 누이를 안승에게 시집보내고 문무왕 23년에는 그에게 蘇判(3등위)을 주는 동시에 金氏로 賜姓하여 甲第와 良田을 주어 京都에 살도록 하였다. 그러니까 보덕국은 안승을 왕으로 문무왕 23년까지 고구려 官制를 사용하면서, 신라의 간섭없이 독자적으로 운영되어 왔었다. 문무왕 16년에 나당전쟁이 끝나고 7년이 흘러간 이 시점에서 신라가 통일국가로서 새로운 통치체제를 재정비함에 안승집단은 이제 장애가 될 뿐더러 신라로서는 그들을 흡수·융합할 필요성이 절실했다고 믿어진다. 신라의 이 같은 조치에 반발하여 신문왕 4년에 안승의 族子로 장군인 大文 등이 반란을 일으켰으나 신라군에게 진압되면서 餘衆을 남쪽 州郡으로 옮김으로써 고구려국 부흥집단은 사라졌다. 그러나 이들 고구려 유민 중 관료나 장군이었던 유력한 자들을 신라 관료조직내로 흡수하기 위하여 그 처우규정을 신문왕 6년(686)에 제정하였다(<표 5>참조).

高 句 麗 官 階 新 羅 官 階
中央官階 中央官階名 中央官階 中央官階名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鬱折(主簿)
太大使者(大相)
皀衣頭大兄(位頭大兄)
大使者(從大相)
大 兄
收位使者(儒相)
上位使者(狄相)
小使者(小相)
小 兄
諸 兄
先 人
自 位
7
8
9
10
11
12
13
14
15


 
一 吉 湌
沙 湌
級 伐 湌
大 奈 馬
奈 馬
大 舍
舍 知
吉 土(吉次)
大 烏(烏知)


 

<표 5>고구려 유민에게 주어진 신라 관계

 이상 백제인과 고구려인에 대한 두 표를 비교하면 백제인은 京位 대나마(10등위)가 최고 관등이고 귀간 등 外位도 수여하도록 규정하였다. 고구려인에게는 일길찬(7등위)·사찬(8등위)을 상위 관등으로 규정하여 백제인보다 두 등급을 높게 책정했으나 이것은 큰 차별이라고 할 수 없다. 고구려인으로 최고 관등을 받은 主簿가 地籍圖나 戶籍을 작성하는 技能人이었다면,0106)李昊榮,<三國時代의 敗政>(≪國史館論叢≫13, 國史編纂委員會, 1990), 106쪽. 통일 직후 폭증된 인구와 확대된 영토를 정확하게 파악하기 위해서도 주부는 매우 긴요한 존재였을 것이다. 이 같은 필요에서 주부를 최고 관등으로 대우했다면 그 영향은 新羅帳籍에까지 미쳤을 것이 분명하나, 경덕왕 18년(759)에는 調府·禮部 등의 大舍(12등위)를 주부라 고치는 것으로 보아, 주부의 직능도 단순한 文書記錄官으로 전락하고 그 등급도 낮아졌음을 알 수 있다.

 통일신라 초기의 여제에 대한 이러한 흡수·융합정책은 이후 얼마나 지속적이었는지 알 수 없지만 신라정부가 고심한 흔적은 안승집단의 처리과정에서 현저히 볼 수 있다. 더욱이 신문왕 5년(685)에 지방행정구획을 재편성함에 있어 신라로 통합된 전 영역을 9州·5小京으로 나누었다. 옛 신라 땅을 3州로, 옛 백제 땅을 3주로, 옛 고구려 땅을 3주로 각각 數的 均分을 의도한 것은 여제인을 같은 통일신라인이라는 同質化政策에서 나온 것이라 한다. 또 9誓幢에 신라인뿐 아니라 백제·고구려·말갈인으로 조직한 이유는 이들을 포섭과 회유하는 동기에서 나온 민족융합정책이라는 것이다.0107)邊太燮, 앞의 책, 63쪽.
필자는 9州·9서당 등의 제도는 중국의 天下思想을 도입하여 新羅가 天下를 지배한다는 新羅中心思想의 표징으로 보았다.

 한편 삼국의 국민은 공통적으로 佛敎를 신봉한다는 점을 감안하여 신라정부에서는 불교를 통해 亡國으로 격앙된 여제인의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려 하였으며,0108)金相鉉,<新羅 三國統一의 歷史的 意義>(≪統一期의 新羅社會硏究≫, 新羅文化硏究所, 1987), 397쪽. 熊川州 출신인 高僧 憬興을 國老로 우대한 것은 민심을 수습하려는 정책과도 상통된다고 할 수 있다.0109)許興植,<新羅佛敎界의 組織과 行政制度>(≪新羅文化祭學術發表會論文集≫8, 1987), 150쪽.
崔根泳, 앞의 책, 60쪽에서 文武王이 그를 國師로 임명하려 했으나 ‘曲爲國老’한 사실(≪三國遺事≫권 5, 感通 7, 憬興遇聖)은 차별한 처사로 보았다.

 물론 이러한 일련의 민족융합정책에 대하여 회의적·부정적 견해도 있다. 즉, 통일 후 신라정부는 여제 유민을 제도적 장치로 차별하였기 때문에 그들 유민은 망국의 원한을 버리지 못하고 오히려 신라에 대한 경계심과 적개심을 갖게 되었다는 것이며, 이로 인해 그들은 내심에 잠재한 國系意識을 쉽사리 버리지 못했다는 것이다.0110)崔根泳, 위의 책, 63쪽. 그러나 신라인을 중심으로 여제인을 차별한 것인데, 그 차별의 정도는 인류의 역사변혁 과정에서 불가피한 산물인 동시에 시대적 한계성이라고 볼 수 있다.

 요컨대 신라는 여제 유민과 함께 대당전쟁을 승리로 끝맺으면서 이들 유민을 흡수·융합하고자 고심한 흔적이 뚜렷이 보인다. 첫째 투항·망명한 유민은 신라 內地에 분산·안치시켰고, 둘째 유민 가운데 지배층은 신라 관료조직 속으로 흡수하였다. 셋째 신라와 옛 여제지역을 9주로 나누었고 5소경을 설치함으로써 행정구획편제에 평등을 취하려고 한 것이다. 넷째 불교로 유민의 정신적 안정과 그 수습을 배려한 듯하다. 이와 같이 증가된 국민과 확대된 영토를 新羅化하려는 정책을 추구했는데, 이런 융화정책이 민족형성의 결정적 역할을 한 것이다.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