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9권 통일신라
  • Ⅰ. 삼국통일
  • 2. 삼국통일의 역사적 의의
  • 2) 삼국통일의 역사적 의의

2) 삼국통일의 역사적 의의

 신라의 삼국통일은 비록 그것이 불완전했더라도, 新羅史의 입장에서 참으로 중대한 의미를 가질 뿐만 아니라 이후 韓民族史 展開過程에도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후대 史家들의 회의적이고 부정적 견해로 말미암아 역사적 진실이 가려진 채 혼돈된 修辭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이들 부정적 견해의 근본적 원인은 신라의 삼국통일을 역사진행의 현장인 당시 상황에서 이해하려 하지 않고 후대의 역사적 현실에 대한 불만의 입장에서 각자 숨겨진 목적 실현에 맞추어 멋대로 해석하는 好材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민족주의 사학자 申采浩는 일제의 강점에 의한 한국의 피식민 상황하에서 자주와 독립을 되찾으려는 국권회복운동의 일환으로 우리 나라 역사를 연구하였다. 따라서 여기에는 유구한 역사의 자긍과 강력한 힘의 투쟁이 요청되었던 까닭에 고조선·고구려를 중심으로 역사를 서술한 것으로 믿어진다. 더욱이 우리 역사상 가장 강력한 국가였던 고구려의 끈질긴 대중국투쟁을 부각하는 한편 당과 제휴하여 고구려 및 백제를 멸망시킨 신라를 증오하여 낮추어 평가했다고 보인다. 그것은 대당외교를 강화하여 나당군사동맹을 체결한 金春秋를 事大主義의 병균을 전파한 주인공으로 평가했고, 또 통일의 공이 켰던 金庾信에 대해서도 “대개 김유신은 智勇있는 名將이 아니요 陰險鷲悍한 정치가이며 그 평생의 大功이 戰場에 있지 않고 陰謀로 隣國을 亂한 자이다”라고 하였다.0111)≪丹齋申采浩全集≫ 上(螢雪出版社, 1979), 325∼329쪽. 이러한 평가는 국권회복이라는 당면과제의 해결을 위하여 민족적 단결이 요청되었던 상황에서 강조되었던 까닭이었다.

 우선 신라의 삼국통일은 신라국의 획기적 發展의 계기였다. 삼국은 모두 동일종족·동일민족적 특성을 공유했지만 장구한 세월 동안 분리되어 성장하면서 삼국 그 자체가 小國際社會를 형성하고 대립해 왔던 것이다. 신라는 고대국가의 건설과 유·불교의 문화수용과정에서 고구려·백제의 영향을 받기도 하고 세력균형을 취해 왔지만, 신라의 後進性은 좀체로 극복되지 못했던 것이다.0112)金哲埈,<統一新羅·支配體制의 再整備>(≪한국사≫3, 국사편찬위원회, 1977), 30쪽.

 그러나 고구려의 北守南進政策에 자극된 나제동맹이 120년간 지속되는 동안 신라는 유·불 등을 통해서 문화국가의 면모를 과시했고, 加耶 병합과 한강 유역 정복으로 자국의 국력에도 자신을 갖게 되었다. 이러한 문화와 영토확장과정은 곧 후진성 극복과정이기도 하여 이후 국제환경의 변화를 自國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전개하기 위하여 어떻게 대처해 갔는가에 주목한다면 신라의 그 정확한 판단과 저력은 참으로 놀라운 것이었다.

 신라는 6, 7세기에 있어서 내외의 국가적 위기를 슬기롭게 극복할 줄 알았던 국가의식·국민의식·문화의식을 조화있게 갖추고 있었다. 대내적 권력투쟁도 서서히 안정되었고 급격한 유혈사태에 의해 주체적 변혁이 일어난 것은 아니었다. 한편 신라는 중국대륙의 정세변화에 민첩하게 반응하면서도, 먼저 작은 국제사회인 삼국관계에 의하여 문제를 해결해 보려고도 하였다. 그것은 신라의 역사적 경험에 의해서 백제와의 항쟁을 고구려와 교섭함으로써 해결하고자 노력하였다. 즉 고구려에의 청병이 실패되자 비로소 당과 더욱 적극적으로 교섭하였다. 당은 그의 패권주의적 동방정책의 일환으로 신라를 끌어들인 셈이지만, 신라의 단계적인 외교의 적중이 그렇지 못했던 고구려·백제와 비교되어 결국 신라는 뛰어난 국제감각으로 현실을 대처하였다고 하겠다.

 다음으로 신라는 백제·고구려를 패망시키기까지 표면상 당과 주종관계에 서 있었으나, 그것은 신라의 자주성을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국가의 이익을 위한 외교였을 뿐이었다. 바로 국가의 흥망을 건 대당전쟁은 표면상 유보되었던 주체성 회복운동인 동시에 전쟁 전의 영토분할약정을 지키지 않았던 당을 응징하고 국익을 되찾기에 이르렀고 이것이 신라의 참모습이었다고 할 수 있다.

 신라가 한반도로부터 수만의 당병을 패퇴시켰을 때 신라의 北境은 임진강에서 함경남도 德源에 이르렀다. 문무왕 8년(668)에 比列忽州를 다시 설치하고 15년에는 현재의 덕원으로 비정되는 鐵關城을 축조했던 데서 알 수 있다.0113)池內宏, 앞의 책, 478쪽. 이렇게 東北境은 크게 북상해 있었고 서북경은 통일 이후 점차 북쪽으로 확대하던 중 발해를 견제시키려는 당이 신라에게 平壤 이남의 영유권을 공인함으로써 聖德王 34년(735)부터 대동강에서 원산만을 연결하는 북경이 설정되었다.0114)李基東,<新羅下代의 浿江鎭>(≪韓國學報≫4, 一志社, 1976) 참조. 이 같이 신라의 영토와 인구는 종래의 약 3배로 팽창되었고 이것은 참으로 신라의 획기적 발전이기 때문에 종래 삼국기의「신라」와는 달리「통일신라」라 명명하는 데 인색할0115)김영하,<신라 삼국통일은 타당한가>(≪역사비평≫20, 역사비평사, 1993), 190쪽. 통일신라를 중세라 하면서 ‘통일’을 빼고 ‘신라’라고만 하자는 것이다. 필요가 없다.

 물론 신라의 통일은 완벽하게 삼국을 다 포함하지 못했고 고구려 남쪽 일부를 영유했으면서 삼한을 삼국으로 의식한「一統三韓意識」에 의하여「삼국통일」로 간주되어 왔고 때로는「半島統一」이라는 실증적인 말로도 표현되고 있다. 그러나 民族의 활동무대가 축소되었다든지, 요동과 만주지역이 상실되었다는 것은 역사적 사실이기는 하나, 그 책임을 신라에게 전가시킬 이유가 없다. 異族인 唐을 끌어들여 동족을 멸망시킨 신라를 반민족적 행위로 보려는 民族主義史學은 국가를 잃은 민족으로서 국가건설을 목적한 그 당시의 상황논리임을 알아야 한다. 이런 상황논리가 그 글의 行間에 들어 있지 않다면 굳이 민족주의사학이라 할 이유가 없다. 또 오늘날에도 민족만을 주장하는 史學이 있다면 이는 국가와 국민이 민족 속에 매몰된 다분히 이념적 사학이며 역사적 현실은 아닐 것이다. 여기에 민족과 국가와 국민을 판별할 줄 아는 사학이 절실히 요청되기도 한다. 왜냐하면 민족의식이 없었거나 있었더라도 지극히 박약했던 때에 신라는 당을 이용하면서0116)申瀅植, 앞의 책(1990), 37쪽. 고구려·백제 양국을 패망시켜서 고구려의 많은 유민을 흡수하였고 백제를 정복·통합하여 삼국 중 자국을 보존하고 발전시킬 최선책을 실현함으로써 생명력 있는 민족국가 건설의 기반을 구축하였기 때문이다.

 본래 삼국은 血統·言語·習慣이 비슷하였는데,0117)申瀅植,<新羅統一의 歷史的 意義>(≪新羅史≫, 梨大出版社, 1985), 38쪽. 이제 전 백제인과 상당수의 고구려인들이 흡수된 통일신라는 한 국가의 같은 영역 안에서 같은 문화를 향유하게 된 국민으로 정착함에 따라 참으로 민족공동체가 이루어진 것이다. 이후 잠시 後三國으로 분리되었다가도 高麗國에 의한 再統一이 당연시 된 것은 그 동안 민족적 응집력을 하나의 국민의식으로 축적시켜 왔기 때문이다. 이러한 통일신라의 기반 위에서 고려를 지나 조선조 초기에 이르면서 750여 년간의 꾸준한 북진 끝에 현재의 압록강과 두만강에 이르기까지 영역을 회복·확대할 수 있었다.

 신라의 삼국통일과 자주성 회복과정은 곤혹스러운 삼국 상호항쟁과 국가이익에 앞선 대당관계를 신라 특유의 대응과 인내와 기다림으로 당차게 극복한 쾌거의 역사이기도 하다. 만일 생명력있는 한민족의 현재를 긍정한다면 신라가 수립한 창조적 전통과 역사에 대하여 무한한 신뢰와 긍지를 가질 수 있을 것으로 확신한다.

<李昊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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