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9권 통일신라
  • Ⅱ. 전제왕권의 확립
  • 1. 무열왕계의 왕권확립
  • 2) 김흠돌란의 발생

2) 김흠돌란의 발생

 무열왕계의 전제정치의 확립을 지향한 문무왕의 집중적인 왕권강화작업은 필연적으로 진골귀족의 커다란 반발을 불러 일으켰다. 이와 같은 문무왕의 정치개혁은 결국 골품제적 신분질서에 기반을 두고 있던 진골귀족세력을 크게 약화시키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진골귀족들은 문무왕의 왕권강화에 대하여 커다란 불만을 갖고 새로운 모색을 꾀하였다. 즉 진골귀족세력은 당시 太子妃의 父였던 金欽突을 중심으로 뭉쳐나갔는데, 이를 김흠돌세력이라고 부를 수 있다.

 김흠돌세력에는 김흠돌을 중심으로 金軍官·興元·眞功 등이 여기에 포함된다. 김흠돌의 경우 그의 활동은 문무왕대에 들어와서야 찾을 수 있다. 김흠돌은 문무왕의 즉위초부터 大幢의 장군으로 임명되어 고구려정벌에도 참여하는 등 군사적으로 크게 활동하였다. 이러한 김흠돌의 정치적 경력 가운데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지만 문무왕 5년(665)이후 太子妃로 그의 딸을 바치고 있다는 사실이다.

 김흠돌과 매우 밀접한 관련이 있는 김군관의 경우0139)李基白,<上大等考>(≪歷史學報≫19, 1962;앞의 책, 1974, 107쪽)에서는 김군관이 김흠돌에 대하여 그 지지자도 반대자도 아니었다고 한다. 그러나 신문왕이 김군관을 처형한 것이 귀족세력 전체에 대한 경고를 포함하고 있다는 이기백의 말을 따른다면, 그 역시 김흠돌세력에 포함시킬 수 있을 것 같다. 상당히 화려한 경력을 가지고 있다. 문무왕 원년부터 장군으로 활약한 이후 계속해서 군사적으로 활동하였는데, 그의 이러한 군사적 활동 가운데에서도 특히 주목되는 것은 당시 그가 병부령을 역임한 사실일 것이다.0140)김군관이 병부령에 임명된 시기는 자세히 알 수 없다. 眞珠가 제거된 문무왕 원년(661) 이후의 일일 것으로만 생각된다. 더욱이 그는 문무왕 20년(680)에는 최고의 관직인 상대등에까지 오른 인물이기도 하다. 흥원이나 진공의 경우는 문무왕 8년에서 11년 사이에 그들의 활동을 찾아볼 수 있다. 흥원은 문무왕 8년 罽衿幢摠管이 된 이후 군사적으로 활동하다가 10년 면직된 바 있는 인물이다. 진공의 경우 장군의 경력이 있는지 분명하지는 않지만 그 역시 당시 군사적으로 활동한 인물임을 확인할 수 있다.

 이와 같이 구체적으로 이름을 알 수 있는 김흠돌세력의 활동에서 드러나는 특징을 살펴본다면, 우선 이들이 문무왕대 활동한 대표적인 진골귀족이었다는 사실이다. 신문왕이 그의 敎書에서 이들의 정치적 출세가 이들의 재능 보다도 王恩으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언급한 사실에서나, 김군관의 경우 班序, 즉 문벌로0141)李基白, 앞의 책(1974), 96∼97쪽. 상대등이 될 수 있는 어떤 서열과 같은 것이라고 한다. 승진한 인물이라고 표현하고 있는 점에서 쉽게 그것을 확인할 수 있다. 따라서 이러한 사실은 김흠돌세력의 정치적 성격이 골품제적 신분질서에 의존하고 있는 진골귀족임을 잘 말하여 주고 있다고 하겠다.

 또한 이들이 삼국통일전쟁기에 군사적으로도 크게 활동한 인물이었다는 사실을 들 수 있다. 김흠돌·흥원·김군관 등이 모두 장군의 경력을 가진 인물이라든지, 김흠돌의 경우 6정의 가장 중요한 핵심부대인 대당의 장군을, 군관의 경우 장군 및 군사관계로 최고의 관직인 병부령을 역임한 사실에서 쉽게 살필 수 있다. 그러므로 이들 세력이 군사적으로도 당시에 일정한 비중을 차지하고 활동하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겠다. 요컨대 이들 세력은 문무왕대 정치와 군사상의 요직을 차지하고 있었던 진골귀족세력으로서, 문무왕과는 그 정치적 성격을 달리 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러한 김흠돌세력은 문무왕의 왕권강화에 커다란 위협요인으로 작용하는 세력이었다. 이는 김흠돌세력이 “능히 始終을 삼가하거나 富貴를 보전하지 않고 … 官僚를 모멸하고 上下를 속이어 매일 그 無厭의 뜻을 나타내고 포학한 마음을 드러내었다. 凶邪한 자를 불러들이고 近臣과 결탁하여 禍가 內外에 통하고 같은 惡人들이 서로 도와 期日을 約定한 후 亂逆을 행하려 하였다”0142)≪三國史記≫권 8, 新羅本紀 8, 신문왕 원년 8월.는 사실에서 쉽게 엿볼 수 있다. 이들 세력은 무엇보다도 문무왕의 가장 중요한 세력기반의 하나인 관료를 모멸한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김흠돌세력이 문무왕대의 관료세력과 충돌·대립하였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이 관료들이란 문무왕의 왕권에 기생하고 있었던 새로운 세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김흠돌세력은 관료들의 정치적 성장에 대하여 커다란 불만을 가졌으며, 그 결과 관료세력과 충돌·대립하는 등 무열왕계가 추진하는 전제정치의 확립을 방해하였던 것이다.0143)기존의 연구에서는 전제정치하에서 관료세력의 성장이 진골귀족세력과의 충돌 대립보다는 골품제와의 일정한 타협과 함께 이루어진 것으로 보고 있다(李基白,<新羅 骨品體制下의 儒敎的 政治理念>, 앞의 책, 1974, 230∼231쪽 및 李基東, 앞의 책, 142쪽). 때문에 중대의 관료제가 처음부터 기존의 신분체제인 골품제의 기반위에서 성립되어 그와 마찰되지 않는 한계내에서 운영 전개되었기 때문에 신라의 정치 사회에서 관료제가 순조롭게 발전할 수 없었을 것으로 짐작하고 있다. 더욱이 景德王의 개혁정치가 실패로 돌아가자 그나마 왕권에 기생하면서 발전하고 있던 관료제는 더 이상의 전개가 억제되고 말았다고 한다(李基東, 위의 책, 142쪽). 그렇지만 이러한 현상은 역시 관료세력이 진골귀족과의 일정한 충돌 대립과정을 거침으로서 나타난 것이 아닌가 한다. 왜냐하면 전제정치하의 관료세력의 성장이란 골품제적 신분질서에 입각한 진골귀족의 세력약화를 전제로 하는 것이었기에 골품제적 신분질서를 유지하려는 진골귀족세력과 왕권에 기생 발전하는 관료세력과의 충돌은 불가피하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문무왕은 김흠돌을 중심으로 하는 진골귀족세력의 정치적 활동을 크게 제약하는 등 이들을 소외시키고자 끊임없이 노력하였다. 우선 김흠돌의 경우 그의 女가 태자비로 들어간 후 오랫동안 아들이 없었다는 사실과 관련하여 살필 수 있다. 왜냐하면 중대 전제정치의 특징적인 현상으로 역대의 왕들에게서 왕위를 이을 아들을 얻고자 하는 노력이 강하게 나타나서, 심지어 아들을 낳지 못한 왕비를 出宮시키고 다른 왕비를 맞아들이기를 서슴치 않았던 점을 염두에 둔다면0144)李基白, 앞의 글(1982), 312쪽. 그것은 景德王의 예에서 확인이 된다고 한다. 그녀에게 아들이 없다는 점으로 인하여 태자비로서, 신문왕이 즉위한 이후에는 왕비로서의 지위가 매우 불안정하였을 것이기 때문이다.0145)이러한 사실로 말미암아 神文王에 의하여 왕비가 아들이 없다는 이유로 출궁되자 그것에 반발한 金欽突이 자기세력의 약화를 우려하여 난을 일으킨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李丙燾,≪韓國史≫古代篇, 645쪽·李基白, 앞의 책(1974), 106쪽, 및 井上秀雄, 앞의 책(1974), 455쪽 등). 그러나 金相鉉·辛鍾遠은 그보다는 父의 난에 연루되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金相鉉,<萬波息笛說話의 形成과 意義>,≪韓國史硏究≫34, 1981, 14쪽 및 辛鍾遠,<新羅 五臺山事蹟과 聖德王의 卽位背景>,≪崔永禧先生華甲紀念 韓國史學論叢≫, 1987, 103쪽). 설혹 그렇다고 하더라도 왕비가 사실상 출궁상태에 놓여 있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왕비의 無子는 매우 중요한 정치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하겠다. 그러므로 태자비의 無子란 바로 문무왕대 김흠돌의 정치적 위치에도 커다란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생각된다.

 흥원의 경우 비교적 분명하다. 문무왕 10년(636) 흥원이 참여한 전역에서 흥원 역시 일정한 공로를 거둔 것으로 파악됨에도 불구하고 일시 퇴각한 일로 그가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사형을 받을 뻔했다는 사실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이때 그는 사형은 받지 않았지만, 면직됨으로써 정치적 활동이 좌절되었을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 결과 흥원은 무열왕계에 반대하는 진골귀족으로서 김흠돌란에 가담하였던 것이다.

 군관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을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군관의 상대등 임명과 관련하여 살필 수 있다. 군관의 상대등 임명은 김유신이 사망한 문무왕 13년 이후 거의 7년이란 오랜 공백기간과 함께0146)上大等 金庾信이 죽은 문무왕 13년 7월 이후부터 20년 2월까지의 기간이다. 이루어진 임명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사실은 군관의 상대등 임명이 문벌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그의 상대등 임명이 오히려 오랫동안 저지되었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것으로 여겨진다. 더욱이 군관은 임명된 후 약 1년이 조금 지난 시기인 신문왕의 즉위와 함께 바로 내쫒겨졌다는 사실로 보아 그것은 충분히 짐작된다.

 군관이 물러난 후 상대등에 임명된 인물을 통해서 군관에 대한 무열왕계의 태도를 엿볼 수 있다. 신문왕의 즉위 직후 임명된 眞福은 문무왕대의 中侍 역임자로서, 중시 출신으로 상대등에 임명된 최초의 인물이기도 하다. 이러한 중시 출신의 상대등 임명은 전제정치의 성립 이후 빈번히 나타나는 현상으로, 그것은 상대등의 성격을 변화시키고자 하는 전제왕권의 정치적 목표에서 나온 것이라고 할 수 있다.0147)李基白, 위의 책, 104쪽에서 중대 상대등의 지위변화는 김유신의 상대등 임명에서 찾을 수 있다고 한다. 이러한 사실은 중시와 상대등을 이제까지의 대립관계에서 벗어나게 할 뿐만 아니라, 진골귀족의 성격을 귀족적인 것보다는 왕권에 복속하는 존재로서 관료화시키려는 의지로까지 해석되는 것이다.0148)李基白,<新羅 執事部의 成立>(≪震檀學報≫25·26·27합집, 1964 ; 위의 책, 169∼170쪽). 진복의 상대등 임명은 역시 군관을 정치적으로 소외시키려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으로, 군관이 문무왕과 신문왕에게 정치적으로 불만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고 하겠다.

 한편 문무왕의 왕권강화로 인하여 이처럼 정치적으로 소외된 진골귀족들도 나름대로의 새로운 모색을 꾀한 것이 아닐까 한다. 문무왕의 왕권강화에 대하여 불만이 있는 진골귀족세력은 일정한 구심점을 중심으로 뭉쳤던 것이다. 이때 태자비의 父로서 당시 대표적인 진골귀족이었던 김흠돌이 자연스러이 부각되었을 것이며, 김흠돌은 문무왕의 왕권강화와 함께 소외된 진골귀족세력을 상징하게 된 것으로 여겨진다. 그 결과 김흠돌을 중심으로 세력을 형성한 진골귀족들은 무열왕계의 왕권에 도전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진골귀족을 중심으로 하는 김흠돌세력과 무열왕계와의 충돌은 피할 수 없게 되었다. 이에 문무왕은 유조를 통하여 그의 뒤를 잇는 신문왕에게 자신의 정치개혁을 바탕으로 왕권을 더욱 강화시키라고 명령하게 되었다. 이러한 정치적 상황 속에서 김흠돌세력은 문무왕의 죽음과 신문왕의 즉위라는 정치적 전환기에 새로운 변화를 모색한 것으로 보인다.0149)한편 문무왕말 김흠돌세력이 어느 정도 세력을 회복한 것인지는 자세히 알 수 없다. 문무왕 10년 정치적으로 소외되었던 흥원의 관등이 김흠돌란 당시에 더 높아졌다든지, 오랫동안 저지되었던 군관의 상대등 임명이 20년 2월에 이루어지고 있다든지, 문무왕 19년(679) 8월 중시 天存의 사망 이후 신문왕 3년(683)에 이르기까지 중시가 임명되고 있지 않은 사실 등이 그것을 말해주기 때문이다. 또한 義相이 문무왕 20년 왕에게 王京의 城을 수축하지 말라고 諫하고 있는 것도 당시 진골귀족세력의 움직임과도 일정한 관련이 있지 않았을가 한다. 김흠돌세력은 문무왕의 사후 한층 강력히 추진될 것으로 보이는 신문왕의 왕권강화 움직임에 미리 대처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여기에 신문왕 즉위 직후 단행된 군관의 상대등 교체와 왕비의 無子出宮은 그것을 더욱 촉진시켜 주었던 것이 아닐까 한다. 이제 김흠돌을 중심으로 한 진골귀족세력이 세력회복을 노린 것이다. 그것이 바로 신문왕 원년(681) 8월 8일에 일어난 김흠돌란이었다. 문무왕이 7월 1일에 죽었으니 신문왕이 즉위한 지 1개월이 조금 지난 시기에 이 반란이 일어난 셈이다.0150)金欽突亂에 대하여는 金壽泰,<新羅 神文王代 專制王權의 확립과 金欽突亂>(≪新羅文化≫9, 1993)을 참고. 그러나 김흠돌세력의 이러한 움직임과 기대는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신문왕은 문무왕의 왕권강화와 함께 진골귀족세력을 소외시킴으로써 일어난 김흠돌란에 대하여 철저한 탄압을 가하였다. 신문왕의 교서는 김흠돌란이 발생한 이후 20여 일에 걸쳐서 행해진 신문왕의 수습과정을 자세히 말해주고 있다. 즉 “枝葉까지 샅샅이 찾아서 모두 이미 죽였다”라고 언급되어 있다. 주동자뿐만 아니라 말단의 가담자들까지도 이를 철저히 색출하여 살해하였음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신문왕은 이 기회를 통해서 왕권의 전제화를 반대하는 진골귀족세력을 철저히 탄압하려는 생각에서 그러한 과감한 피의 숙청을 단행한 것이었다.

 그러면 이때 진골귀족세력을 철저히 탄압할 수 있었던 신문왕의 勢力基盤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신문왕의 교서에서 股肱으로 표시되고 있는 사람들일 것이다. 그 고굉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살필 수 없으나, 그 대체적인 것은 파악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우선 무열왕계와 김유신계를 들 수 있다. 무열왕계의 경우 전제정치의 성립 이후 보다 왕권을 강화시켜 나가기 위하여 王弟나 王子와 같은 혈연적인 측근을 中侍 등 행정기구의 요직에 임명한 사실에서0151)李基白, 앞의 책(1974), 162∼164쪽.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김유신계의 경우 무열왕계와는 혼인을 통해서 밀접한 관련을 맺었을 뿐만이 아니라, 전제정치의 성립과정에서나 삼국통일전쟁에서 적극적으로 무열왕계를 도왔다는 사실에서 여기에 포함시킬 수 있겠다.0152)申瀅植,<新羅 中代 專制王權의 展開過程>(≪汕耘史學≫4, 1990; 앞의 책, 1990, 129∼130쪽). 이들이 신문왕대에 있어서 고굉이었다는 사실은 김흠돌란이 진압된 이후 신문왕 3년(683) 새로이 왕비를 맞아들임에 있어서 상당한 역할을 하고 있음에서도 확인된다. 여기에 언급되고 있는 인물들을 모두 살필 수는 없지만, 주도적인 역할을 한 사람이 무열왕계와 김유신계라는 것은 愷元이나 三光을 통하여 알 수 있다. 이들은 각기 김춘추과 김유신의 아들인 것이다.0153)개원과 무열왕과의 관계는 李基白,<新羅 執事部의 成立>, 앞의 책(1974), 162쪽를 참조할 것. 삼광과 김유신과의 관계는≪三國史記≫권 43, 列傳 3, 金庾信 下에서 알 수 있다. 한편 개원과 삼광과 함께 언급되는 文潁의 경우 당나라 장군 소정방이 대백제전에서 기일을 어겼다고 그를 斬하려고 했을 때 김유신이 목숨을 구해준 점에서(≪三國史記≫권 5, 新羅本紀 5, 태종무열왕 7년) 김유신과의 밀접한 관계를 짐작할 수 있다.
이 밖에 竹旨도 여기에 포함시킬 수 있을 것이다. 집사부의 설치 이후 최초로 중시에 임명된 죽지는 김유신과 함께 무열왕계에 계속 협력하였는데, 그는 신문왕대에까지 冢宰로 머물렀다고 한다(≪三國遺事≫권 2, 紀異 2, 孝昭王代 竹旨郞). 총재의 구체적인 것은 알 수 없지만, 당시 정치적 실권자의 한 사람임은 분명하다.

 한편 문무왕대 이후 계속 성장하고 있던 6두품 이하의 사람들로 구성된 관료세력들도 신문왕의 주된 세력기반 안에 포함시킬 수 있을 것이다. 관료들의 경우 문무왕이 왕권강화를 추진할 때 주된 세력기반이었을 뿐만 아니라0154)문무왕의 遺詔도 여기에 참조가 된다. 문무왕은 官員들로 하여금 태자인 神文王을 도와주라는 이야기를 남기고 있다. 이때 관원이란 관료들을 지칭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신문왕의 김흠돌란에 대한 철저한 탄압이 바로 왕권의 전제화를 반대하는 진골귀족세력으로부터 전제정치의 기반인 관료세력을 보호하기 위함이었다는 사실에서도 그것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문무왕대에 단행된 정치개혁을 바탕으로 집중적으로 강화된 무열왕계의 세력기반은 김흠돌란에 대하여 철저한 숙청을 가할 정도로 그만큼 확고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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