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9권 통일신라
  • Ⅱ. 전제왕권의 확립
  • 1. 무열왕계의 왕권확립
  • 3) 신문왕의 개혁정치

3) 신문왕의 개혁정치

 진골귀족세력에 대하여 대담한 숙청을 단행한 신문왕은 이후 전제정치를 뒷받침하는 정치 및 군사 등에 관한 제도정비에 더욱 박차를 가하였다. 신문왕은 전제정치를 제도적으로 뒷받침할 수 있는 일대 개혁정치를 실시함으로써 무열왕계의 전제정치를 확립한 것이다.

 우선 김흠돌란을 진압한 후 신문왕이 제일 먼저 단행한 조치는 바로 군사제도의 개편이었다. 이것은 문무왕대의 왕권강화가 진골귀족의 군사적 기반을 빼앗기 위한 점이라는 것을 고려할 때 쉽게 짐작된다고 하겠다. 그것은 侍衛府의 개편에서 알 수 있다. 신문왕은 김흠돌의 반란사건이 있은 직후인 신문왕 원년(681) 10월에 시위부를 개편하여 장군 6명을 두는 조치를 취하였다. 진평왕 46년(624)에 조직된 이후 진덕여왕 5년(651)의 개편을 거쳐서 이때 이와 같이 시위부를 개편한 데 대하여 귀족들의 위협으로부터 전제왕권을 보호하는 시위부대를 강화하고 그 격을 높이려는 뜻을 나타낸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0155)李基白, 앞의 글(1982), 340쪽. 그렇다면 신문왕은 시위부에 대한 개편을 통하여 그 기능을 확대하여 단순히 궁성시위에 그치지 않고, 진골귀족세력의 제거에 초점을 맞춘 것이 아닌가 한다.0156)李文基는 시위부 장군 6인의 설치는 시위부의 격상이나 강화의 의미와 더불어 신문왕 친위세력의 재편성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그 결과 명실상부한 국왕 측근 직속의 군사력으로 기능하게 되었다고 한다(李文基,<侍衛府의 成立과 性格>,≪歷史敎育論集≫9, 38쪽).

 신문왕의 군사제도에 대한 개편은 여기에 그치고 있지 않다. 중앙군사조직의 변화를 아울러 꾀하였다. 귀족적인 전통을 가지고 있는 6정에서 전제왕권을 옹호하는 9서당으로의 전환을 신문왕은 그의 당대에 그 대체적인 골격을 완성시켰다.0157)9서당은 孝昭王代 최종적으로 완성되지만 그 대체적인 골격이 신문왕대 만들어지므로 이와 같이 설명할 수 있다(李基白, 앞의 책, 1974, 340∼342쪽). 6정은 이미 문무왕대 많은 6정장군의 제거와 함께 그 기능을 상실하였는데, 眞平王代의 誓幢으로 출발하여 만들어지기 시작한 9서당은 문무왕대의 정비과정을 거쳐서 신문왕에 의하여 3년(683)·6년·7년 계속적으로 만들어져 완성되었던 것이다. 9서당은 이제 6정과는 달리 통일 이전의 귀족적 전통을 부인하는 것이며, 국왕에 직속된 부대로 만들어졌던 것이다.0158)李基白, 위의 책, 340쪽. 9誓幢의 성격에 대하여는 末松保和,<新羅幢停考>(≪新羅史の諸問題≫, 東洋文庫, 1954), 347∼359쪽 및 井上秀雄,<新羅兵制考>(앞의 책), 178∼186쪽이 또한 참조된다. 이러한 中央軍의 정비·완성은 김흠돌란을 통한 진골귀족세력의 제거라는 정치적 변화위에서 가능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한편 신문왕은 이러한 군사조직의 정비와 함께 진골귀족세력과 중요한 대립요인이 되었던 관료제도에 대하여도 개편을 단행하였다. 그것은 다음의 두가지 사실에서 알 수 있다. 김흠돌란을 진압한 다음해인 2년에 신문왕은 位和府의 令을 2인을 두어 선거의 사무를 맡게 하였으며, 이어 國學을 설치하고 거기에도 卿 1인을 둔 것이다.0159)≪三國史記≫권 8, 新羅本紀 8, 신문왕 2년 4월·6월 위화부는 관료의 선발과, 국학은 관료의 양성·배출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고 할 수 있다.0160)李基白,<新羅 骨品體制下의 儒敎的 政治理念>, 앞의 책(1974) 및 李基東, 앞의 책, 124쪽. 따라서 신문왕이 즉위한 후 가장 시급한 정치적 과제의 하나가 바로 관료제도의 확립과 관련이 있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이것은 신문왕이 왕권을 제약하려는 진골귀족들의 세력을 억제한 후 국왕을 중심으로 하여 새로이 관료제도를 편성하려는 방향으로 추진하였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즉 문무왕 이후 진골귀족세력과 관료세력의 계속적인 충돌은 관료를 제도적으로 양성·배출할 수 있는 장치를 필요로 하였던 것이며, 한편으로 신문왕은 이러한 관료의 양성을 통하여 왕권의 지지기반을 보다 확충시켜 나가고자 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러한 제도개편은 전제정치하에서 왕권의 전제화를 반대하는 진골귀족과 달리 관료라는 새로운 정치세력이 계속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 주었던 것이라고 하겠다. 이후 신문왕은 5년(685)에 이르러 제4관직인 舍知를 설치함으로써 5단계의 관직제도로 통일신라의 관직체계를 완성시키게 되었다.0161)李基白, 앞의 글(1982), 329∼330쪽. 그러나 李基東은 앞의 책, 122∼124쪽에서 중앙 행정관서의 정비가 신문왕 6년에 이르러 例作部의 설치를 마지막으로 하여 唐의 6典組織에 준하는 행정체계가 정비된다고 보고 있다.

 한편 군사제도와 관료제도에 대한 개편을 통하여 정치세력의 변화와 정치적 기반을 확대하고자 한 신문왕은 그의 혼인을 통하여서도 그러한 목표를 달성하고자 하였다. 신문왕은 오랫동안 아들이 없었던 김흠돌의 女를 출궁시킨 후 새로이 神穆王后와 혼인을 하였는데, 그것이 바로 王族 金氏의 族內婚이라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신라 중대에 있어서 일반적으로 왕족 김씨의 족내혼이 지적되고 있는데,0162)李基白, 앞의 책(1974), 310∼311쪽. 그러나 중대의 왕실혼인에 대하여는 새로운 고찰이 필요하다. 朴氏王妃가 찾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孝成王이 그의 姨母와 혼인하고 있는 점에서 그것을 확인할 수 있다.0163)金壽泰,<新羅 聖德王·孝成王代 金順元의 政治的 活動>(≪東亞硏究≫3, 1983), 209쪽. 신문왕은 중대에 들어와서 처음으로 족내혼을 한 왕이라는 점에서 특히 그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여러 명의 부인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무열왕의 경우에도 족내혼은 아니었다. 문무왕의 경우 왕비가 김씨로 나오고 있지만 성은 같은 김씨라고 하여도 족내혼은 아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0164)≪三國史記≫권 6, 新羅本紀 6, 문무왕 즉위년. 李基白의 경우 족내혼으로 파악하지만(李基白, 앞의 책, 1974, 310쪽), 대표적 진골귀족인 김흠돌의 女가 태자인 신문왕과 혼인을 하고 나중에는 반란까지 일으키는 것을 볼 때 姓氏만 가지고서 족내혼이라고 말할 수 없다. 孝成王의 경우에도 어머니가 죽은 뒤에야 당시의 정치적인 상황으로 말미암아 족내혼을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신문왕은 김흠돌의 女가 출궁된 이후 무열왕의 사위였던 金欽運0165)≪三國史記≫권 47, 列傳 7, 金欽運.의 딸과 혼인을 하는 것으로 보아 이것은 족내혼이라고 말할 수 있다. 신문왕이 이와 같이 족내혼을 한 것은 왕족 김씨가 진골귀족세력의 영향으로부터 벗어나 권력을 배타적으로 독점하고자 한 정치적인 동기에서 비롯된 것이었다.0166)李基白, 앞의 책(1974), 311쪽. 이러한 일련의 작업을 통하여 신문왕은 중앙에서 정치적인 안정을 도모할 수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신문왕은 중앙뿐만이 아니라 이제 지방세력의 통제에 대한 관심도 아울러 가지게 되었다. 이것은 당시 지방에서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하고 있던 고구려 遺民세력에 대한 관심에서 살펴볼 수 있다. 예컨대 安勝의 경우를 들 수 있다. 신문왕은 족내혼을 실시한 3년(683) 10월에 지방에 있는 안승을 진골귀족으로 편입시켜 王京으로 올라와 살게 하고 金氏의 姓을 주었다.0167)≪三國史記≫권 8, 新羅本紀 8, 신문왕 3년 10월. 안승을 왕경으로 부른 것은 신문왕이 안승을 왕경에 묶어두고자 한 정치적인 의도가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이때 고구려세력은 이러한 신문왕의 정책에 반발하여 마침내 반란을 일으켰다.0168)≪三國史記≫권 8, 新羅本紀 8, 신문왕 4년 11월. 李基白, 앞의 책(1974), 316쪽 및 盧鏞弼,<普德의 思想과 活動>(≪韓國上古史學報≫2, 1989), 138쪽 참조. 그러나 신문왕은 이 반란을 성공적으로 진압하였으며, 또한 그 다음해에 계속해서 지방제도의 개편을 단행하여 5년(685)에 이르기까지 9州 5小京을 정비해 나가면서 중앙집권적인 지방통치체제를 마련하였다.0169)李基白, 앞의 글(1974), 331∼339쪽을 참조.

 한편 이와 같이 정치적인 안정과 함께 지방세력에 대한 통제를 가능하게 된 신문왕은 토지제도의 개편을 마침내 단행한 것으로 보인다.0170)李喜寬,<新羅의 祿邑>(≪韓國上古史學報≫3, 1990), 130쪽. 이것은 신문왕의 정치개혁의 마무리라고 할 수 있는데, 토지제도의 개편이 단행된 배경에 대하여 보다 새로이 이해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즉 전제정치의 성립 이후 진행된 관료세력의 성장과 관련해서이다. 전제왕권은 새로이 성장한 정치세력으로서의 관료들의 생계를 보장하기 위한 또 다른 새로운 경제제도가 필요하게 된 것이다. 특히 김흠돌란의 진압과 함께 진골귀족세력이 상당히 약화되며 관료세력이 계속적으로 성장해 나가는 정치세력의 커다란 변화는 토지제도의 개편을 필요로 하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은 문무왕대 활동한 强首를 통하여 알 수 있다. 경제적으로 어려웠던 강수의 경우 무열왕과 문무왕의 총애를 받고 삼국통일전쟁에서 문장을 통하여 외교적으로 커다란 공을 세웠음에도 불구하고 祿邑은 받지 못하고 무열왕대에는 歲租 100석, 그리고 문무왕대에는 200석을 지급받는데 그치고 있었다.0171)≪三國史記≫권 46, 列傳 6, 强首. 따라서 이러한 관료들에 대한 경제적 대우는 관료들에게는 매우 불만스러운 것일 수밖에 없었다.0172)李基白은<强首와 그의 思想>(≪文化批評≫3, 1969; 앞의 책, 1986, 219쪽)에서 강수의 경제적 기반이 매우 불안정하였음을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까닭에 무열왕계는 6두품 이하의 관료들에 대한 새로운 대책이 필요했을 것이다. 따라서 무열왕계의 전제정치를 지지하고 그들의 왕권강화에 협조한 6두품 이하의 관료들에 대한 문무왕과 신문왕의 관심은 결국 토지제도의 개편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었던 것이 아닌가 한다.

 이러한 배경속에서 나온 것이 바로 신문왕 7년(687)에 실시한 文武官僚田이라 생각된다. 문무관에게 토지를 차등있게 주었던 것이다.0173)≪三國史記≫권 8, 新羅本紀 8, 신문왕 7년 5월. 이것은 신문왕의 주된 세력기반의 하나인 문무관료들에게도 새로이 토지를 준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0174)金哲埈,<新羅 貴族勢力의 基盤>(≪人文科學≫7, 1962;≪韓國古代社會硏究≫, 知識産業社, 1975, 233∼234쪽). 또한 지금까지의 기준인 신분을 통해서가 아니라 이제 관직을 기준으로 하여 새로이 토지를 지급하겠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토지제도의 개편은 이제 6두품 이하의 관료들로 하여금 토지를 받게 하고 그들의 경제적 처우도 한층 나아지게 한 것이 아닌가 한다.

 나아가 이러한 새로운 토지제도의 시행은 진골귀족들의 경제적인 기반에도 일정한 변화를 동시에 초래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2년 후인 9년에 녹읍의 혁파로 나타났다. 진골귀족의 주된 경제적 기반이었던 녹읍의 혁파는 바로 진골귀족의 경제적 기반을 약화시키려는 신문왕의 의도와 일정한 관련이 있었다.0175)李基白, 앞의 글(1982), 344∼346쪽. 이것은 녹읍을 혁파하고 관료전을 이들 진골귀족에까지 새로이 확대실시하여 녹읍을 관료전의 체계내에 포함시키려 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녹읍의 혁파는 관료전의 실시와 그것의 제도적 완비를 위한 보완적인 제도개편으로 생각된다. 즉 녹읍과 세조의 제도에서 이제 관료전과 세조의 제도로 전환됨을 나타내주는 것이다.0176)李喜寬, 앞의 글, 121쪽. 기존의 연구에서는 식읍과 녹읍에서 관료전과 세조로 바뀐 것으로 말하고 있다.

 따라서 이러한 일련의 정책은 진골귀족의 경제적인 기반에 대한 커다란 변화를 의미하는 것이다. 귀족적이고 세습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던 토지제도를 이제 관직만을 기준으로 하여 관직에서 물러나면 일단 회수하는 제도로 바꾸었다는 것은 국가의 토지에 대한 지배가 보다 강력해짐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신문왕대 정치개혁의 마무리 작업으로서 단행된 경제제도의 변화는 역시 무열왕계의 집권, 특히 문무왕대 이후 계속적으로 이루어진 정치세력의 변화와 결코 무관한 것은 아니었으며, 그러한 변화가 마침내 토지제도의 변화에까지 영향을 미쳤다고 말할 수 있겠다.0177)李喜寬,<統一新羅時代 官僚田의 支給과 經營>(≪新羅 産業經濟의 新硏究≫, 書景文化社, 1992) 참조. 신문왕은 이와 같은 집중적인 정치개혁의 단행을 통하여 왕권의 전제화를 반대하는 진골귀족을 억압하고 비로소 專制王權을 확립시킬 수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한편 신문왕은 이러한 개혁을 발판으로 하여 9년(689) 수도를 大邱로 옮기려고까지 하였다.0178)≪三國史記≫권 8, 新羅本紀 8. 신문왕 9년 9월. 그러나 신문왕의 遷都計劃은 그대로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그것은 아직도 무너지지 않은 진골귀족세력이 상당히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다.0179)李基白, 앞의 책(1974), 331쪽. 이러한 정치적 상황은 신문왕의 사후 孝昭王代의 정치적 혼란을 낳는 커다란 계기가 되었다.0180)金壽泰,<新羅 孝昭王代 眞骨貴族의 동향>(≪國史館論叢≫24, 1991). 그러나 그와 같은 정치적 어려움을 극복한 무열왕계는 聖德王 때에 이르러 신라의 전제정치는 그 극성기를 구가하며, 그 기반 위에 “이 피리를 불면 군사는 물러나고, 병은 낫고, 가뭄에는 비가 오고, 오던 비는 개고, 바람은 가라앉고, 물결은 평온해진다.”0181)≪三國遺事≫권 1, 紀異 2, 萬波息笛.는 위력을 가졌다는 萬波息笛으로서 상징되는 평화를 누리게 되었다.

<金壽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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