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9권 통일신라
  • Ⅱ. 전제왕권의 확립
  • 2. 전제왕권과 귀족

2. 전제왕권과 귀족

 집중적인 정치개혁의 단행을 통하여 專制王權을 확립시킬 수 있었던 神文王의 끈질긴 노력에도 불구하고 왕권의 전제화를 반대하는 眞骨貴族의 세력은 상당히 뿌리깊은 것이었다. 신문왕대 모든 개혁이 거의 마무리 되어가던 시기인 신문왕 말년인 9년(689)에 遷都를 계획하였다. 신문왕의 천도계획은 결국 진골귀족의 본거지인 王京 慶州를 벗어나려고 하는 전제주의적 정책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러나 그 천도계획은 실천에 옮겨지지 못하였다. 그것은 필시 진골귀족의 반발에 부딪친 때문으로 생각된다.0182)李基白,<統一新羅와 渤海의 社會>(≪韓國史講座≫古代篇, 一潮閣, 1982), 331쪽.

 신문왕대 확립된 무열왕계의 전제왕권에 대항하는 진골귀족의 움직임은 孝昭王대에 들어오면 구체적으로 나타나고 있다.0183)효소왕대의 정치에 대하여는 다음의 글이 참고된다.
文明大,<新羅 法相宗(瑜伽宗)의 成立問題와 그 美術> 上·下(≪歷史學報≫62·63, 1974).
金英美,<統一新羅時代 阿彌陀信仰의 歷史的 性格>(≪韓國史硏究≫50·51합집, 1985).
辛鍾遠,<新羅 五臺山事蹟과 聖德王의 卽位背景>(≪崔永禧先生華甲紀念 韓國史學論叢≫, 探求堂, 1987).
金壽泰,<新羅 孝昭王代 眞骨貴族의 動向>(≪國史館論叢≫24, 國史編纂委員會, 1991).
효소왕이 즉위한 직후 나타난 정치적 상황을 통하여 살필 수 있다. 효소왕은 6세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올랐는데, 母后가 섭정하는 등 스스로에 의한 정상적인 왕위수행은 어려웠을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정치적 상황속에서 신문왕의 전제정치에 크게 위축되었던 진골귀족의 불만이 비로소 표출되었던 것이다. 國仙의 실종, 萬波息笛 및 玄琴의 분실과 彗星의 빈번한 출현 등 왕권의 전제화를 반대하는 진골귀족의 정치적인 움직임으로 생각되는 일련의 사건들이 계속해서 일어났다. 그 결과 전제정치가 계속 유지 발전해 나가기를 바랐던 신문왕의 바람과는 달리 진골귀족세력에 의하여 전제왕권이 흔들리는 등 불안한 정치상황이 전개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효소왕은 그를 뒷받침해주는 일정한 정치세력의 협조아래 왕위를 수행해 나갈 수 있었다.0184)母后인 神穆王后를 중심으로, 모후의 入宮에 관련된 무열왕계와 김유신계가 여기에 포함된다. 이러한 까닭에 효소왕과 그를 지지하는 세력은 전제왕권의 안정과 그들의 세력유지를 위하여 일정한 노력이 필요하였다. 그것은 효소왕대 執事部와 近侍機構를0185)李基東,<新羅 中代의 官僚制와 骨品制>(≪震檀學報≫50, 1980;≪新羅 骨品制社會와 花郞徒≫, 一潮閣, 1980, 138∼141쪽). 중심으로 실시된 개혁정치를 통하여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자세한 것은 살필 수 없지만, 외교적인 것과 사상적인 측면을 통하여 대체적인 모습을 파악할 수 있다. 우선 외교적인 측면에서 검토해 본다면 그것은 唐과의 관계라고 할 수 있다. 이 시기에 들어오면 신라의 對唐관계에 커다란 변화가 나타나고 있다. 신라는 대당전쟁 이후 중국과 사실상 외교관계가 단절된 상태였다.0186)申瀅植,<羅唐間의 朝貢에 대하여>(≪歷史敎育≫10, 1967;≪三國史記硏究≫, 一潮閣, 1981, 247∼248쪽).
―――,<統一新羅의 對外關係>(≪韓國古代史의 新硏究≫, 一潮閣, 1984), 327쪽.
장기간의 대립이 지난 신문왕의 즉위 이후에 들어오면 비로소 양국간에는 국교재개의 기운이 일어나게 되었다. 그러나 신라의 당에 대한 외교관계의 개선노력이 보다 구체화된 것은 바로 효소왕대에 들어와서가 아닐까 한다. 이러한 사실은 효소왕 8년(699)에 이루어진 당에 대한 朝貢의 재개에서 분명히 알 수 있다. 따라서 효소왕대에 들어오면 대당관계의 실질적인 회복이 이루어졌다고 말할 수 있다. 효소왕에 의하여 적극적으로 추진된 대당관계의 개선노력은 당과의 관련속에서 중국의 문물·제도를 흡수하여 자신의 왕권을 강화하려는 무열왕계의 정치적인 목표와 연결되어 있었다.

 사상적인 측면에서 주목해 본다면, 효소왕대 이루어진 法相宗의 수용문제를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신문왕을 비롯하여 효소왕대에 이르기까지 국왕을 중심으로 왕족과 6두품 같은 하급귀족이 법상종에 커다란 관심을 가졌다고 말할 수 있다. 이때 中代 전제왕권이 법상종에 관심을 가진 이유는 법상종의 사회적 성격을 고려할 때0187)金杜珍,<高麗初의 法相宗과 그 思想>(≪韓㳓劤博士停年紀念 史學論叢≫, 知識産業社, 1981;≪均如華嚴思想硏究≫, 一潮閣, 1981, 111쪽). 역시 왕권의 전제화를 반대하는 진골귀족에 대신하여 그 밑의 신분층인 6두품 같은 세력과 연관을 맺으며 왕권강화를 추진하려는 정치적 의도가 내포되어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므로 효소왕대 법상종의 수용은 중대 전제왕권의 사상적 기반이었던 華嚴宗과는 다른 측면에서 전제왕권의 강화에 기여하였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효소왕을 중심으로 한 왕당파세력에 의하여 실시된 왕권강화의 노력은 과연 성공을 거두었던 것일까. 왜냐하면 효소왕 즉위초에 나타났던 진골귀족들의 전제왕권에 대한 반발에서 볼 수 있듯이 왕권의 전제화를 반대하는 진골귀족세력의 행방이 궁금하기 때문이다. 즉위초부터 지속적으로 추진된 것으로 보이는 효소왕의 개혁정치에 대한 진골귀족들의 반발은 기록에 자세히 나타나고 있지 않다. 그러나 효소왕 9년(700)에 이찬 慶永에 의하여 謀叛事件이 일어났다는 사실에서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0188)慶永의 모반사건이 일어난 배경 및 성격 등에 대하여는 金壽泰, 앞의 글, 111쪽이 참고된다. 즉 진골귀족의 움직임은 효소왕말에 집중적으로 나타나고 있는데, 王黨派勢力과 왕권의 전제화를 반대하는 진골귀족세력은 이제 군사적인 대립·충돌을 벌이게 된 것이다.

 이때 이찬 경영의 난이 실패하고, 집사부 중시였던 金順元이 연루되어 파면당하였다는 사실은 왕당파와 왕권의 전제화를 반대하는 진골귀족세력과의 대립속에서 왕당파세력이 승리를 거두지 못하였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것은 경영의 난이 실패한 한달 뒤에 효소왕의 배후세력으로 그 당시까지 섭정하였을 것으로 생각되는 모후인 神穆王后의 죽음이 갑자기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에서 엿볼 수 있다. 또한 金庾信系를 비롯하여 효소왕의 세력기반에 속하던 여러 인물들의 정치적인 몰락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왕당파의 몰락은 이들 세력에 대신하여 진골귀족세력이 새로이 대두하는 세력교체의 현상을 나타나게 하였다. 따라서 효소왕대에 들어오면 신문왕에 의하여 확립된 전제왕권에 일단 제동이 걸리는 모습을 볼 수 있다고 하겠다.

 나아가 이러한 세력교체는 그 이후 효소왕의 죽음과 聖德王의 卽位過程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던 것으로 보인다. 효소왕의 죽음은 경영의 난이 실패한 2년 후에 갑자기 나타나고 있는데, 당시의 정치적 상황변화에 크게 영향을 받았음이 틀림없다. 이제 진골귀족세력은 효소왕이 죽은 이후의 王位繼承에 대하여 커다란 발언권을 가지게 되었다. 그것은 성덕왕의 즉위과정을 통하여 살필 수 있다. 성덕왕은 太子로서가 아니고 國人, 즉 진골귀족의 추대를 통하여 즉위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0189)金壽泰, 앞의 글, 114∼118쪽. 이때 성덕왕을 추대한 진골귀족세력은 성덕왕의 첫째 왕비인 嚴貞王后로서 상징된다고 여겨진다.

 효소왕의 弟로 왕위에 오른 성덕왕은 즉위초 일정기간 동안 왕권의 전제화를 반대하는 진골귀족세력의 영향을 크게 받게 되었다.0190)聖德王代의 정치를 이해하는 데는 다음의 연구가 참고된다.
李昊榮,<新羅 中代王室과 奉德寺>(≪史學志≫8, 檀國大, 1974).
濱田耕策,<新羅 聖德王代の政治と外交>(≪朝鮮歷史論集≫上, 龍溪書舍, 1979).
―――,<新羅 聖德大王神鐘と中代の王室>(≪呴沫集≫3, 1980).
金壽泰,<新羅 聖德王·孝成王代 金順元의 政治的 活動>(≪東亞硏究≫3, 西江大, 1983).
金英美,<統一新羅 阿彌陀信仰의 歷史的 性格>(≪韓國史硏究≫50·51합집, 1985).
―――,<聖德王代 專制王權에 대한 一考察>(≪梨大史苑≫22·23합집, 1988).
辛鍾遠,<新羅五臺山事蹟과 聖德王의 卽位背景>(≪崔永禧先生華甲紀念 韓國史學論叢≫, 1987).
申瀅植,<新羅 中代 專制王權의 展開過程>(≪汕耘史學≫4, 1990;≪統一新羅史硏究≫, 三英社, 1990).
이에 성덕왕은 父王인 신문왕대와 마찬가지로 왕권을 강화시켜 나가려고 했던 것 같다. 그는 즉위한 지 얼마 안되는 시기인 5년 후 신문왕을 위하여 皇福寺塔을 건립하고, 또한 계속해서 성덕왕 6년(707)에 중대 첫번째 왕인 무열왕을 위하여 奉德寺를 만들기 시작하였다. 중대 전제왕권을 성립시키고 확립시킨 국왕들에 대한 그의 관심은 바로 전제왕권과 관련되는 것으로 생각된다.0191)李昊榮은 성덕왕이 태종무열왕을 내세워 그의 정통성을 인식시키고 또한 전제왕권을 더욱 강화시켜 보려는 의도가 있었던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李昊榮, 앞의 글, 7쪽).

 이와 같이 왕권강화를 꾸준히 추구하고자 한 성덕왕의 태도는 여러 측면에서 엿볼 수 있다. 성덕왕은 10년에 들어와서 百官箴을 지어서 군신에게 제시하였다고 한다. 기록에 그 내용이 전하고 있지 않으나 필시 전제왕권하의 人臣으로서 받들어야 할 戒名을 적은 것임이 분명하다.0192)李基白, 앞의 책(1982), 310쪽. 그렇다면 이것은 성덕왕의 즉위 이후 왕권을 여러 가지 측면에서 제약하였을 진골귀족세력에 대한 경고가 표현되었던 것으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한편 성덕왕의 왕권강화란 사상적인 측면에서도 파악이 된다. 우선 성덕왕의 불교에 대한 관심에서 살펴볼 수 있다. 중대에서 佛敎式 王名을 가진 유일한 왕이었던 성덕왕은 華嚴宗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성덕왕의 왕권강화란 유교와도 깊은 관련이 있었다. 그것은 유교교육기관에 대한 그의 관심이나, 유교의 권위를 위하여 孔子의 권위를 끌어들인 것 등에서 주목할 수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성덕왕의 왕권강화를 위한 노력은 외교정책을 통하여 분명히 살펴볼 수 있다. 성덕왕대는 외교의 시대로 불릴 정도로 빈번히 당나라에 사신을 파견하였는데, 13년(714) 通文博士을 설치하였다. 통문박사란 바로 대당외교의 文書를 전담하는 기관이라고 할 수 있다.0193)濱田耕策은 성덕왕대 이와 같이 대당외교가 강화되었음을 외교기관의 개편에서 찾고 있다(濱田耕策, 앞의 글, 221∼227쪽). 이 결과 대당외교가 보다 활발해지는데, 성덕왕의 재위 36년간에 행해진 약 43회의 대당사신파견은 신라 전기간의 약 1/3에 달하는 것이다.0194)대당교섭이 시작된 眞平王 43년(621)부터 敬順王 9년(935)까지의 315년간에 약 150회의 사신이 파견되었다고 한다(申瀅植, 앞의 글, 1967, 247쪽). 성덕왕의 이러한 對唐外交는 무열왕계의 기본적인 대외정책으로 그들의 왕권강화라는 정치적 목표와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성덕왕이 행한 왕권강화의 노력은 당시 그의 움직임으로 보아 일정한 王黨派勢力의 지지와 협력을 받았을 것으로 보인다. 특히 성덕왕은 그의 왕권강화작업에 孝昭王代의 정치에 참여하였다가 몰락하여 소외당하고 있던 인물들에게 커다란 관심을 갖고 중용했다. 즉위초 이래 그의 왕권을 제약하던 진골귀족세력의 영향을 벗어나기 위하여 선택한 방법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에 이들 소외세력은 성덕왕의 등장과 함께 재등용되어 성덕왕의 왕권강화에 협력하며 세력을 떨치게 되었다. 이들 세력은 성덕왕의 後妃로 딸을 바친 金順元으로 대표되었을 것으로 보인다.0195)김순원에 대하여는 지금까지 주로 효성왕대 외척세력의 움직임과 관련하여 간단한 언급이 있을 뿐이다. 그 구체적인 분석은 김수태, 앞의 글(1991)을 참고.

 성덕왕의 즉위초부터 나타난 성덕왕과 왕당파의 이러한 활동은 이 당시의 정치에 상당한 변화를 낳는 요소가 되었다. 정치적으로 소외당하여 오다가 성덕왕을 도와 활동하기 시작한 이들 왕당파세력은 성덕왕의 왕권강화과정에서 점차 세력이 증대되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와는 달리 嚴貞王后로서 상징되며 성덕왕의 왕권을 제약하던 진골귀족세력은 상대적으로 크게 위축되었을 것임은 틀림이 없다. 그러므로 이러한 두 세력의 대립 충돌은 필연적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두 세력의 대립 충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 바로 성덕왕의 첫째 왕비인 엄정왕후의 出宮事件이다.

 성덕왕 10년(711) 이후 집중적으로 진행된 성덕왕과 왕당파의 활동으로 당시 점차 열세에 몰리고 있던 진골귀족세력은 성덕왕 14년 엄정왕후의 아들인 重慶이 太子로 책봉되는 것을 계기로 그들의 힘을 다시 회복하려고 기도한 것이 아닐까 한다. 이들 두 세력은 태자책봉을 계기로 하여 심각하게 대립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 상당히 왕권을 강화시키고 있던 성덕왕과 왕당파세력은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것은 진골귀족세력이 실패·좌절되었음을 엄정왕후의 출궁이라는 정치적 사건이 나타내주고 있기 때문이다. 엄정왕후가 출궁당하자 이들 진골귀족세력은 자연히 몰락하게 되고 왕당파세력과의 완전한 교체가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0196)이 무렵에 이루어진 세력교체에 대하여 濱田耕策은 외교문제를 통하여 살펴보고 있다. 그는 당시 대당외교를 강화시키려는 세력과 대일외교에서 종래의 관계를 유지시키려는 세력의 대립이 있었다고 한다. 이들 세력은 서로 대립하다가 대당외교를 중시한 思恭이 上大等이 되는 27년(728)에 교체되었다고 한다(濱田耕策, 앞의 글, 225∼227쪽). 그러나 신라 중대에 있어서 대일외교의 비중을 그와 같이 중요하게 볼 수는 없을 것 같다.

 이러한 세력교체는 이후 받아들여진 새로운 왕비의 入宮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성덕왕은 19년에 가서 새로이 왕비를 맞아들이고 있는데, 바로 왕당파세력으로 중시출신인 金順元의 딸이었다. 이 사건은 왕당파로 하여금 더욱 세력을 떨칠 수 있게 해준 것이 아닐까 한다. 3년 후 김순원의 딸에게서 난 아들을 3세의 어린 나이로 太子로 책봉하여 성덕왕은 자기의 즉위과정과는 달리 왕위계승에 있어서 발생할 수 있는 문제를 일찍부터 없애려고 하였다.0197)申瀅植은 성덕왕 23년 김순원의 女인 炤德王后의 사망 이후에는 김순원의 세력이 允忠에 의하여 견제받았으리라고 보고 있다(申瀅植, 앞의 책, 1990, 135쪽). 그러나 聖德王代의 왕당파세력이 그와 같이 분열되었다고 보기는 힘들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이후 丁田을 실시하고,0198)李基東은 성덕왕초 20여 년간에 일어난 장기간의 재해와 관련하여 그 이전에 실시된 임시방편의 수습책과는 달리 정전 지급을 통하여 백성에 대한 보다 근본적인 구제시책을 편 것이라 하고 있다(李基東,<新羅 下代의 王位繼承과 政治變動>,≪歷史學報≫85, 1980 ; 앞의 책, 1980, 149쪽). 사실 이후 재해에 대한 기록이 거의 나타나고 있지 않다. 자기 주위의 핵심인물들을 將軍으로 임명한다든지, 또한 浿江 이남 지역의 획득 등을 통하여 정치적·사회적 안정을 꾀하고자 하였다. 그 결과 성덕왕은 이제 전제왕권의 극성기를 구가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한다.0199)金英美는 성덕왕대가 중대의 극성기로 일컬어질 만큼의 성과를 거두게 된 사실은 성덕왕대 성행했던 阿彌陀信仰에서도 잘 나타난다고 한다(金英美, 앞의 글, 1985, 70쪽 및 앞의 글, 1988, 390∼392쪽).

 孝成王은 성덕왕이 마련해 놓은 신라의 극성기라고 일컬어지는 정치적 안정을 바탕으로 즉위하였다. 그러나 효성왕대는 6년이란 그의 짧은 재위기간동안 정치적 혼란이 끊이지 않았던 시기라고 할 수 있다.0200)孝成王代의 정치를 이해하는 데에는 다음의 연구가 참고된다.
井上秀雄,<新羅政治體制の變遷過程>(≪古代史講座≫4, 1962;≪新羅史基礎硏究≫, 東出版, 1974).
李昊榮,<新羅 中代王室과 奉德寺>(≪史學志≫8, 1974).
濱田耕策, 앞의 글(1980).
金壽泰, 앞의 글(1983).
이 혼란은 효성왕이 朴氏王妃와 혼인함으로써 일어난 것이었다. 사실 신라 中代에서의 박씨세력이란 上代와는 다른 것으로, 진골귀족의 세력약화라는 중대 전제왕권의 정책으로 말미암아 상당히 위축된 형편이었다.0201)李基白, 앞의 책, 310∼311쪽 및 314∼315쪽. 이러한 상황 속에서 효성왕의 첫째 왕비로 박씨왕비가 등장하였다는 사실은 중대에 있어서 매우 이례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박씨왕비의 재등장은 한편으로 성덕왕의 전제왕권의 강화로 크게 위축되었던 다른 진골귀족세력에게도 커다란 영향력을 미쳤을 것임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효성왕의 즉위 이후 왕비 박씨의 입궁으로 인하여 상당한 정치적 문제가 야기되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효성왕이 왜 이러한 혼인을 하였는지 그 이유는 자세히 알 수 없다. 그렇지만 효성왕 즉위초의 정치적 상황을 통하여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김순원의 딸이 왕비로 들어온 성덕왕 19년(720) 이후 왕권강화에 관련하여 참여한 성덕왕의 측근인물들, 즉 왕당파의 사람들이 효성왕대에 들어와서도 계속적으로 정치의 실권을 장악하였다. 따라서 효성왕은 母后와 관계된 이들 세력이 너무 강대하여 그 당시의 정치를 주도하는 등 자신의 왕권을 제약하는 한 요소로까지 성장한 데에 대한 정치적 불만을 가졌던 것은 아닐까 한다.0202)李基白은 김순원과 같이 중시를 통하여 성장한 신귀족세력은 점차 왕권에 제약을 가하는 요소로까지 발전해갔던 것으로 미루어진다고 한다(李基白,<新羅 執事部의 成立>,≪震檀學報≫25·26·27합집, 1964;≪新羅政治社會史硏究≫, 1974, 一潮閣, 168∼169쪽). 때문에 효성왕은 성덕왕 후기부터 세력을 떨치고 있던 왕실측근세력에 대신하여 이제 새로운 세력인 朴氏勢力에 관심을 갖고, 또한 박씨세력의 딸과 혼인을 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현상은 성덕왕 이래 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王黨派들에게 크게 불리하게 작용하게 되었다. 이와 같이 형성된 불만세력은 효성왕을 중심으로 해서 일어난 일련의 움직임에 대항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들의 움직임은 효성왕 3년(739)에 집중적으로 나타나고 있는데 상당히 긴박하게 움직여 갔던 것 같다. 그것은 信忠의 中侍 임명, 김순원 딸의 입궁, 憲英의 태자책봉 등을 통하여 엿볼 수 있다. 효성왕초 박씨세력의 활동과 함께 일시 열세에 놓였던 외척 김순원의 세력은 신충의 중시 임명과 함께 효성왕으로 하여금 새로이 그의 딸을 맞아들이게 하여 박씨왕비를 중심으로 일어난 일련의 상황에 대처하고자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신충이 중시에 임명된 2개월 후 김순원의 딸이 성덕왕대에 이어 다시 왕비로 책봉되고 있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다. 김순원은 이제 성덕왕·효성왕의 父子 兩代에 걸쳐서 이중적인 혼인을 맺은 셈이다. 또한 이때 효성왕의 혼인은 姨母와 혼인하는 전형적인 族內婚이라고 할 수 있다.0203)신문왕대 이후 다시 확인이 되는 왕실 족내혼이다. 따라서 김순원의 세력은 그의 딸을 왕비로 들임과 동시에 당시의 정치정세에 더욱 밀접히 개입하게 되었을 것이다.

 이와 같이 효성왕 3년 김순원의 세력을 중심으로 변화가 생김으로써 이들은 곧 박씨왕비세력을 비롯한 진골귀족세력과 대립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것은 효성왕 3년 3월 김순원의 딸이 왕비로 들어오는 정치정세 속에서 이후 憲英의 비정상적인 태자책봉이 이루어지고 있었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다. 이미 헌영이 태자로 나아가는 데에는 상당한 물의가 있었을 것으로 지적되고 있지만,0204)李昊榮, 앞의 글, 10∼11쪽. 효성왕으로 하여금 김순원의 딸을 새로이 왕비로 맞이하게 했음에도 불구하고, 왕이 첫째 왕비인 박씨왕비를 계속 가까이하자 이들 세력은 마침내 왕위계승에까지 개입하였던 것이다. 즉 김순원의 딸에서 태어난 王弟 헌영의 太子책봉을 통하여 지위를 보다 확고히 하려고 하였던 것이다.

 효성왕 3년(739)에 일어난 정치적 변화 속에서 김순원과 관계된 세력의 승리는 헌영의 태자책봉 이후 약간의 반발을 받기는 하였다. 진골귀족의 이러한 반발은 첫번째 왕비의 父로 추정되는 永宗의 세력에 의하여 8월에 일어난 모반사건으로 구체적으로 표현되었다.0205)영종의 난은 외척의 지위를 둘러싼 압력(井上秀雄, 앞의 글, 455쪽) 혹은 외척의 권세를 누리고 있던 순원 一族에 대한 저항(濱田耕策, 앞의 글, 37쪽) 등으로 단순히 이해되어 왔다. 영종의 난이 일어난 배경 및 성격에 대하여는 김수태, 앞의 글, 225∼227쪽이 참고된다. 그렇지만 이러한 진골귀족세력의 반발은 쉽게 진압되었던 것 같다. 성덕왕대 이후 확고히 자리잡은 김순원을 중심으로 한 전제왕권의 옹호세력은 그만큼 강대하였던 것이었다.

 한편 효성왕은 영종의 모반이 실패한 2년 후 아무런 이유도 밝혀지지 않은 채 갑자기 죽었다. 효성왕은 자신을 둘러싸고 조성된 당시의 긴박한 분위기에서 큰 역할이나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했던 정치적 상황에 크게 영향을 받았던 것 같다. 뒤를 이어서 김순원세력의 협력을 받아 태자가 되었던 헌영이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따라서 효성왕대 박씨왕비의 등장과 함께 다시 세력을 떨쳐보려고 했던 진골귀족의 움직임은 또한 좌절될 수밖에 없었다고 할 수 있다.

 효성왕말 상당한 정치적 알력을 거치면서 왕위에 오른 景德王은 그의 즉위 이후 왕당파세력과 함께 왕권강화책을 실시하였다.0206)경덕왕대의 정치적 상황을 이해하는 데는 다음의 연구가 참고가 된다.
李基白,<景德王과 斷俗寺·怨歌>(≪韓國思想≫5, 1962;앞의 책, 1974).
鈴木靖民,<金順貞·金邕論-新羅政治史の一考察>(≪朝鮮學報≫45, 1967;旗田巍·井上秀雄編,≪古代の朝鮮≫, 學生社, 1974).
金壽泰,<統一新羅期 專制王權의 崩壞와 金邕>(≪歷史學報≫99·100합집, 1983).
金福順,<新羅 中代 華嚴宗과 王權>(≪韓國史硏究≫63, 1988;≪新羅華嚴宗硏究≫, 民族社, 1990).
李泳鎬,<新羅 惠恭王代 政變의 새로운 解釋>(≪歷史敎育論集≫13·14합집, 1990).
―――,<新羅 惠恭王 12년 官號復故의 意味>(≪大丘史學≫39, 1990).
경덕왕이 즉위한 후 제일 먼저 단행한 일은 첫째 왕비인 三毛夫人의 出宮으로 생각된다. 無子라는 이유로 출궁시켰는데, 자신의 왕위계승과 달리 왕위계승권자를 미리 확보하려는 그의 간절한 바램에서 나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점은 경덕왕이 자기의 아들을 무척 원했다는 사실에서 충분히 짐작이 된다.0207)李基白에 의하면 이것은 중대 전제왕권의 한 특징이었다고 한다(李基白,<統一新羅와 渤海의 社會>, 312쪽). 한편 金英美는 경덕왕 7년(748) 효성왕비인 太后가 永明新宮으로 이거한 사실에 대하여 경덕왕이 자신의 즉위배경이 되었던 세력까지도 제거하려고 했던 것은 아닐까 생각된다고 한다(金英美,<統一新羅時代 阿彌陀信仰의 歷史的 性格>,≪韓國史硏究≫50·51합집, 1985, 72쪽). 그러나 경덕왕이 자기의 세력기반인 母后勢力을 제거하였으리라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경덕왕은 즉위 이후 행해진 對唐外交를 보다 활발히 함으로써 왕권을 강화하려고 했던 것이 아닌가 한다. 경덕왕이 唐과의 관련 속에서 그에게 반대되는 귀족세력을 억압하기 위하여 실시한 대표적인 것은 官制改革으로, 바로 漢化政策의 실시였다. 경덕왕 6년(747) 中侍가 侍中으로 바뀜으로써 한화정책은 실시되기 시작하였다. 경덕왕이 한화정책을 통하여 꾀한 것은 보다 획일화된 官僚制의 성립을 통한0208)李基白,<韓國政治史의 展開>(≪韓國史學의 方向≫, 一潮閣, 1978), 177쪽. 왕권의 전제화였다. 경덕왕은 이러한 왕권강화작업을 통하여 당시의 불만귀족세력을 억압하려고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경덕왕은 출궁당한 첫째 왕비를 중심으로 하는 세력의 심각한 반발을 받았다. 그것은 삼모부인과 남매관계인 金邕의 정치적 활동을 통하여 살펴볼 수 있다. 또한 이들 세력은 金良相의 예에서 살펴볼 수 있듯이 왕권의 전제화에 반대한다는 공통의 목표와 함께 다른 진골귀족세력과 대체적으로 연결되어 갔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첫째 왕비와 관련된 세력의 움직임을 보면 오랫동안 별다른 움직임이 보이지 않는다. 그것은 경덕왕의 지속적인 왕권강화책의 실시에 영향을 받은 것은 아닐까 한다. 그런데 경덕왕 13년에 가서 삼모부인과 孝貞이 皇龍寺鐘을 만드는데 다량의 銅을 희사하면서 갑자기 다시 등장하고 있다. 이 때 이들 세력은 왕권의 전제화에 대항할 정도의 힘을 가지게 되었음을 그러한 움직임을 통하여 나타내려고 한 것은 아닐까 추측된다.

 이러한 사실은 이후에 있은 반전제주의세력의 움직임을 통하여 엿볼 수 있다. 김옹과 관련된 세력의 움직임이 경덕왕 13년(754)에 나타난 후 곧 경덕왕의 한화정책에 대해서도 심각한 반발이 일어난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上大等 思仁이 경덕왕 15년에 시정과 관련하여 왕에게 상소를 하였다고 한다. 이 때 사인이 상소한 내용은 상세히 알 수 없으나, 한화정책 등 경덕왕의 왕권전제화정책에 대한 반발·비판으로 생각되고 있다.0209)李基白은 사인을 언급하면서 이때 경덕왕의 한화정책이 이의없이 받아들여지지 않았음을 강조하고 있다(李基白, 앞의 책, 1974, 218쪽). 李泳鎬는 이러한 해석에 대해 비판을 하며, 사인이 상소를 한 것은 왕당파로서 녹읍부활에 반대하는 입장을 취하였기 때문이라 한다(李泳鎬, 앞의 글, 1990b, 9∼13쪽). 한편 申瀅植은 이때 사인이 外戚간의 권력쟁탈전을 벌인 결과 신충·의충계와의 대립에서 패하였다고 한다(申瀅植, 앞의 책, 1990, 126·137∼138쪽). 경덕왕 6년에 실시되기 시작한 경덕왕의 한화정책이 이때에 이르러서 비판되었다는 것은 2년 전에 있은 김옹과 관련된 세력의 움직임과 무관하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경덕왕은 상대등 사인을 물러나게 하고 보다 적극적인 왕당파의 인물인 信忠을 상대등에 임명하고, 신충과 함께 16년(757)·18년 계속해서 대규모적인 한화정책을 실시해 나갔다.0210)李基白, 위의 책, 218쪽. 金英美는 경덕왕의 한화정책이 왕권강화작업의 추진을 반대하는 세력과의 일정한 타협속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보고 있다. 그것은 녹읍의 부활(3월)이 한화정책(12월)보다 먼저 시행된 점에서 알 수 있다고 한다(金英美, 앞의 글, 74쪽). 그러나 당시 귀족세력과 경덕왕의 타협이 있었는지는 구체적으로 알 수 없다.

 경덕왕에 의하여 16년부터 보다 적극적인 왕권강화책이 실시되어 나갔지만 그것은 곧 왕권의 전제화에 반대하는 진골귀족세력에 의하여 실패로 돌아간 것 같다. 즉 경덕왕의 의도는 그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경덕왕의 한화정책이 강력히 추진되고 있던 16년에 祿邑이 부활되었다. 말하자면 중대 전제왕권에 의해 실시되었던 官僚田과 歲租의 제도가 이제 다시 녹읍으로 바뀐 것이다. 이것은 경제적인 면에서 진골귀족들이 전제왕권에 대항한 결과였다.0211)姜晉哲,<新羅의 祿邑에 대하여>(≪韓國中世土地所有硏究≫, 一潮閣, 1989), 80∼81쪽.
李基白,≪韓國史新論≫改正版(一潮閣, 1976), 96쪽.
녹읍부활의 의미를 새롭게 파악하고 있는 金基興은 경덕왕 16년(757)에 王權이 위축된 흔적이 없다고 하며, 이것을 전제왕권의 제도정비선상에 위치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金基興,<8∼9세기 통일신라의 경제>, 한국고대사연구회 제4회 합동토론회 발표요지, 1991, 4쪽). 그러나 이 무렵 경덕왕의 왕권이 위축되는 사실은 여러 곳에서 확인할 수 있다.
진골귀족들은 이러한 승리 후 왕권의 전제화에 대한 반대 움직임을 더욱 강화해 나갔다. 그것은 이후 경덕왕과 반전제주의 귀족세력과의 대립에서 반전제주의세력의 완전한 승리로 돌아간 사실에서 알 수 있다.

 경덕왕의 한화정책이 끝난 바로 다음해인 경덕왕 19년(760)에 경덕왕과 대립되는 성격을 가진 金邕이 中侍에 임명된 사실에서 그것을 알 수 있다. 中代 중시직이란 왕이 원하던 정책을 수행해 나감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자리였다. 그 자리에 김옹과 같이 왕과 반대되는 성격을 가진 인물이 임명되었다는 것은 새로운 변화를 암시해주는 것이라고 하겠다. 즉 이제는 더 이상 경덕왕이 원하는 대로의 정책을 마음대로 수행해 나갈 수 없으며, 나아가 경덕왕이 행한 여러 정책이 부정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것은 진골귀족세력의 정권장악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김옹이 중시가 된 정치적인 사건은 반전제주의세력에게는 결정적인 의미를 갖는다고 하겠다. 따라서 김옹이 중시에 임명된 경덕왕 19년(760)은 신라사에 있어서 하나의 주요한 전환기로 생각된다.0212)李基白은 이러한 변화를 金良相이 上大等에 임명된 혜공왕 10년에서 찾을 수 있다고 한다(李基白,<新羅 惠恭王代의 政治的 變革>,≪社會科學≫2, 1958; 앞의 책, 1974, 236∼239쪽). 그러나 경덕왕 19년에 이루어진 정권의 교체는 이후 거의 변동되지 않았으므로 신라 하대의 기원은 바로 金邕이 중시에 임명된 시기에서 찾아야 하지 않을까 한다. 한편 李泳鎬와 申瀅植은 이기백과 필자의 견해에 대하여 비판을 하고 있다(李泳鎬, 앞의 글, 1990 및 申瀅植, 앞의 책, 1990, 142∼148쪽). 그러나 신라 중대 정치사의 전개과정을 볼 때, 이때 확립된 정권은 거의 흔들리지 않았다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겠다.

 경덕왕의 사후 혜공왕대 약간의 정세변화가 있기는 하였다.0213)혜공왕대의 정치를 이해하는 데는 李基白,<新羅 惠恭王代의 政治的 變革>(앞의 책, 1974) 및 金壽泰,<專制王權의 崩壞와 眞骨貴族의 권력투쟁>(≪新羅 中代 專制王權과 眞骨貴族≫, 西江大 博士學位論文, 1991)이 참고된다. 그것은 惠恭王의 즉위와 함께 경덕왕으로 상징되는 정치적 성격이 혜공왕 초년을 지배하는 등 일시 세력회복을 꾀하였기 때문이다. 경덕왕의 嫡子로 왕위에 오른 혜공왕은 8세라는 어린 나이였던 까닭에 그의 母后가 대신 섭정을 하였다. 혜공왕의 모후가 혜공왕을 대신하여 섭정을 함으로써 혜공왕 초년에 상당한 정치적 변화가 일어났다. 혜공왕의 모후가 혜공왕의 즉위와 함께 권력을 장악함으로써 일으킨 중요한 변화는 역시 對唐外交의 강화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당과의 관련 속에서 경덕왕말 이래 몰락하고 있던 왕당파들이 세력회복을 꾀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0214)金壽泰, 위의 글, 159∼163쪽. 따라서 이러한 만월부인의 노력은 경덕왕말 이후 쇠약해진 왕당파의 세력을 다시 규합할 수 있는 계기가 또한 되지 않았을까 한다.0215)申瀅植의 경우 혜공왕은 만월부인의 섭정 이후 의충·신충계와 김옹·김양상계의 세력균형속에서 왕위를 유지하였다고 한다(申瀅植, 앞의 책, 1990, 144쪽). 그러나 이들 세력을 모두 王黨派의 세력으로 설정하고 정치적 변화를 살피는 것은 무리가 있다고 하겠다. 이때 만월부인과 관련된 정치세력의 활동 목표는 바로 경덕왕으로 상징되는 전제왕권을 혜공왕대까지 유지·회복하려는 復古政治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경덕왕 19년(760) 이후 일단 세력을 구축한 金邕·金良相 등 反專制主義 귀족세력은 만월부인과 왕당파의 이러한 활동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들은 혜공왕초 두 차례의 반란사건을 일으켜서 성공을 한 다음 더욱 확고히 세력을 구축해 나갔던 것이다. 우선 혜공왕 4년(768) 大恭의 난을 들 수 있다. 이것은 혜공왕 초년에 보인 왕당파들의 활동에 대한 반전제주의 귀족세력들의 정치적 불만이 표출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혜공왕 6년에 반전제주의세력은 계속해서 난을 일으켜서 다시 왕당파의 세력을 약화시키고야 말았다.0216)李基白, 앞의 책(1974), 231∼233쪽. 그것은 이후 혜공왕 7년에 만들어진 聖德大王神鐘銘이 대표적인 반전제주의 인물인 김옹·김양상이 권력을 장악하고 있는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는 데에서 살필 수 있다. 더욱이 혜공왕 10년에 가서도 김옹·김양상은 上宰·上大等으로 여전히 정치의 실권을 장악하면서 더 이상 흔들리지 않는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0217)金壽泰, 앞의 글(1983b), 134쪽. 그리고 이들 반전제주의 귀족세력은 혜공왕 12년 경덕왕이 왕권강화를 위하여 실시한 바 있는 한화정책을 이제 비로소 부정하는 조치를 단행하였다.0218)李基白, 앞의 책(1974), 247쪽. 여기에 대한 李泳鎬의 반대가 있지만(李泳鎬, 앞의 글, 1990b, 47∼53쪽) 설득력이 약하다. 당시의 정치적 변화와 관련시켜 누가 왜 일으켰는가를 그 의미와 함께 살피고 있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15년(779)에 들어와서는 武烈王系에 대한 범진골귀족세력의 규합을 위하여 무열왕계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던 金庾信系와 연결하고 있으며,0219)성덕왕대까지 활동이 확인되는 김유신계의 세력이 언제 어떠한 과정을 거쳐서 몰락하게 되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혜공왕 15년(779) 반전제주의 귀족세력에 의하여 김유신의 세력에 대한 회복조치가 단행되는 것으로 보아(李基白, 앞의 책, 1974, 247∼252쪽) 중대말의 정치적 변혁속에서 김유신계가 반전제주의 세력에 가담한 사실은 여기에서 확인이 된다. 또한 무열왕계내에서의 소외된 세력으로 생각되는 金周元과도 결합되었다.0220)金周元이 반전제주의자였다는 사실은 李基東, 앞의 책, 155쪽이 참고된다. 한편 申瀅植은 이후 김유신 후손의 동향과 김주원·김경신의 세력향배가 정치권에 새로운 영향을 주게 되었다고 한다(申瀅植, 앞의 책, 1990, 145∼146쪽).

 이러한 반전제주의세력의 움직임에 대하여 왕당파들은 唐과의 관련 속에 다시 정권의 회복을 위하여 노력하였다.0221)≪舊唐書≫권 199上, 列傳 149上, 東夷 新羅傳에서 ‘9년부터 12년까지 매년 사신을 보내어 來朝하였는데, 혹 1년에 두번도 왔다’라고 언급하고 있는 사실이 참고 된다. 그러나 정권을 회복하려는 이들 세력의 보다 구체적이고 적극적인 움직임은 역시 반란으로 표현되었다. 김양상이 상대등으로 등장한 10년 이후인 11년(775)과 16년에 계속적으로 반란을 일으켰다. 그러나 이들 반란은 김옹·김양상 등 반전제주의 귀족세력에 의하여 모두 진압됨으로써 실패하고 말았다.0222)志貞의 경우 일시 성공을 거두었지만(李基白, 앞의 책, 1974, 237쪽), 결국 그것도 진압되었다.

 혜공왕의 즉위 이후 이와 같이 왕당파세력과 반전제주의세력이 계속적으로 벌인 대립·갈등은 혜공왕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낳게 하였다. 혜공왕 16년 반전제주의 진골귀족세력에 대하여 반란을 일으켰던 志貞의 군사에 의하여 혜공왕이 시해된 것이다. 혜공왕에 대하여 커다란 정치적 불만을 가지고 있었던 이들 왕당파세력은 지정의 난에서 보여주듯이 그들이 일으켰던 난이 일시적으로 성공을 거두었음에도 불구하고 김양상 등에 의하여 진압될 때까지 혜공왕은 별다른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러한 혜공왕의 죽음과 함께 中代라는 한 시대가 끝나고, 이제 下代라는 새로운 시대로 들어가게 되었다. 전제왕권에 의해서가 아니라 귀족들에 의한 정치가 새롭게 열리는 시대가 된 것이다.

<金壽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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