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9권 통일신라
  • Ⅱ. 전제왕권의 확립
  • 3. 중앙통치조직의 정비
  • 4) 재상제도의 운영

4) 재상제도의 운영

 신라의 중앙통치조직에는 이러한 관부 외에 宰相制가 따로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행정조직상으로 존재한 것이 아니라, 정치적 의미를 띠고 있던 것이므로 그 성격이나 직능에 대한 설명이 어려운 편이다. 그러나 다음의 기록으로 볼 때 그것은 신라정치상에서 큰 비중을 차지한 관직임에는 틀림없다.

㉮ 眞德大王이 돌아갔는데 후사가 없었다. 金庾信이 宰相인 閼川伊湌과 의논해서 春秋伊湌을 맞아 즉위케 하니, 이가 太宗大王이다(≪三國史記≫권 42, 列傳 2, 金庾信 中).

㉯ 憲德王이 즉위하니 諱는 彦昇이며, 昭聖王의 동모제이다. 왕은 元聖王 6년에 唐에 奉使한 후, 大阿湌의 벼슬을 받고…10년에 侍中이 되고 11년에 伊湌으로 재상이 된 후 12년에 兵部令이 되었다(≪三國史記≫권 10, 新羅本紀 10, 헌덕왕 원년).

㉰ 元和 7년에 重興이 졸하니 宰相 金彦昇을 세워 왕으로 삼았다. …아울러 宰相 金崇斌 등 3사람에게 門戟을 내려 주었다(≪舊唐書≫권 199上, 列傳 149上, 東夷 新羅).

㉱ 文聖大王도 宰相 魏昕을 보내 머물기를 청하므로 주석하였다(<聖住寺事蹟碑>,≪考古美術≫9, 1968, 24쪽).

 위의 사료로 보면 신라에는 분명히 재상이 있었다. 그러나 제도상으로 설치된 관직이 아니었기 때문에 8세기말 이후 하나의 제도로 정착했건0290)木村誠,<新羅の宰相制度>(≪人文學報≫118, 1977), 31∼33쪽. 또는 群臣會議가 宰相會議로 바뀌어 興德王 9년(843)경에 최고정책결정의 회의로 바뀌었던 간에0291)李仁哲,<新羅의 群臣制度와 宰相制度>(앞의 책, 1993), 121쪽. 그 존재와 법적 지위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없다.

 국내 문헌이나 金石文 이외에 중국측 사료에 재상이란 관직이 나타나 있으며, 위의 사료 ㉰의 ‘재상 김승빈 등 3사람에게’로 보나, “大宰相에게 錦彩 三十匹을 하사하고 次宰相에게 금채 二十匹을 하사했다”0292)≪三國史記≫권 11, 新羅本紀 11, 경문왕 5년.로 보아 1인 또는 여러 명의 재상이 있었다고 생각된다. 따라서 “병부령의 位는 대아찬으로부터 太大角干에 이르기까지 하였다. 또 재상과 사신을 겸하였다”0293)≪三國史記≫권 38, 志 7, 職官 上.의 기록이나<聖德大王神鍾銘>에 나타난 金邕0294)金邕은 兵部令으로서 殿中令·司馭府(乘府)令·修城府(京城周作典)令·四天王寺府令·眞智大王使令 등을 겸하고 있었다. 다만 그를 景德王代의 漢化政策 추진의 왕당파로 보는 견해(鈴木靖民·李昊榮·李基東)와 反專制主義的인 인물로 생각하는 주장(金壽泰)이 엇갈리고 있다. 이에 대해 李泳鎬는 親王的 人物로 파악하였으며, 필자도 反專制的이거나 反中代的 인물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다(申瀅植,<新羅中代專制王權의 展開過程>, 앞의 책, 1990, 138쪽).이 갖고 있는 上相(大宰相)이나 金良相이 갖고 있는 二宰(次宰)의 존재와 같은 재상이 주로 하대에 집중되어 있다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확인된 재상의 명단이 40명이나 되지만,0295)구체적으로 확인한 宰相의 명단을 본다면, 木村誠은 37명이나(木村誠, 앞의 글, 26∼27쪽), 李仁哲은 2명(金庾信·車得公)을 추가하였다(李仁哲, 앞의 책, 112∼114쪽). 여기에 乙祭(大臣)을 추가하면 40명이 된다. 그 중에서 하대의 인물이 27명이나 되므로 그 성격파악에 도움이 된다. 더구나 통일전쟁기(무열왕∼문무왕대)에 6명이 등장하는데, 그 특수상황을 고려하면 통일 전에도 존재하였으나 그 실질적인 활동기는 하대라고 할 수 있다.

 재상에 대한 기록은 宣德王 즉위와 더불어 “여성 善德을 세워 王으로 삼고 大臣 乙祭가 국권을 장악했다”라고 처음 나온다.0296)≪新唐書≫권 220, 列傳 149, 東夷 新羅.
이≪新唐書≫의 기록에 대해서≪三國史記≫권 5, 新羅本紀 5, 선덕왕 원년조에는 ‘以大臣乙祭摠持國政’이라고 되어 있다.
대신(재상)인 을제는 여왕을 보필하여 국정을 총괄하는 지위에 있었으니, 선덕왕대의 閼川과 김춘추, 무열왕대의 김유신, 혜공왕대의 金邕과 金周元, 원성왕대의 金彦昇, 문성왕대의 金陽(魏昕), 그리고 진성여왕대의 魏弘 등이 그들이다. 이들 재상은 친척(宗室)으로서 당대의 실권자인 동시에 제일의 왕위계승 후보였다.0297)宰相이 제도상 또는 법제상 공식제도가 아니기 때문에 그 명칭도 大臣(乙祭·金隱居), 上相(金敬信·金良相·金邕), 宰相(金良相·金崇斌·金彦昇·閼川), 上宰(金周元), 大宰相(金崇斌·金彦昇), 國相(金春秋·金獻貞), 그리고 相(金庾信·金祐徵), 冢宰(竹旨·令胤) 등 다양하였다.

 중고말인 善德·眞德王代는 奈勿直系(銅輪系)와 眞智系(武烈系)의 구·신세력의 충돌기였다. 따라서 선덕왕은 을제, 진덕왕은 알천을 중심으로 왕권을 유지하려 했으나, 결국은 김춘추·김유신 등 신흥세력의 도움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여기서 세력판도는 신흥세력으로 이양되었으며, 무열왕의 등장은 이것과 궤를 같이하게 된다. 따라서 재상은 자연히 상대등과 병부령을 중심으로 계승되었으며, 통일전쟁과 같은 긴급한 상황에서는 김유신·金欽純·金軍官 등 武將에게 그 지위를 갖게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통일 후 中代 專制王權의 확립에 따라 재상의 지위는 강등되어야 했으니, 金欽突·김군관의 처단이 그것이다.

 그러나 혜공왕말의 김양상·金敬信·김주원의 세력 갈등은 재상제도의 새로운 변화상을 가져왔다. 이미 혜공왕 7년(771) 성덕대왕신종의 鑄造(鍾銘)에 있었던 김옹·김양상의 겸직사례에서 하대 재상의 위상을 엿볼 수 있다. 김양상·김경신(혜공왕), 김주원·金俊邕(원성왕), 김언승(애장왕), 김숭빈(헌덕왕),金均貞(흥덕왕), 김양(문성왕), 위홍(진성여왕) 등은 당대의 실권자였다. 동시에 가까운 외척이며 왕비족의 대표자였다. 여기서 하대 왕권이 재상의 정치적 지원으로 유지되었음을 확인할 수가 있다.0298)申瀅植, 앞의 책(1990), 173쪽. 결국 신라의 재상은 상대등·병부령·시중, 그리고 사신(내성과 어룡성) 중에서 실권자로서 2∼3개의 관직을 겸직하는 인물에게 준 명칭이다. 그는 당대 귀족의 대표자나 정치실력자로서 군신회의를 주도하면서 왕권을 지원 또는 견제하기까지 한 것이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통일신라의 중앙행정체계는 中古末에 그 초기형태가 나타난 후, 무열왕권의 확립과정에 따라 신문왕대에 그 윤곽이 마련되었다. 전제왕권을 뒷받침한 중앙행정체계는 관료제라는 조직상의 기구만이 아니라 유교적인 왕도정치이념의 구현과 불교가 지닌 신성한 왕권의 보장을 결합시킨 萬波息笛의 정신으로 무장되었음을 특징으로 하였다. 따라서 이러한 이론적인 바탕을 마련한 통일신라의 전제왕권은 율령정치나 왕도정치와 왕실사원을 통한 휼민과 호국의 불교적 이상을 잊지 않고 있었다.

 때문에 통일신라의 중앙행정체계는 특정 귀족대표의 겸직과 재상제라는 법적조치가 불가피하였으며, 전체 최고관부가 왕과 직결되어, 고려·조선시대와는 달랐다. 그러므로 행정기관과 왕실기관(內廷官府)의 견제와 균형을 보였으나, 그 책임자는 재상이 겸직케 함으로써 왕권의 침투를 가능케 하였다. 또 하위직인 비진골계의 전문관직도 직능상의 권위를 인정함으로써 왕권강화의 한 수단으로 이용하였다. 그외 궁정관부에도 행정·사정·외교기능까지 갖게 함으로써 행정관부의 월권을 방지하려는 제도적 장치가 마련된 것도 특기할 내용이다.

<申瀅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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