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9권 통일신라
  • Ⅱ. 전제왕권의 확립
  • 4. 지방·군사제도의 재편성
  • 2) 군사조직
  • (1) 중앙의 군사조직

(1) 중앙의 군사조직

 신라 통일기에 王京에 편성되었던 군사조직으로는 시위부·9서당과 그 지원부대, 그리고 삼무당·경오종당·이절말당·개지극당·계금당이 있었다.

 먼저 시위부는 眞平王 46년(624)에 大監을 설치한 이후, 眞德王 5년(651)에 三徒의 편제가 이루어지고 侍衛監이 두어졌다. 신문왕 원년(681)에 시위감을 파하고 장군을 둠으로써 시위부의 조직이 최종 정비되었다.

 6정이나 9서당과는 달리 시위부의 장군직은 급찬에서 阿湌까지의 관등 보유자를 임명하도록 되어 있어서 6두품도 취임할 수 있는 군관직이었다. 시위부의 卒은 선저지에서 大舍에 이르는 관등 보유자로 편성되도록 정해져 있었다. 시위부는 그 병졸 조차도 4두품 이상의 신분으로 조직되었다.0319)李仁哲,<新羅骨品體制社會의 兵制>(앞의 책, 1993), 345쪽. 시위부는 궁성의 숙위와 국왕의 호종·경호 등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이는 시위부가 왕권수호의 최종 책무를 담당한 군부대였음을 의미한다. 신문왕이 즉위초에 金欽突의 난을 진압하고, 兵部令으로서 上大等을 겸직했던 金軍官을 처형한 직후에 곧바로 시위감을 파하고 시위부에 장군 6인을 두었다는 사실도 시위부의 부대장을 6두품 출신으로 임명하여 왕권을 강화하려 하였음을 보여준다.0320)李文基,<侍衛府의 成立과 性格>(≪新羅兵制史硏究≫, 一潮閣, 1997), 150∼163쪽.

 9서당과 그 지원부대 역시 왕권강화의 군사적 배경이 되었다. 9서당의 편성은 진평왕 5년(583)에 처음 설치한 서당을 綠衿誓幢으로 재편하고, 문무왕 12년(672)에 백제민으로 白衿誓幢을 조직하면서 시작되었다. 진평왕 47년에 설치한 郎幢을 문무왕 17년에 紫衿誓幢으로 재편성하였고, 신문왕 3년(683)에는 고구려민으로 黃衿誓幢, 靺鞨人으로 黑衿誓幢을 편성하였다. 신문왕 6년에는 報德城民으로 碧衿誓幢과 赤衿誓幢을 편성하였으며, 신문왕 7년에는 百濟殘民으로 靑衿誓幢을 조직하였다. 그리고 문무왕 12년(672)에 설치한 長槍幢을 孝昭王 2년(693)에 緋衿誓幢을 재편해 넣음으로써 9서당의 조직이 완성되었다.

 9서당은 신라인 3개 부대, 백제인과 보덕국인이 각기 2개 부대, 고구려인과 말갈인이 각기 1개 부대로 편성되어, 國人別 부대편성이 엄격히 지켜졌다. 신라인 부대는 군관과 병졸이 모두 신라인으로 편성되었고, 異國人 부대도 군관과 병졸이 모두 해당 국인으로 편성되었지만 복수의 군관 가운데는 신라출신 군관도 포함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0321)井上秀雄,<新羅兵制考>(앞의 책), 181쪽. 이국인 병졸들은 대개 삼국통일과정에 획득한 포로들과 투항인들로 구성되었다.

 대당전쟁이 진행되고 신문왕이 왕권강화를 추진하던 시기에 부대편성이 이루어진 것을 보면, 9서당은 처음에는 백제의 포로군인들을 대당전쟁에 내몰기 위해 조직된 부대였으나, 대당전쟁이 끝난 신문왕대 이후에는 9서당이 국왕의 직속부대로 편제되어 왕권강화에 군사적 배경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9서당이 대부분 이국인 포로들로 편성된 탓에 병졸의 노화·사망 등으로 인한 자연적 결원을 충원하지 못하여 점차 축소·해체되는 운명을 맞게 되었다.

 9서당에는 軍師幢·大匠尺幢·步騎幢·黑衣長槍末步幢 그리고 著衿騎幢이 지원부대로 배치되었다. 이처럼 6정의 예하지원부대와 같은 명칭의 부대가 9서당에 들어있는 까닭은 삼국통일의 달성으로 전국을 6개 군관구로 나누어 방위하던 체제가 실효성을 거두기 어려움에 따라 6정을 폐지하고 그 지원부대를 9서당에 재편성해 넣은 때문으로 생각된다.0322)李仁哲, 앞의 책(1993), 347쪽.

 三武幢은 白衿武幢·赤衿武幢·黃衿武幢으로 편성되었다. 백금무당은 문무왕 15년(675)에, 적금무당은 신문왕 7년(687)에, 황금무당은 신문왕 9년에 각기 편성되었다. 그 명칭이 9서당과 비슷한 것으로 보아, 백금무당은 백제인, 적금무당은 보덕국인, 황금무당은 고구려인으로 편성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0323)井上秀雄, 앞의 책, 180∼181쪽. 삼무당은 각기 幢主 16인, 監舍知 1인, 火尺 8인으로 편성되어 부대장의 숫자가 하급군관의 숫자보다 많았다. 이로 미루어 삼무당은 병졸이 별반없는 부대였을 것으로 생각할 수 있는데, 이는 삼무당이 9서당을 편성하고 남은 잔여 군관과 병졸로 조직한 부대로서 이국인 군관에 대한 예우적 조치의 일환으로 편성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삼무당에는 軍師幢主 각 1인과 步騎幢主 각 2인이 배치되었는데, 이들의 관등이 三武幢主보다 높았다. 이는 신라인 출신의 군사당주와 보기당주가 이국인들로 편성된 삼무당을 지도·융합할 목적으로 배치되었기 때문이다.

 京五種幢은 각기 靑綠·赤紫·黃白·白黑·黑靑의 衿色을 가진 5개 부대로 편성되었다. 각 부대에는 萬步幢主 3인씩이 배속되어 京五種幢主로서 역할을 수행하였다. 二節末幢은 만보당주 2인씩으로 조직된 2개의 절말당이었다. 만보당이 도끼와 방패를 사용하는 보병부대였으므로 이들 부대 역시 도끼를 주무기로 하는 보병부대였음을 알 수 있다.0324)李仁哲, 앞의 책(1993), 349쪽.

 皆知戟幢은 신문왕 10년(690)에 창설되었다. 개지극이란 가지가 나와 있는 갈구리창으로 對騎兵用 무기였다.0325)金基雄,<三國時代의 武器小考>(≪韓國學報≫5, 1976), 11∼13쪽. 이에 개지극당은 갈구리창으로 무장한 전투부대였다고 하겠다. 罽衿幢은 태종무열왕 원년(654)에 창설된 기병부대였다. 그 이름으로 보아서 부대의 휘장에 그물무늬를 새겼거나 그물로 장식하였던 것으로 짐작된다. 계금당은 ‘隊大監 1인-弟監 1인-監舍知 1인-少監 1인-火尺 7인’의 군관과 4두품 이상의 병졸로서 조직되어 있었다. 계금당에는 著衿騎幢主 6인과 著衿監 6인이 배속되어 있어서 저금기당이 계금당의 지원부대였다는 것을 알려준다. 저금기당 역시 특이한 휘장으로 장식한 기병부대였다.0326)李仁哲, 앞의 책(1993), 349∼350쪽.

 왕경에는 이들 부대 이외에도 6세기초에 창설되어 통일기까지 존속된 부대로 법당군단 가운데 京餘甲幢·師子衿幢·弩幢·百官幢·四設幢 등이 있었다. 경여갑당·사자금당·노당 등의 부대는 왕경의 방위와 치안, 질서유지에 커다란 기여를 하였고, 백관당은 주요 관아의 경비를 담당하였고, 四設幢은 弩幢·雲梯幢·衝幢·石投幢으로 편성되어 각기 弩·雲梯·衝車·抛車 등의 특수무기를 제작·보급하였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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