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9권 통일신라
  • Ⅱ. 전제왕권의 확립
  • 4. 지방·군사제도의 재편성
  • 2) 군사조직
  • (2) 지방의 군사조직

(2) 지방의 군사조직

 신라의 삼국통일 달성은 지방군사조직에 특히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다. 중고시대의 5주체제에 맞게 편성되어 영토확장에 주도적 역할을 담당했던 6정이 폐지되고, 통일신라의 9주체제에 걸맞게 군사조직이 재편성되었다. 통일전쟁에서는 기병이 아무리 선제공격을 하여 적을 격퇴시켰더라도 보병이 성을 점령하여야만 자국의 영토로 확정되는 것이기 때문에 보병군단인 6정의 역할이 중요하였지만, 삼국통일을 달성한 후에는 종래의 6정군단이 주둔하였던 지역이 內地로 되었기 때문에 더이상 6정을 존속시킬 필요가 없어졌다. 이에 통일신라정부는 보병군단인 6정을 해체하고, 지방민의 반란에 효과적으로 신속히 대처할 수 있는 기병부대를 중심으로 군사조직을 재편성하였다. 신라 통일기에 지방에 편성되었던 군사조직으로 10정·삼천당·신삼천당·5주서·저금기당·비금당·사자금당·만보당·삼변수당·이계당 그리고 법당군단이 있었다.

 10정은 통일신라의 9주에 고르게 배치되었던 기병군단이었다. 10정이 처음 창설된 시기는 진흥왕 5년(544)이었지만 10개 정이 모두 설치된 것은 문무왕 5년(665)이었다. 10정은 신라의 삼국통일전쟁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고, 삼국통일 후에는 지방의 치안질서유지에 커다란 기여를 하였다. 10정의 각 부대는 ‘대대감 1인-소감 2인-화척 2인’의 군관조직과 그 아래 병졸로 편성되었다. 10정의 주둔지는≪三國史記≫지리지에서 다음과 같이 찾아진다.

① 音里火停 尙州 尙州 靑驍縣 ② 古良夫里停 熊州 任城郡 靑正縣 ③ 居斯勿停 全州 任實郡 靑雄縣 ④ 參良火停 良州 火王郡 玄驍縣 ⑤ 召參停 康州 咸安郡 玄武縣 ⑥ 未多夫里停 武州 武州 玄雄縣 ⑦ 南川停 漢州 漢州 黃武縣 ⑧ 骨乃斤停 漢州 沂川郡 黃驍縣 ⑨ 伐力川停 朔州 朔州 綠驍縣 ⑩ 伊火兮停 溟州 曲城郡 綠武縣

 이처럼 10정은 통일신라의 9주 가운데 8주에 1정씩 배치되고 한주에는 2개정이 배치되었다. 10정의 명칭은 경덕왕 16년(757) 지명개정 이전의 駐屯縣 명칭과 일치하는데, 개정 이후의 명칭도 일정한 법칙성을 띠고 있다. 개정지명의 첫자는 靑·玄·黃·綠의 4색으로 되어 있는데, 이는≪삼국사기≫직관지 무관조에 기재된 해당 부대의 衿色과 일치한다. 두번째 글자는 驍·正·雄·武 등 군대·무인의 속성과 관련있는 글자로 되어 있다.0327)末松保和,<新羅幢停考>(≪新羅史の諸問題≫, 1954, 東京 : 東洋文庫), 359∼367쪽. 이러한 사실은 10정이 경덕왕 16년 이후까지 존속되었음을 의미할 것이다.0328)경덕왕 16년에 10정의 명칭이 현의 명칭 개정과 함께 靑驍停·靑武停 등으로 개정되었을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李文基,<景德王代 軍制改革의 實態와 新軍制의 運用>, 앞의 책, 372∼375쪽).

 10정의 예하지원부대인 삼천당 역시 삼국통일 이전에 창설되어 삼국통일 이후에도 존속되었다. 9세기초(800∼808)에 건립된 경주 高仙寺<誓幢和尙塔碑>에 ‘音里火三千幢主 級湌 高金□’이라는 명문은0329)<慶州 高仙寺 誓幢和尙塔碑>(≪朝鮮金石總覽≫, 1919), 41∼43쪽.
<新羅誓幢和尙碑新片>(黃壽永編,≪韓國金石遺文≫, 一志社, 1968), 72∼74쪽.
삼천당이 9세기초까지 존속되었음을 보여준다. 삼천당의 각부대는 ‘당주 6인-감 6인-졸 15인’으로 조직되었다. 각 부대에 배속된 병졸이 15명에 지나지 않음은 삼천당이 전투부대가 아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 명칭으로 보아 삼천당은 僧兵으로 조직된 일종의 정훈부대였다. 이에 10정이 주로 기병의 기동력과 파괴력을 주무기로 하여 반란의 진압에 목적을 둔 부대였다면, 승병으로 조직된 삼천당은 불교적 설법을 통하여 반란군을 회유하거나 이미 진압된 반란세력을 감화시킬 목적으로 설치된 부대였다.

 삼국통일 이전에 설치된 삼천당이 10정의 예하지원부대로 편성된 것과는 달리 통일기초에 창설된 新三千幢은 10정과는 관련이 없이 배치되었다. 牛首州三千幢과 奈吐郡三千幢은 문무왕 12년(672)에, 奈生郡三千幢은 문무왕 16년에 각기 설치되었다.0330)≪三國史記≫권 40, 志 9, 職官 下, 武官. 신삼천당의 확대편성은 신라 통일기의 불교융성이나 우수주 관내의 불만세력에 대한 불교감화와 관련이 있지 않을까 한다.

 5州誓는 菁州誓·完山州誓·漢山州誓·牛首州誓·河西州誓 등의 5개 부대로 편성되었다.≪삼국사기≫직관지에는 문무왕 12년에 5주서를 모두 설치하였다고 기록하였지만, 청주서와 완산주서는 같은 명칭의 州가 두어진 신문왕 5년(685)경에 설치되었을 것이다. 각 부대의 군관수는 ‘隊大監 1인(領騎兵)-少監 9인(領步兵)·3인(영기병)-화척 2인(영기병)’으로 되어 있다. 이는 5주서의 군관조직이 기병중심으로 되어 있기는 하지만 영기병의 소감(3인)에 비해 영보병의 소감(9인)이 3배나 많아서 5주서의 병졸도 보병이 더 많았음을 나타낸다. 저금기당은 그 명칭으로 보아 ‘유달리 눈에 뜨이게 특이한 휘장을 한 기병부대’였다. 그 주둔지가 5주서와 같은 점으로 보아 저금기당은 5주서에 배속되어 기병의 빠른 기동력으로 보병 중심인 5주서의 전투력을 지원해준 부대였다고 판단된다.

 9주의 州治에 배치된 부대로는 緋衿幢·萬步幢·師子衿幢 등이 있었다.0331)비금당주-비금감, 사자금당주-사자금당감과 같은 군관이 9주에 배치된 사실에 주목하고 신라통일기의 9주에 설치된 군사조직을 ‘九州停體制’로 부르는 견해도 있다(李文基, 앞의 책, 370∼371쪽). 이들 부대는 신문왕 5년(685) 이후에 창설되었다. 먼저 비금당은 9서당 중의 하나인 비금서당이 長槍幢이었다는 사실에서 長槍을 주무기로 하는 부대로 생각된다. 비금당주는 사벌주·삽량주·청주에 각 3인, 한산주에 2인, 우수주와 하서주에 각 6인, 웅천주에 5인, 완산주에 4인, 무진주에 8인이 배치되었으며, 領幢의 緋衿監 역시 같은 인원이 배치되었으나, 領馬兵의 비금감은 무진주에만 8인이 배치되었다. 이는 무진주의 비금당만이 장창기병과 장창보병으로 조직되고 그 나머지 8주의 비금당은 장창보병으로 편성되었다는 의미가 될 것이다.

 만보당은 각기 衿色을 달리하는 18개 부대가 9주에 각각 2개 부대씩 배치되었다. 부대장인 만보당주는 관등이 사지에서 대나마로 되어 있어 다른 부대의 監과 비교될 정도로 낮았다. ‘萬’字에는 ‘干戚을 가지고 추는 춤’이라 뜻이 있으므로, 만보당은 ‘도끼와 방패를 가지고 춤을 추듯이 잘 싸우는 보병부대’라는 의미를 갖는다. 도끼는 동서를 막론하고 일찍부터 사용되어 왔으며 갑옷과 투구로 무장한 적병에게 살상효과가 큰 무기였다.0332)蓧田耕一,≪武器と防具≫中國編(東京 : 新紀元社, 1992), 67∼70쪽. 우리 나라에서는 안악 3호분·약수리고분에 도끼를 들고 행진하는 병사들의 모습이 그려져 있고, 백제·가야·신라고분에서도 허다하게 도끼가 많이 출토되고 있다.0333)李仁哲,<6∼7世紀의 武器·武裝과 軍事組織의 編制>(≪韓國古代史論叢≫7, 1995), 9∼50쪽.≪삼국사기≫訥催傳에서는 적이 눌최를 도끼로 쳐죽였다고 전한다. 이로 미루어 만보당은 도끼를 주무기로 하는 보병부대였다고 하겠다.

 법당군단은 왕경과 지방의 9주·5소경 그리고 군현에 편성되어 있었다. 통일 이전의 군사당에 대신하여 9주의 州治에 편성된 법당을 사자금당이라 하였다. 각 주의 사자금당은 ‘당주 3인-감 3인-법당화척 2인’의 군관과 지방민 병졸로 조직되었으며, 獅子隊라 하여 중국에까지 알려졌다. 9주의 州治에는 또한 쇠뇌로 무장한 弩幢이 배치되었다.

 5소경에는 小京餘甲幢과 노당이 배치되었다. 소경여갑당은 ‘법당주-법당감-법당화척’의 군관과 지방민 병졸로 조직되었으며, 노당은 ‘법당두상-법당벽주’의 군관과 지방민 병졸로 편성되었다.

 군현에는 법당군단에 속한 부대 가운데 外餘甲幢·餘甲幢·外法幢이 편성되었다. 이들 부대의 法幢主(52인)와 法幢頭上(147인)을 합한 수(199인)는≪三國史記≫권 40, 직관지 외관조에 기재된 郡大守와 少守를 합친 수(200인)와 거의 일치하고, 법당주(52인)와 法幢辟主(351인)를 합친 수(403인)는 직관지 외관조의 군태수·소수·현령을 합친 수(401인)와 거의 일치한다.0334)인원에서 1, 2인의 차이가 나는데 이것은 商城郡의 5畿停에는 경여갑당을 두었고,≪三國史記≫職官志 外官조의 기사와 武官조 법당 관련기사가 시기를 약간 달리하는 자료를 근거로 작성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을 감안하면 양자는 완전히 일치한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현상은 6세기 전반에 외여갑당이 편성된 지역(22군 30현)의 법당조직은 그대로 놔두고, 그 이후에 영토확장과 군현의 설치로 새로이 법당을 편성한 지역에는 여갑당과 외법당을 편성하고 법당두상과 법당벽주를 파견하였기 때문에 일어났다. 그러나 실제로는 새로이 법당군관을 파견한 것이 아니라 태수·소수·현령으로 하여금 이들 법당군관직을 겸직하게 하였다. 이에 따라 6세기 전반에 외여갑당이 편성되었던 지역에서는 태수와 현령이 법당주를 겸하였고, 그 이외의 지역에서는 태수와 소수가 법당두상을 겸하고, 현령은 법당벽주를 겸하였다. 당시의 모든 군현에 편성된 법당은 지방관을 군관으로 그 지역의 농민장정을 병졸로 삼았다.≪삼국사기≫에서 현령이나 소수가 그 지역민을 이끌고 전투하는 장면을 흔히 볼 수 있는 까닭은 바로 이 때문이다.0335)李仁哲, 앞의 책(1993), 290∼324쪽.

 신라 통일기에 북방을 경비하기 위해 설치한 부대로 二罽幢과 三邊守幢이 있었다. 2계당은 外罽라고도 하는데, 漢山州罽幢은 문무왕 17년(677)에, 牛首州罽幢은 문무왕 12년에 편성되었다. 그 명칭으로 보아 왕경의 罽衿幢과 같은 兵種의 기병부대로 생각된다. 3변수당은 邊守라고도 하는데, 三邊은 漢山邊·牛首邊·河西邊을 뜻한다. 2계당이 기병부대였다는 사실에서 3변수당은 상대적으로 보병부대가 아니었을까 한다. 같은 지역에 동일 병종의 부대가 배치되었을 것으로 생각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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