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9권 통일신라
  • Ⅱ. 전제왕권의 확립
  • 5. 토지제도의 정비와 조세제도
  • 2) 조세제도
  • (1) 전조

(1) 전조

 삼국시대에도 租·調·役의 수취는 물론 있었다. 그러나≪三國史記≫에 보이는 租가 곧 田租라고 볼 만한 근거는 없다. 국가적인 量田 사실이 확인되지 않고 있으며 토지소유량의 차이를 곧바로 수조액의 차이로 연계할 만큼 조세제의 역사가 성숙했다고 보이지도 않기 때문이다. 삼국 중 현물의 수취액이 구체적으로 전해지고 있는 고구려의 경우를 참고해 보면, 고구려의 중기까지는 호별 재산의 차이가 문제가 되지 않는 일률적인 정액의 수취가 실시되고 있었다고 보인다. 후기에 가서 사회·경제적 분화가 심화되면서 3등호제에 의한 戶租가 부가되었지만 세액의 차이는 미미한 것이었다.0383)金基興,<6·7세기 高句麗의 租稅制度>(≪韓國史論≫17, 서울大, 1987), 30∼40쪽. 상대적으로 선진적인 고구려의 조세수취가 이러하였을 때 신라 조세제의 내용이 어떠했는지는 짐작이 가는 일이다. 아마 戶別 재산차이 등이 크게 문제되지 않은 채 동액의 수취액이 일률적으로 민에게 부과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다가 중고기말에 이르러 호별 재산상의 차이가 문제되는 정도에 이르렀을 것이다. 이 같은 점은 위에서 언급한 고구려의 경우와 이어서 보게 될 통일신라기의 세제의 실상을 보면 어느 정도 추정이 가능하다.

 통일신라기에는 토지의 면적에 따라 조세가 부과되었다. 토지의 면적은 結負制로 측량되고 표시되었다. 신라촌락문서에 의하면 모든 경작토지의 면적이 結·負·束의 단위로 자세히 파악되고 있다. 이 같은 양상은 통일신라기 금석문 자료들에서도 확인된다.0384)예를 들자면≪朝鮮金石總覽≫上에 실려 있는<大崇福寺碑銘>·<鳳巖寺智證大師寂照塔碑銘>·<開仙寺石燈記>·<大安寺寂忍禪師照輪淸淨塔碑銘>등이 있다. 다양한 지역들에 관련된 적지 않은 자료들에서 이 같이 토지의 면적이 자세히 파악되고 있음을 볼 수 있는데 이는 국가적인 양전작업이 있었음을 보여 준다.≪고려사≫와≪고려사절요≫의 고려 太祖 즉위초의 조세관련 기사에 의하면, 태조 왕건은 궁예가 舊制를 지키지 않고 1結에 6石의 租를 거두었던 사실을 비판하며 ‘一負에 租三升’을 내도록 하게 하라는 내용이 보인다. 고려 태조 즉위년(915)은 아직도 신라가 존속하고 있었던 때인데 물론 그에 앞서 왕위에 있었던 궁예도 토지면적에 따라 田租를 수취했던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사실들로 볼 때 통일신라기의 전조는 결부제에 의하여 면적의 크기에 따라 수취되었음을 알 수 있다. 결부제에 의한 전조의 수취는 조선시대에까지 그 기본이 유지되었다.

 결부제의 시원은 삼국시대에 있었을 가능성이 크지만, 그것이 국가의 수취기준으로서 일반적으로 적용하게 된 것은 통일신라에 와서의 일이다. 그런데 면적량에 따른 수취는 오늘날의 감각으로 보아서는 지극히 자명한 일이라 여겨지는 면이 있지만, 조세제의 역사로 볼 때는 결코 쉽게 시행될 수 있었던 일이 아니었다.

 앞에서도 잠시 언급했지만 신라를 위시한 삼국의 조세수취가 각 호의 재산의 크기에 정비례한다거나 그에 준하는 기준이 적용되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국가가 성립되기 이전부터 있었을 공동체 성원으로서의 균등한 의무분담의 관성과, 사회경제적 분화의 미숙함, 그리고 많은 富를 소유하게 된 고대적 지배층의 특권의식, 나아가 국가행정력 및 과학기술 등의 한계에서 재산의 정확한 파악이나 그에 비례한 수취의 실현이란 쉽게 달성될 수 없었다. 그러다가 삼국시대 후반에는 농업의 발전에 따라 사회경제적 분화가 심화되고, 전공에 따른 포상과 전쟁의 피해에 따른 자영소농층 다수의 피해가 누적되는 역사상이 펼쳐졌다. 이 같은 변동상은 민의 지위의 재편을 가져왔는데 전체적으로 볼 때 전시기에 비해 민의 지위가 향상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이러한 가운데 삼국이 통일되고 국가의 대대적인 체제정비작업이 진행되었다. 그 과정에 토지제도에 대한 정비도 있었다. 특히 신문왕 7년(687)의 문무관리에 대한 관료전의 지급과 성덕왕 21년(722) 丁田의 지급이 두드러진 변화였다. 이러한 토지제도의 정비는 물론 국가적 양전을 바탕으로 하였다. 양전을 통하여 토지가 측량되고 문서가 작성되었다. 일반민이 보유해 오던 토지의 소유권이 이제 국가에 의해 인정되게 되었다. 약간의 課田도 지급되었다. 국가는 민이 소유하게 된 토지를 ‘烟受有田畓’이라고 명명하였다. 민이 본래 보유해온 토지이지만 왕토사상, 국가의 양전사업과 토지소유권의 보장에 의해 이 같은 토지명은 백성들에게도 설득력있게 받아들여졌을 것이다.

 전국적인 양전을 통한 연수유전답제의 실현은 이 시기까지의 농업사의 일단계 정리의 면을 가진 것이었다. 그리고 새로운 출발점이 된 것도 물론이다. 토지의 소유권을 국가적으로 보장해 주었던 것이다. 한편 이 같은 과정에서 종래의 보유지뿐만 아니라 無主地나 陳田 등을 민에게 지급해 줌으로써 국가 즉 왕권의 존재는 확고한 위치를 가질 수 있게 되었다고 여겨진다.

 양전을 통한 소유권의 인정과 일부 토지의 지급으로 국가는 ‘연이 받아 가진 땅’ 즉 ‘국가(왕)가 준 전답’에 대하여 보다 체계적이고 강도 높은 수취를 실현할 수 있게 되었다. 소유권을 인정한 만큼 그 면적에 비례하여 전조의 수취를 요구할 수 있게 되었을 것이다. 사회경제적 분화도 미흡하고 특히 국가가 양전이나 토지의 일반적인 지급행위 등을 실시하지 못한 삼국시대에는 국토내에 있는 경작지에 대한 국왕의 권한이란 관념적으로도 다소 어렴풋이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통일전쟁의 승리를 통해 높아진 왕실의 위상에서 양전을 실시하여 민의 토지소유권을 인정해 주고 일부 토지를 지급하게 될 때 일반민은 전 시대와는 다르게 왕권의 존재를 실감하고 결부제에 의한 전조의 수취와 같은 대변화를 받아들이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각각의 호는 소유·경작하고 있는 토지의 結負束의 양에 따라 전조를 내게 되었다. 그러면 田租의 세율은 어떠했을까. 통일신라의 조의 세율에 관하여는 고려 태조 즉위년에 있었던 기사를 통해 어느 정도 추정이 가능하다고 본다. 다음에 기사들을 인용해 보겠다.

① 太祖 원년 7월에 해당 관에 말하기를 ‘泰封의 왕이 백성으로 하여금 욕심만을 좇아 거두어들이기만을 일삼아 舊制를 따르지 않고 1頃의 田에 6碩의 세를 거두고 驛戶에게도 絲 3束을 부과하니 백성으로 하여금 농사와 베짜기를 그만두게 하여 도망함이 서로 이어졌다 지금부터는 賦稅를 거둠에 마땅히 舊法에 따르도록 하라’ 하였다(≪高麗史≫권 78, 食貨 1, 田制 租稅).

② 大司憲 趙浚 등이 上書하기를… 신라의 말기에 토지를 가짐이 고르지 않고 賦稅가 무거워 도적이 떼지어 일어났다. 太祖께서 왕위에 오른 34일에 여러 신하들을 맞이하여 보실 때 크게 탄식하여 말하기를, ‘근래에 세금을 지나치게 하여 1頃의 租로 6石을 거두니 백성이 살수 없게 되었으니 내가 이를 심히 가련하게 여긴다. 지금부터는 마땅히 什一을 따라 田 1負에 三升을 租로 내도록 하게 하라’ 하였다(≪高麗史≫권 78, 食貨 1, 田制 祿科田).

③ 詔하기를, ‘태봉의 왕이 백성으로 하여금 욕심만을 좇아 거두어들이기만을 일삼아 舊制를 따르지 않고 1頃의 田에 6碩의 세를 거두고 驛戶에게도 絲 3束을 부과하니 백성으로 하여금 농사와 베짜기를 그만두게 하여 도망함이 서로 이어졌다. 지금부터는 賦稅를 거둠에 마땅히 天下通法을 따라 이를 恒例로 하라‘ 하였다(≪高麗史節要≫권 1, 太祖 원년 7월).

 위의 자료들에서 태조는 弓裔의 가렴주구를 비판하면서 그가「舊制」를 따르지 않음을 비난하고 있다. 그리하여 새로 왕위에 오른 태조는 마땅히「舊法」으로써 수취를 하도록 하라고 말하였다. 구체적으로는 田 1負에 대해 租 3승 즉 1결에 대하여 2석을 거두도록 하였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구제」·「구법」이 구체적으로 어느 시대 어느 나라의 법제를 말하는지 하는 점이다. 신라왕조가 존속하고 있었으므로 일단 통일신라가 혼란하기 이전의 법제라고 볼 만하다. 그러나 ②에서「什一」세가 ③에서는「天下通法」으로 나타나고 있어 이 같은 손쉬운 단정을 막고 있다. 이 같은 점에서 고려 태조가 십일세를 걷고자 한 것은 통일신라의 법제에 따른 것이 아니라, 새 국가를 개창함에 있어서「取民有度」의 정신에 입각하여 전단계에 비해 훨씬 가벼운 이상적인 중국의「십일세」를 표방하게 되었다고 보는 경우도 있다.0385)金哲埈,<韓國古代社會의 性格과 羅末·麗初의 轉換期에 대하여>(≪韓國史時代區分論≫, 乙酉文化社, 1970), 46쪽.

 위의 자료들을 볼 때「舊」의 대상 시기는 통일신라 나아가 신라가 될 가능성은 크지만 그것만이라고 단언할 수 없는 것은 사실이다. 고려시대 중·후기 문인들도 십일세가 천하통법이라는 인식은 확실히 있었다.0386)李奎報,≪東國李相國集≫권 19, 乙酉年大倉泥庫上樑文.
李齊賢,≪益齋亂藁≫권 9下, 策文.
이렇게 볼 때 문제의「구법」·「구제」를 통일신라의 법제와 연결시키는 것이 쉽지 않은 점도 있다. 그러나 아직도 통일신라가 지속되고 있는 상황에서 고려 태조 즉위년에 있었던 사실을 보다 역사적 현실에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王建과 같은 영웅이 일국의 왕으로까지 된 과정에서, 민에 대한 통치를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에 대해 고민이 없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중국사에서 오랜 세월을 두고 이상적인 수취로 이해되어 온 천하통법인 십일세를 알게 되고 그것의 시행을 결심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이 천하통법이 고려초부터 바로 실시되었다고 보면, 이 법은 현실성의 여부를 떠나 있던 관념상의 통법이 아니라 그 시점에서 그것을 받아들일 만한 여건들이 성숙되어 있었음도 자명하다. 따라서 궁예를 가리켜「구법」즉「통법」을 지키지 않는 포악한 자라고 비난하는 것은 왕건만의 판단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당시 사회의 전반적 수준에서 이미 문제가 되었던 것이다. 이 같은 비난은 왕건만이 문제점을 느끼게 되어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고 일반민까지도 모두 공감하고 있는 현실에서 나올 수 있었다고 여겨진다.

 왕건의 궁예에 대한 비판의 기준이 되고 일반 백성들까지도 그를 판단하는데 기준이 되고 있는「구법」·「구제」는 무엇이었을까. 통일신라말 후삼국시대의 사람들이 고대하는 새롭고 획기적인 「천하통법」이었을까. 혼란의 와중에 있는 당시대인들이 포악한 궁예나 신라의 귀족 또는 탐학한 호족들을 향하여 원망할 때 그들은 무엇을 기준으로 생각했을까. 일단은 자기들이 경험했거나 아니면 조상들이 경험했던 법제들, 지금은 死文으로 남아 있던「구법」이 아니었을까 한다.「천하통법」이라는 것은 어느 개인에 의해 발견되거나 도입되는 것이 아니고 오랜 역사의 과정을 거치면서 모든 사람들에게 알게 모르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 것임을 생각해야 하겠다.

 십일세가 통법이라는 관념이 왕건과 그로부터 200년 내지 400년 정도 뒤에 살았던 李奎報·李齊賢에 있었던 것을 생각할 때, 왕건이 제시한「천하통법」은 그가 살았던 때로부터 150년 정도 이전의 8세기 중반에도 받아들여질 만한 것이 아니었을까 한다. 중국인들에게서「천하통법」으로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던 십일세를 통일신라기의 정책입안자들이 모를 이유가 없음도 물론이다.≪高麗史≫에서 사용된「구제」·「구법」의 용례도 흔히 話者가 속해 있는 고려왕조 내의 앞 시기에서부터 사용되었던 법제로서 당시에는 실시되고 있지 않았거나 효용이 문제되는 법제를 말하고 있다. 고려 태조 즉위년은 아직도 신라가 지속되고 있는 한 이때의 구제와 구법은 통일신라시대에 사용되던 법제를 지칭하는 것이라 생각된다.

 이상의 논리를 정리하면 통일신라말, 왕건의 즉위년에 나타나고 있는 십일세는 통일신라의 체제완성기 즉 8세기 중반에 결부제에 의한 전조의 수취가 실시되면서 적용되기 시작했던 것이라 여겨진다.

 전조로 수취된 곡물은 조와 쌀 그리고 콩이 중심이 되었다. 삼국시대 고구려에서는 주로 조로써 현물세를 거두었고 백제에서는 쌀을 거두었는데, 통일신라에도 삼국시대의 농업형태가 지속 발전되었던 이상 이 같은 곡물들이 전조로 수취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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