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9권 통일신라
  • Ⅲ. 경제와 사회
  • 1. 수공업과 상업의 발달
  • 1) 수공업의 발달
  • (1) 궁중수공업과 관영수공업

가. 궁중수공업

 궁중수공업은 중고기에 왕실의 소유권을 확보하는 데서부터 비롯하였다. 곧 內省 산하의 관제를 정비하는 것과 흐름을 같이하여 6부의 생산조직을 국왕 직속으로 귀속시켜 나가는 과정에서 신문왕 원년(681) 本彼宮을 수반으로 하는 궁중수공업의 체계를 정비하였다.0396)朴南守,<新羅 宮中手工業의 成立과 發展>(≪東國史學≫26, 1992), 127∼139쪽.
―――,<궁중수공업의 성립과 정비>(≪新羅手工業史≫, 신서원, 1996).
그 후 경덕왕 18년(759) 관호개혁을 전후하여 기술적 발전을 더함으로써 생산공정별로 매우 분업화되고 협업화된 체계를 갖추었고, 애장왕 2년(801) 御龍省의 정비 및 승격에 수반한 관제개혁으로≪三國史記≫職官志 中에 보이는 조직으로 완비하였다.

 궁중수공업의 생산물품은 진골신분과 이에 준하는 투항왕족 및 당나라 장수ㆍ사신에게 내린 물품과 대외교역품 등에서 살필 수 있다. 이들은 대개 金ㆍ銀ㆍ銅 등의 광물류와 果下馬ㆍ美髢ㆍ海豹皮 등의 특산물, 牛黃ㆍ人蔘 등의 약재, 그리고 그 밖의 고급 직물류와 금은세공품, 침ㆍ금은침통 등의 의료기재 등이었다.

 광물류는 鐵鍮典에서, 금은세공품은 南下所宮에서 각각 관장하였다. 직물류는 국왕의 사여물과 교역품 가운데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데, 이들 직물류 관련 궁중수공업 관사로는 繅絲(고치를 켜는 일)를 맡는 䟽典, 실을 정련한 후 표백을 맡는 漂典, 염색을 맡는 染宮과 紅典 및 옷감을 짠 후에 印染을 맡는 攢染典, 직접 각각의 종류별 옷감을 생산하는 錦典(織錦房)ㆍ朝霞房ㆍ綺典(別錦房) 등이 있었다.

 이 가운데 조하방은 다른 관사와 달리 경덕왕의 관호개혁 때에 이르러 비로소 그 이름이 보이고 있다. 이는 기왕에 금전에서 생산되었던 朝霞紬·魚霞紬 등에 대한 중국의 선호도가 높아지자 경덕왕 18년(759) 무렵 별도의 관사로서 새로이 설치되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금전은 8세기 중엽에 조하방과 직금방으로 분리되고, 기전은 그 중요성에서 두 직물류에 밀려 별금방이란 이름으로 바뀌게 되었다. 이와 같이 직조관계 관사가 조공물품과 관련하여 정비되었다는 것은, 궁중수공업을 운영하는 목적 가운데 하나가 중국과의 조공에 필요한 물품을 충당하는 데 있었음을 보여준다. 細布의 경우도 7세기 무렵에 이미 20승·30승·40승 등 올이 섬세한 물품을 생산할 수 있었는데, 베류(布類)에서 쌓은 이러한 직조기법은 기술적 발전을 더하여 마직·모직물의 직조에도 응용되었다. 9세기 무렵에 나타난 30升紵衫段이나 40升白氎布 등이 그 실례라 할 수 있는데, 이들은 각각 麻典(織紡局)과 毛典(聚毳房)에서 생산되었다.

 한편 옷감에 무늬를 찍는 印染과 실을 염색하는 染絲의 과정은 염료의 생산을 전제로 하며 직물의 가치와 직접 관련된 것으로서, 蘇木을 길러 염료를 채취하는 蘇芳典, 직접 인염과 염사를 맡은 攢染典·染宮·紅典 등의 관사가 있었다. 또한 曝典에는 屬縣이 딸려 있었는데 중국 남북조시대의 暴室에 비교할 수 있어,0397)唐長孺,<魏晋至唐官府作場及官府工程的工匠>(≪魏晋南北朝史論叢≫續編, 帛書出版社, 1985), 47쪽. 이와 관련하여 전문수공업 집락으로서의 ‘…成’을 상정하기도 하지만(井上秀雄,<新羅王畿の構成>,≪新羅史の基礎硏究≫, 1974, 411∼415쪽;三池賢一,<新羅內廷官制考> 下,≪朝鮮學報≫62, 1972, 39∼40쪽), 대체로 내성 산하 관사로서 일정지역을 귀속시켜 운영하는 체계가 있었다는 정도로 이해해야 할 듯하다. 염색과 관련된 관사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들 염색을 맡은 관사는 서로 유기적인 협조관계를 맺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원료생산 및 공급과 염색의 모든 공정이 궁중수공업 관사의 체계 안에서 일괄적으로 처리되었다. 이는 직물생산관사나 철유전 등이 수취체제 안에서 원료를 공급받아 제품을 만드는 것과는 성격을 달리하는 것이다. 이 같은 차이의 원인은 기술적인 문제도 있겠지만 골품제사회 안에서 色服 그 자체가 하나의 신분을 나타내는 것으로서 이에 대한 특별한 관리가 필요했기 때문이었다.0398)최원희,<우리나라 삼국 및 통합신라시기의 직물생산과 염색>(≪고고민속≫1, 1963), 55∼61쪽.

 그런데 직물 생산관사가 분업화되어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가죽제품 생산관사도 가죽을 다루는 皮典(鞄人房), 가죽을 무두질 하는 打典, 그리고 직접 가죽제품을 생산하는 관사로서 말 고들개를 제작하는 鞦典, 북(鼓)류를 생산하는 皮打典, 가죽신발과 가죽장화의 제조를 각각 담당하는 鞜典과 靴典 등으로 생산공정이 분업화되어 있었다. 그 밖의 筍虞·飮器·射侯 등을 제작하는 磨典, 왕의 자리를 만드는 席典, 지팡이(机杖)·밥상·책상·탁상 등을 만드는 机槪典, 조공에 필요한 광주리(筐篚)는 대나무와 관련한 기물·건축재료·대화살(竹箭) 등을 제작하는 楊典 등이 있었다. 그러므로 궁중수공업은 매우 분업화되어 있었으며 개별화된 각 관사들은 긴밀한 협업에 의해 운영되었음을 알 수 있다.

 궁중수공업 관사에 속한 직원은≪三國史記≫職官志 中에서 확인할 수 있는데, 干-史의 계열과 翁-助·母·女子 등의 유형으로 나뉘어진다. 이들은 중국 관제와는 상당한 거리가 있는 신라 고유의 명칭으로서 중고기의 체제를 바탕으로 하여 필요에 따라 개편되었다.0399)朴南守,<궁중수공업의 운영과 변천>(앞의 책), 119∼127쪽. 이들 직원들은 대체로 大舍에는 미치지 못하고 舍知나 史에 준하는 하급관리들로서 신분적으로 4두품 정도에 불과하였으며, 대개 궁중에 소속된 노비들을 거느리고 해당 관사에서 정해진 물품을 만들었다. 이들은 확인된 수만도 100여 명에 달하는데, 밝혀지지 않은 12여 개 관사까지 포함하면 총직원의 수는 200여 명에 이를 것으로 추산된다.0400)홍희유,≪조선중세수공업사연구≫(과학백과사전출판부, 1978;서울 : 지양사, 1989), 33쪽. 이들이 어떤 방식으로 근무하였는지는 확인할 수 없으나 많은 수의 노비들이 그들의 휘하에서 잡역에 종사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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