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9권 통일신라
  • Ⅲ. 경제와 사회
  • 1. 수공업과 상업의 발달
  • 2) 상업의 발달
  • (1) 국내 상업

(1) 국내 상업

 신라 상업의 중심은 왕경의 시전이었다. 소지마립간 12년(490) 사방의 재화를 유통케 하기 위하여 市肆를 두면서 비롯한 시전은, 지증왕 10년(509) 東市典을 개설하여 관리를 배치함으로써 국가의 통제하에 들어갔다. 통일 후 왕경의 인구가 증가하고 물화의 유통이 증가하면서 효소왕 4년(695) 西市典과 南市典을 새로이 설치하였다. 이러한 시전은 왕경에만 국한되었던 것은 아니고, 신문왕 때에 9주 5소경을 설치하면서 각 소경과 지방의 주요 거점 도시에도 개설하였을 것으로 짐작되고 있다.

 시전의 개설은 도시의 발전과 흐름을 같이하는 것으로서, 신라 전성기의 경주에는 초가집이 없었고 거리 모퉁이마다 담장이 연결되어 있었으며 6部 55里 360坊의 시가 규모에 173,936호가 있었다고 한다.0433)≪三國遺事≫권 1, 紀異 1, 辰韓 및 권 5, 避隱 8, 念佛師.
李基白·李基東,≪韓國史講座≫1, 古代篇(一潮閣, 1982), 332쪽.
그런데 시전의 구역이 왕경의 동쪽에서 시작하여 서·남으로 확대된 것은 인구의 증가와 함께 왕경의 확대에 따른 조치였다고 보여진다.

 시전의 모습은 문무왕대에 廣德이 짚신을 만들어 파는 것으로써 생업으로 삼았다는 것이나,≪破閑集≫中·下의 김유신과 원효의 일화에 보이는 ‘屠沽’와 그 가운데에 婬房·酒肆 및 倡家 등이 있었다는 등에서 그 번성하였던 모습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혜공왕 4년(768) 신라를 다녀간 당나라 사신 顧愔의≪新羅國記≫를 바탕으로 하여 찬술된 것으로 보이는≪新唐書≫新羅傳에 “市에는 모두 婦女가 貿販을 한다”라고 한 것은 오히려 통일기 왕경의 시전 모습과 차이가 있다. 이≪신당서≫의 기사는 왕경에 있는 시전의 모습이라기 보다는 場市의 모습이거나,0434)홍희유,≪조선상업사≫(과학백과사전출판사, 1989) 35쪽. 아니면 鄕市의 모습이었을 것으로 추측하기도 한다.0435)劉元東,<古代-高麗時代의 市場形成史>(≪都市問題≫2-8, 한국도시행정협회, 1967), 27쪽. 그러나 이로부터 100여 년 뒤의 기록이긴 하지만<竅興寺鐘銘>이나<寶林寺普照禪師彰聖塔碑銘>에서 엄청난 양의 철을 市買했던 사실을 확인할 수 있어 막대한 양의 철 등을 매입할 수 있는 시전의 존재를 상정할 수 있다.0436)<新羅竅興寺鐘>(黃壽永 編,≪韓國金石遺文≫, 一志社, 1976), 288쪽.
金穎 撰,<寶林寺普照禪師彰聖塔碑>(≪朝鮮金石總覽≫上), 63쪽.
더욱이≪三國史記≫弓裔傳에 보이는 ‘鐵圓市廛’이나≪三國遺事≫王曆 後高麗條의 ‘油市’ 등의 존재에서 지방의 시전과 한 가지 물품만을 판매하는 전문 시전이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어, 오늘날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신라의 시전이 훨씬 발달하였고, 국내상업이 융성하였던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들 시전에는 관리가 파견되었는데, 동·서·남시전에는 각각 ‘監(2명)-大舍(主事, 2명)-書生(司直, 2명)-史(4명)’을 배치하여, 총 30명의 관리들이 왕경의 시전 업무를 담당하고 있었다. 이는 신라 여타 관부나 당나라 兩京諸市署의 ‘令(1명)-丞(2명)-錄事(1명)-府(3명)-史(7명)-典事(3명)-掌固(1명)’의 직원구성과 비교했을 때에 결코 적은 인원은 아니었다. 이들 시전의 관리들이 어떠한 일을 관장했는 지는 분명하지 않으나, 당나라의 경우 財貨의 交易과 度量器物의 眞僞輕重을 판별하는 역할을 하였던 것0437)≪新唐書≫권 48, 志 38, 百官 3, 兩京諸市署.으로 보아 신라의 경우도 그러했을 것으로 믿어진다. 곧≪三國史節要≫신라 儒禮王 15년조에는 印觀과 署調의 교역에 따른 미담을 掌市官이 국왕에게 아뢴 이야기가 전하는데, 비록 전적으로 이 기사를 신빙할 수 없을지라도 신라 시전의 관리들이 시전의 교역에 관한 업무를 관장했음을 짐작케 한다. 또한 문무왕 5년(665) 도량형의 개정 사실과 5升許器·5斗器 등 법제화된 量器의 존재를 볼 수 있는데, 그러한 도량형의 제정과 정형화된 양기 등은 결국 시전의 교역에 필요한 것으로서 시전의 관리들이 관장하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신라가 시전을 설치한 것은<聖德大王神鐘銘>의 ‘들에서는 근본인 농사에 힘쓰고, 시전에는 넘쳐나는 물건이 없었다’는 데에서 볼 수 있듯이, 시전을 통하여 재화의 수급을 조정하고자 한 때문이었다.

 한편 신라는 통일 이후 9주 5소경을 설치하고 北海通·鹽池通·東海通·南海通·北傜通을 설치하여 모두 왕경의 5역 곧 乾門驛·坤門驛·坎門驛·艮門驛·兌門驛을 통하여 왕경에 이르도록 하였다.0438)井上秀雄, 앞의 글, 399∼405쪽. 물론 이러한 교통망의 정비는 군사·행정적인 목적도 있었겠지만 세금의 징수 및 각 지방의 물산을 왕경에 집산시키기 위한 의도도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물산의 집산은 주로 상인들이 육로나 해로를 통하여 그 역할을 담당하였을 것이다. 사실≪三國遺事≫塔像, 敏藏寺條의 ‘長春이 海賈를 따라 장사에 나갔다’는 구절에서, 경덕왕 4년(745) 무렵에 이미 海商이 존재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들 해상은 처음에 세금이나 공물 등의 조운0439)漕運은≪三國史記≫권 7, 新羅本紀 7, 문무왕 11년(671) 7월조의 “人力疲極 牛馬死盡 田作失時 年穀不熟 所貯倉粮 漕運竝盡”이란 문무왕의 薛仁貴에 대한 답서에서 확인된다. 특히≪日本書紀≫권 21, 嵯峨天皇 弘仁 2년(811) 8월 계유조 기사에서 漕運에는 해당 지방민이 동원되었음을 알 수 있다.에 종사하던 이들이 각 지역의 특산물을 轉運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것으로 짐작되는데, 이들은 왕경의 출입항이었던 울산의 개운포를 통하여 왕경의 시전에 물품을 공급하거나 각 지방에 왕경의 물품을 轉賣하였을 것이다.

 결국 왕경이나 지방의 거점 도시에 설치된 시전에서는 일반 민간인의 일용품 외에도 철이나 기름, 흥덕왕 교서에 보이는 것과 같은 서역 물품 및 심지어는 노비들까지도 매매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물품은 민간 수공업자와 부녀자들에 의한 행상, 그리고 육운·해운 등을 통하여 매매되었다. 이들 시전에서는 布와 米穀을 주요한 교환수단으로 이용하였다. 특히 무열왕 때에 도성안 시장의 물가가 포 1필에 租 30섬 또는 50섬이라고 한 것이나0440)≪三國遺事≫권 1, 紀異 2, 太宗春秋公. 문무왕 5년(665)에 絹布의 길이 단위를 ‘10尋/匹’에서 ‘길이 7보·너비 2척/필’로 고친 것은 당시에 미곡과 견포가 교환의 기준이었음을 반영하는 것으로서, 이는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뒤에 일어난 사회경제적 변화에 부응한 것이었다.

 신라의 삼국통일로 농업생산력을 비롯한 사회 제반 생산력이 향상되고 국내 상업이 활발해지자, 국가로서는 이를 위하여 화폐를 제조하였을 가능성도 있다. 사실 신문왕 5년(685)에 건립된 사찰인 望德寺의 승려 善律이「錢」을 시주하여 6백 반야를 조성하고자 하였다는 데서,0441)≪三國遺事≫권 5, 感通 7, 善律還生. 그 실상은 잘 알 수 없지만 국가가 교역을 장려하는 과정에서 鑄錢을 했을 가능성을 상정할 수도 있다. 이에 대하여≪海東繹史≫錢貨條에는 신라가 금은으로 대·소 두 종류의 무문전을 만들어 유통하였던 듯이 서술하고 있으나 그 근거 등이 분명하지 않아 확언하기 힘든 실정이며, 신라 말엽 왕경 주변에서 麤布를 물품화폐로서 이용한0442)≪高麗史≫권 33, 志 33, 食貨 2, 貨幣. 흔적들이 보일 뿐이다. 아무튼 주전의 시행여부와 관련없이 일반인들은 대체로 포와 쌀을 교환수단으로 이용하였다.0443)≪增補文獻備考≫권 163. 당시의 물가는 분명하지 않지만, 무열왕 때의 市價와 관련하여 布 1匹을 기준으로 대표적인 물품 곧 租·金·鐵(鍮) 등의 물가를 추산하면 다음<표>와 같다.0444)물론 이러한 물가의 산출에 있어서 물가의 변동이나 시대적 차이 등은 자료가 없으므로 전혀 고려할 수 없지만, 그 산출법은 朴南守,<金大城의 佛國寺 造營과 그 經濟的 基盤>(≪新羅文化祭學術發表會論文集≫18-佛國寺의 綜合的 考察-, 1997), 69∼70쪽 참조.

구 분 鍮(鐵)
최저가(/포 1필)  30石 약 13分 약 13廷
최고가(/포 1필)  50石 약 21分 약 21廷
단 가 1石/石 2.3石/分 2.3石/廷

<표>물가 추산표 (기준가:布 1匹)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