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9권 통일신라
  • Ⅲ. 경제와 사회
  • 2. 귀족의 경제기반
  • 4) 문무관료전

4) 문무관료전

 신라는 율령체제 정비의 일환으로 神文王 7년(687)부터 문무관료전제를 실시하였고, 신문왕 9년에는 녹읍제를 폐지하고 관료에게 녹봉을 지급하는 제도를 마련하여 실행하였다. 문무관료전에 대해서는≪三國史記≫신문왕 7년 5월조에 왕이 “下敎하여 文武官僚에게 田을 내리되 差가 있게 하였다”는 기록이 있으나 신라말까지 문무관료전을 폐지했다는 기록은 없다. 그럼에도 경덕왕 16년(757)에 녹읍이 부활될 때에 관료전도 녹봉과 함께 폐지되었다는 주장이 있다.0503)姜晋哲, 앞의 책, 7∼8쪽.

 그러나 경덕왕 16년에 문무관료전이 폐지되었다고 볼 경우에는, 후기녹읍이 전기녹읍과 같은 형태로 부활되었다고 하는 견해와 동일한 논리적 모순에 빠질 우려가 있다. 즉 문무관료전을 지급하는 제도를 마련한 목적이 율령제적인 토지제도를 확립하는데 있었다면, 경덕왕대에 율령제를 지향하는 개혁이 국정전반에 걸쳐 이루어지고 있는 와중에 율령제를 유지하는 根幹이라고도 할 수 있는 문무관료전제를 돌연 폐지했다는 것은 아무래도 납득하기 어렵다. 다른 모든 제도는 율령제를 더욱 강화시키는 형태로 개혁을 단행하면서 유독 문무관료전제만을 폐지하였을 것인가. 그렇지는 않았을 것이다. 경덕왕 16년에 문무관료전제가 폐지될 수 없었음은 율령제를 지향한 개혁의 방향에 비추어 너무도 명백해보인다.

 더욱이 헌덕왕 7년(815)에 작성된 신라장적에 內視令畓과 村主位畓이 기록되어 있다는 사실은 문무관료전이 경덕왕 16년(757) 이후에도 계속 지급되었음을 나타낸다. 그러므로 문무관료전이 폐지되었다는 기록이 보이지 않는 사실 그 자체가 실제 문무관료전제가 폐지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고 하겠다. 이에 문무관료전은 신문왕 7년(687)부터 지급되기 시작한 이래로 중간에 폐지되지 아니하고 신라말까지 존속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0504)盧泰敦, 앞의 글, 158쪽.

 문무관료전의 성격에 대해서는 신라장적에 보이는 내시령답과 촌주위답을 통해서 살펴볼 수 있다. 내시령답은 內視令이라는 관직을 가진 관료에게 지급된 토지로서 연수유전·답에 포함되어 있지 않다. 촌주위답은 촌주의 직역에 대한 대가로 주어진 토지로서 연수유전답에 포함되어 있다. 연수유전답은 소유권이 농민에게 있는 私田이다. 따라서 연수유전답에 포함된 촌주위답도 사전이다. 촌주위답과는 달리 연수유전답에 포함되지 않은 내시령답은 소유권이 국가에 있는 公田이다. 이는 연수유답에 포함되지 않은 官謨田畓이 고려시대의 공해전에 해당하는 공전이었다는 사실에서 뒷받침된다.

 내시령답을 문무관료전이었다고 보면, 신라의 문무관료전은 공전 즉 국유지 위에 설정된 토지로 파악할 수 있다. 고려시대 공전의 수조율이 4분의 1이었던 사실에 비추어 신라 통일기에 문무관료전으로 분급된 공전의 수조율도 4분의 1이었을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0505)李仁哲,≪新羅村落社會史硏究≫(一志社, 1996), 217쪽.

 문무관료전이 이름 그대로 문무관료에게만 지급된 토지였는지, 아니면 고려시대의 전시과처럼 官職이나 職役에 종사한 자들에 대하여 토지를 분급하는 제도였는지도 해결되어야 할 과제이다. 만일 신라의 문무관료전이 고려의 전시과에서처럼 관직이나 직역에 종사한 자들에 대하여 토지를 분급하는 제도였다고 하면, 촌주위답도 문무관료전에 포함된다고 볼 수 있다. 촌주위답이 연수유전답 위에 설정되었다는 사실은, 문무관료전이 연수유전답 즉, 사유지 위에 설정된 토지였음을 나타낸다.

 앞에서 살펴본 바에 따르면 신라의 귀족관료는 많은 사유지를 가지고 있었다. 국가는 귀족의 사유지에서도 조세를 수취해야 했다. 귀족이 관직에 나아가 관료가 되면 국가는 문무관료전을 지급해야 했다. 한편으로 귀족의 사유지에서 조세를 거두고, 다른 한편으로 문무관료전을 지급하여 조세를 수취해가도록 하는 번거러운 절차를 간소화하는 방법으로는 촌주위답의 경우처럼 귀족의 사유지를 문무관료전으로 지정하여 조세를 면제하는 방법이 있을 수 있다. 귀족의 사유지도 연수유전답의 일종이다. 따라서 귀족이 그들의 사유지를 문무관료전으로 지정받았을 경우에 10분의 1세를 면제하는 방법이 있을 수 있다. 가령 내시령은 왕경인 출신으로 적어도 4두품 이상의 신분으로 임명되었을 것이므로 서원경 지역에 분급받은 내시령답 4결 이외에도 왕경지역에 자신의 토지를 가지고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이 때 내시령은 서원경 지역의 내시령답에서 4분의 1조를 수취하고 왕경지역에 있는 자신의 토지에 대해서는 10분의 1조를 면제받았다는 것이다.

 이는 문무관료전으로 공전과 사전이 모두 지급될 수 있다는 의미가 된다. 그러나 공전을 지급받았을 경우에는 사전의 5분의 2 정도에 해당하는 면적의 토지를 분급받았다. 여기서 토지를 지급하였다는 말은 收租權(해당 관료의 사유지를 분급할 경우에는 免租權)을 분급하였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문무관료전은 해당 관료가 관직에서 물러나거나 죽으면 수조권을 국가에 반납해야 하는 토지였다. 하지만 골품에 따라 관직에 진출을 보장한 신라사회에서는 귀족의 자손들이 관직에 나아감으로서 자손 대대로 수조권을 행사하거나, 사유지를 분급받았을 경우에는 면세의 특권을 누렸다.

 문무관료전은 관직과 관등에 기준을 두어 지급된 토지였다.0506)李喜寬,<統一新羅時代 官僚田의 支給과 經營>(≪新羅産業經濟의 新硏究≫13, 新羅文化宣揚會, 1992), 64쪽. 주지하듯이 신라에서는 신분등급에 따라 관등·관직에 오를 수 있는 상한선을 규정하여 놓았지만, 특정 관직에 취임할 수 있는 관등을 단일 관등으로 규정하지 않은 채, 이를 복수의 官等群으로 묶어 놓았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신라에서는 같은 관직이라 하더라도 관등이 다르고, 관등이 다름에 따라 경제적 처우도 달랐다고 생각된다. 이에 신라에서는 관료에 대한 경제적 반대급부가 관직보다는 관등에 기준을 두어 지급되었다고 보아야 하겠다.

 관등에 기준을 두어 관료에 대한 경제적 보수가 지급되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골품의 제약을 받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문무관료전을 포함한 녹읍과 녹봉 등의 관료에 대한 경제적 반대급부는 고려의 始定田柴科에서 紫衫·丹衫·緋衫·綠衫의 구분에 의하여 田柴가 지급된 형태와 유사하였다고 생각된다.0507)金哲埈,<新羅 貴族勢力의 基盤>(≪人文科學≫ 7, 1962;≪韓國古代社會硏究≫, 知識産業社, 1975, 233쪽).
尹漢宅,<新羅 骨品貴族의 經濟的 基盤>(≪邊太燮博士華甲紀念史學論叢≫, 1985), 178∼193쪽.
신라에서는 골품의 제한 규정에 묶여 승진하지 못하는 관료를 위하여 특진의 길을 열어주기 위해 重位制가 마련되었다. 重位의 관등을 받았다고 하여 상급 관직으로 승진할 수는 없었지만, 보수체계만은 별도의 승급규정에 따라 올려받았다.0508)李仁哲,<新羅 律令官制의 運營>(앞의 책, 1993), 137쪽. 그러므로 신라의 토지제도는 율령제적 분급체계를 지향하면서도 골품제의 제약을 극복하지 못하고, 오히려 귀족의 경제기반을 강화해주는 방향으로 전개되었다고 풀이할 수 있다.

<李仁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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