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9권 통일신라
  • Ⅲ. 경제와 사회
  • 3. 농민의 생활
  • 1) 신라장적
  • (1) 문서의 성격과 작성연도

(1) 문서의 성격과 작성연도

 西原京(현재의 충북 청주)부근 4개 촌의 사정을 기록한 문서가 1933년 10월에 일본 정창원에서 華嚴經論帙의 파손 부분을 수리하던 중에 발견되었다.0509)野村忠夫,<正倉院より發見された新羅の民政文書について>(≪史學雜誌≫62-4, 1953), 58쪽. 이 문서를 흔히 신라장적이라 불러왔다. 신라장적은 當縣沙害漸村과 當縣薩下知村이 기록된 문서와 失名村과 西原京□□子村이 기록된 문서 등 모두 2매로 되어 있다. 학계에서는 문서의 기재 순서에 따라 이들 촌을 A촌·B촌·C촌·D촌으로 불러 왔는데, 화엄경논질의 표지를 만들 때 B촌과 D촌의 문서는 끝부분이 잘려나갔고, C촌의 문서는 머리부분이 잘려나갔다. 문서의 크기는 가로 58cm 세로 29.6cm 정도이고, 楮紙로 되어 있다.

 신라장적은 縣과 小京의 지배하에 있는 村을 단위로 기재되었다. 戶를 단위로 기재된 것이 아니라 촌을 단위로 기재되었다는 점에서 신라장적은 戶籍이 아닌 村籍이라 할 수 있다.0510)旗田巍,<新羅の村落-正倉院にある新羅村落文書の硏究>(≪歷史學硏究≫226·227, 1958∼59;≪朝鮮中世社會史の硏究≫, 東京 : 法政大學出版局, 1972, 420쪽). 이 문서의 성격을 정확히 반영한 명칭은<新羅熊川州村帳籍>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명칭이 너무 길어 사용하기에 불편하므로<新羅村帳籍>혹은 그냥<村帳籍>이라 부르는 편이 적절하다. 문서의 명칭과 성격에 대한 정리는 李仁哲,≪新羅村落社會史硏究≫(一志社, 1996), 64∼69쪽 참조. 문서의 기록은 當式年의 상황을 기재한 本文과 당식년 이후의 상황을 기록한 追記로 나누어진다. 장적의 기록은 당시 율령제의 시행실태를 보여주고 있다. 9등호제·계연·남녀 연령별 구분 등은 律令의 戶令과 賦役令에 근거하여 기록되었다. 연수유전답·관모전답·내시령답·마전 등의 설정이나 우마·수목 등에 대한 파악도 田令과 賦役令에 기초하여 이루어졌다.0511)田鳳德,<新羅律令攷>(≪서울大學校論文集≫人文社會科學 4, 1956;≪韓國法制史硏究≫, 서울大出版部, 1968, 265쪽). 기재방식 또한 이 문서가 율령의 규정에 따라 작성된 공문서임을 보여준다. 구체적으로는 公式令이나 計帳式과 같은 율령의 조항에 근거하여 만들어진 공문서로 생각된다.0512)이에 따라 이 문서를 計帳으로 보는 견해가 있는가 하면(田鳳德, 위의 책, 1968, 269쪽), 計帳樣文書의 기초자료로 사용된 촌단위의 集計帳으로 파악하면서도, 녹읍제적 촌지배를 위한 집계장 혹은 녹읍장으로 보는 견해도 제시되었다(武田幸男,<新羅の村落支配-正倉院所藏文書の追記をめぐって>,≪朝鮮學報≫81, 1976, 230∼239쪽 및 木村誠,<新羅の祿邑制と村落構造>,≪歷史學硏究≫別冊, 1976, 57∼60쪽). 이 문서를 녹읍과 관련지은 근거는 문서에 보이는 內視令 혹은 內省이 이들 촌과 깊은 이해관계에 있다고 파악한 데서 비롯되었다. 그러나 이들 촌이 내시령의 녹읍이고 A촌에 보이는 내시령답이 내시령에게 주어진 관료전이라면 내시령의 녹읍 안에 있는 토지를 다시 내시령에게 관료전으로 지급하는 형태가 되어 논리적으로 맞지 않는다. 이들 촌을 내시령 혹은 내성의 녹읍으로 파악하는 근거는 D촌의 문서에 잘보이지 않는 글자를「內省」으로 판독한 데 있지만 문제의 글자는 ‘內’字가 아닐 가능성이 더 높다. 따라서 신라장적은 그 작성 주체가 국가라는 전제하에서만 이해될 수 있다.

 정창원 소장의 신라장적은 소경에 속한 촌과 현에 속한 촌의 사정이 같은 종이에 같은 필체로 기재되어 있다. 이는 소경이나 현 가운데 어느 한쪽의 지방행정기관에서 작성한 문서가 아님을 나타낸다. 그렇다고 郡에서 소경관할하에 있는 촌의 문서를 작성하였다고 보기도 어렵다. 결국 신라장적은 군·현·소경보다 격이 높은 지방행정기관인 州司에서 작성한 계장양문서의 기초자료로 작성된 公文書였다고 풀이할 수 있다.

 주사에서는 前式年에 작성한 장적과 當式年에 郡·縣·小京 등 지방행정단위별로 파악하여 보고한 자료를 근거로 현재 발견된 것과 같은 장적을 만들었다. 정창원 소장의 신라장적이 작성된 당식년은 乙未年이었다.0513)문서의 작성연도에 대해서는 695·755·756·757·815·816·875·876년 등으로 보는 견해가 제시되었다. 이들 학설에 대한 연구사는 李仁哲, 앞의 책(1996)에 정리되어 있다. 신라장적에 ‘乙未年烟見賜’라고 되어 있는 문구는 을미년에 촌의 사정을 조사하였음을 나타낸다. 을미년에 현의 하급관리인 公等이 촌에 나와서 촌의 사정을 조사하여 작성한 문서를 현령의 제가를 거쳐 주사에 보고하고, 주사에서는 전식년의 문서와 당식년에 보고되어온 문서를 토대로 장적을 작성하였다. 을미년에 문서가 작성되었다는 사실은 唐令에 ‘造籍以季年 丑辰未戌’이라는 구절을 통해서도 짐작이 가능하다. 신라에서도 3년마다 季年(丑辰未戌)에 장적을 만들었던 것이다.

 을미년은 60년을 주기로 반복된다. 이에 어느 을미년에 신라장적이 작성된 것인가 하는 점이 지적되어야 하겠다. 우선 신라장적에 보이는 연수유전답이 성덕왕 21년(722)에 처음으로 백성에게 지급한 丁田일 것이라는 학계의 일반론에 따르면, 이 문서는 성덕왕 21년 이후에 작성된 것이 된다. 경덕왕 16년(757)에 ‘西原小京’이 ‘西原京’으로 개칭되었는데 D촌이 ‘西原京□□□村’으로 표기되어 있는 현상 또한 이 문서가 757년 이후에 작성되었음을 나타낸다. 경덕왕 16년 이후의 을미년으로는 헌덕왕 7년(815)과 헌강왕 원년(875) 그리고 경순왕 9년(935) 등이 있다. 경순왕 9년은 신라가 멸망한 해에 해당된다. 자연히 신라장적의 작성연도는 헌덕왕 7년이 아니면 헌강왕 원년이 된다. 문서의 작성연도를 파악할 때 무엇보다 고려해야 점은 기재 내용의 정밀성이다. 신라의 지방통치체계가 상당히 혼란을 겪고 있었던 상황에서는 이처럼 정밀한 문서가 작성되기 어렵다. 문서의 정밀성으로 보아 신라장적은 헌덕왕 7년에 작성되었다고 보는 편이 옳다.

 追記는 당식년 이후에 이루어졌다. 현재 정창원에 소장된 신라장적은 당식년(815)에 작성하고, 次式年(818)이 되기 전에 추기를 하여, 차식년(戊戌)의 신라장적 작성에 참고자료로 사용한 후에 20년 정도 보관하였다가 폐기한 문서로 봄이 옳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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