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9권 통일신라
  • Ⅲ. 경제와 사회
  • 4. 천민의 생활
  • 2) 노비

2) 노비

 신라장적에는 4개 촌의 전체 인구 462인 가운데 노비가 25명이 기록되어있다. 25명이라는 노비의 숫자는 437명의 양인 숫자에 비하면 5.4%에 불과하다. 하지만 이는 唐代에 총인구 5천 만에 대한 노비 2백 만이 차지하는 비율인 4%보다0564)尾形勇,<良賤制の展開とその性格>(≪岩波講座 世界歷史≫5, 1970), 332쪽. 1.4%나 높은 비율이다. 이처럼 왕경에서 멀리 떨어진 西原京 부근의 촌에도 노비가 존재했다는 사실은 당시에 노비가 전국적으로 고루 분포되어 있었음을 보여준다.0565)旗田巍,<新羅の村落>(≪歷史學硏究≫226·227, 1958∼1959;앞의 책, 445쪽).

 신라장적에는 양인을 남녀·연령별로 나누어 큰 글자로 기록해 놓고, 노비의 수는 양인의 성별과 연령에 맞추어 작은 글자로 기록해 놓았다. 이는 신라장적을 작성한 국가권력이 노비를 양인과 차별대우하였고, 장적의 작성 근거가 된 신라의 율령에서도 차별적으로 규정되어 있었다는 의미가 된다.

 노비는 그 귀속대상에 따라 公奴婢와 私奴婢로 나누어진다. 공노비는 왕실이나 관아에 소속된 노비를 말하며, 사노비는 개인이나 사원이 소유한 노비를 말한다. 사노비를 다시 率居奴婢와 外居奴婢로 나누기도 하고, 納貢奴婢와 使喚奴婢로 구분하기도 한다.

 노비는 발생유형에 따라 포로노비·형벌노비·부채노비·매매노비 그리고 출생에 의한 세습노비로 구분된다.0566)盧泰敦,<統一期 貴族의 經濟基盤>(≪한국사≫3, 국사편찬위원회, 1976), 135쪽. 삼국통일을 계기로 포로노비의 공급이 중단된 반면에 부채노비가 노비발생의 중심적 요인으로 등장하였다.0567)高慶錫,<三國 및 統一新羅期의 奴婢에 대한 고찰>(≪韓國史論≫28, 서울大, 1992, 39∼56쪽).

 전쟁포로노비는 진흥왕 23년(562)에 사다함에게 포로로 잡은 200명을 상으로 주었다는 기록을 통하여 그 존재를 유추해볼 수 있다. 형벌노비는 문무왕 13년(673)에 아찬 大吐가 모반하여 唐에 붙으려다가 탄로되어 그 자신은 사형을 당하고 그 자식은 賤에 편입되었다는 기록을 통하여 그 존재가 확인된다. 부채노비의 경우는≪新唐書≫新羅傳에 곡식을 꾸고 갚지 못하면 노비로 삼는다고 한 기록에서 그 예를 찾을 수 있다. 매매노비는 눌지왕 4년(420)과 진평왕 50년(628)에 백성이 굶주리다 못해 자식을 파는 자들이 있다고 하는 기록으로 보아 역시 그 존재를 확인할 수 있다.≪三國史記≫孝女 知恩傳에도 보면 지은은 자기 몸을 스스로 婢로 팔아 홀어머니를 봉양하였다고 한다. 국왕이 관노비를 하사하여 사노비로 된 경우는 문무왕 2년(662)에 김유신과 김인문에게 하사한 노비를 들 수 있겠다.0568)≪三國史記≫권 6, 新羅本紀 6, 문무왕 2년. 출생에 의해 노비로 된 경우는 A촌의 문서에 보이는 三年間中小女子 가운데 포함된 비 1명을 들 수 있다. 신라장적은 율령에 근거하여 만들어졌다. 따라서 이 장적에 출생노비가 기재되었다는 사실은 노비의 신분세습이 율령에 규정되어 있었음을 나타낸다.

 노비는 牛馬나 기타 재물과 같이 매매·증여·교환·재산분할의 대상이었다. 효녀 지은이 32세에 婢子가 되어 쌀 10여 석을 받았다는 기록으로 보면,0569)≪三國史記≫권 48, 列傳 8, 孝女知恩. 노비의 가격이 쌀 10여 석 정도였음을 알 수 있다. 물론 같은 丁婢라 하더라도 얼굴이 예쁘거나 일을 잘하는 경우는 이보다 더 비싼 가격에, 그렇지 않은 경우는 이보다 싼 가격에 매매되었을 것이다. 또 丁奴나 追子 이하의 연령에 해당하는 노비도 이보다 싼 가격에 매매되었을 터이다.

 노비와 양인 사이에 일어난 범죄에 대해서는 노비의 범죄를 가중 처벌하는 규정을 둔 것으로 생각된다. 신라에서 주인이 자신의 私奴에게 상해를 입힌 경우는≪삼국사기≫丕寧子傳에 전해진다. 이를 보면 진덕왕 원년(647)에 김유신의 독려를 받고 비녕자가 新羅軍의 사기진작을 위해 적진으로 돌격해 들어가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비령자의 아들 擧眞도 적진을 향해 돌격해 들어가려 하자, 그의 私奴인 合節이 말고삐를 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이에 거진이 합절의 팔을 끊고 적진중으로 달려가 싸우다 죽었다고 한다. 여기서 아무리 전쟁중이라 하더라도 주인이 사노의 팔을 베었다는 사실은 평소에도 주인에게는 자신의 사노에게 상해를 입혀도 범죄가 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訥催傳에서 사람들이 눌최에게 ‘종이 재주가 있으면 害가 되니 멀리 하라’고 한 말을 통해서 보면, 평소에는 國法이 엄격히 적용되므로 노비가 주인의 말을 잘듣고 구타를 당하면서도 복종하지만 전쟁터에서와 같이 生死가 혼란스러운 지경에서는 노비가 주인을 해치는 경우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에 신라에서도 주인이 노비를 가해한 경우는 범죄가 구성되지 아니하나 노비가 주인을 가해한 경우는 엄격히 처벌하였던 것으로 헤아려진다. 이에 합절은 자신의 팔을 끊은 주인을 가리켜 私天이라 하면서, ‘사천이 무너졌는데 죽지 않고 무엇하리요’라는 말을 남기고 적진으로 들어가 싸우다 전사하였다.0570)≪三國史記≫권 47, 列傳 7, 丕寧子.

 신라장적에 보이는 노비는 인간이기는 하지만 인간으로서 권리나 의무를 갖지 못한 존재였다. 이들 노비는 대부분 私奴婢였다. 노비는 조·용·조의 부담을 지지 않았다. 또 노비는 토지나 가옥을 원칙적으로 소유할 수 없었다. 이는 신라장적에서 丁奴를 제외시키면, 호등별 토지결수와 丁數를 어느 정도 일정한 비율로 일치시킬 수 있다는 사실에 근거한다.0571)李仁哲,<新羅統一期의 村落支配와 計烟>(≪韓國史硏究≫54, 1986;≪新羅政治制度史硏究≫, 一志社, 1993, 244∼246쪽). 따라서 노비를 포함시켜서 신라의 9등호제가 설정된 것으로 볼 경우에는 土地와 人丁數의 비례관계를 찾을 수 없게 된다. 이처럼 호등별 인정수에 노비를 포함시키게 되면, 토지와 인정수의 비례관계를 파악할 수 없다는 사실은 노비가 給田의 대상도 토지소유의 주체도 아니었음을 나타낸다.

 양인이 재산의 소유권이나 토지 경작권을 가진 권리 주체임과 동시에 조·용·조나 軍役의 의무를 지고 있었던 것에 비하여, 노비는 권리의 주체도 아니고 의무의 주체나 객체도 아니었다.≪삼국사기≫의 기록에 奴들이 주인과 함께 전쟁에 나아간 기록이 보이지만, 이들 노에게 군역의 의무가 부과되었던 것은 아니었다. 노비는 군역의 의무를 이행하기 위해서 출전한 것이 아니라 주인의 사유물로서 출전하였다. 그래서 公民으로서 권리와 의무가 없었던 노비는 賣買·質入·分割 등의 처분 대상이 되었다. 노비에게 의무가 주어졌다면, 율령국가의 신분구조인 良賤制를 받아들이고 인간사회의 기본질서를 존중하면서 말없이 주인이 시키는 대로 일을 할 의무만이 주어졌다.0572)李仁哲, 앞의 책(1993),173∼174쪽.

 신라장적에 보이는 노비는 사노비로서 사역되었다. 노비의 대부분은 丁年層이고, 노년층이 전혀 없으며 아이의 숫자도 아주 적다. 이에 대해서 노비는 부부와 자식이 함께 거주하는 가족생활을 하지 못하였으며 노비가 절멸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는 견해가 있다.0573)旗田巍, 앞의 책, 445쪽. 반면에 비록 어려움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노비도 어느 정도의 가족생활은 하였으며, 노비는 증가추세에 있고, 평민 사이에도 상당한 계층분화가 이루어지고 있었다는 주장도 있다.0574)金鍾璿,<正倉院 所藏 新羅帳籍에 나타난 奴婢>(≪歷史學報≫123, 1989), 60∼82쪽.

 ≪삼국사기≫孝女 知恩傳에서는 효녀 지은이 부자집의 婢子가 되어 그 집에서 종일토록 일을 하고 날이 저물어야 밥을 지어가지고 집으로 와서 홀어머니를 봉양하였다고 전한다.0575)지은은 일종의 使喚奴婢였다고 생각된다. 이를 통해서 노비도 어느 정도의 가족생활은 하였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정상적인 가족생활은 아니었음은 명백하다. 따라서 노비는 부부와 자식이 함께 동거하면서 가족생활을 영위하는 경우는 아주 드물었다고 생각된다.

 노비가 부부와 자식이 동거하는 형태의 정상적인 가족생활을 하지 못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신라장적에는 어린 노비가 기록되어 있다. 이처럼 출생에 의한 노비가 존재하는 한, 노비의 정상적인 가족생활의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노비의 공급은 계속 이루어지고 있었다고 판단된다.

 출생에 의한 노비공급원 이외에 노비공급을 가능하게 한 현상으로 촌락사회의 계층분화를 들 수 있다. 촌락사회 내부에서 계층분화가 일어나고 소득격차가 심해지면서, 일부 富農에게는 노비를 더 많이 구입할 수 있는 경제적인 여유를 마련해주었지만, 극빈층의 농민에게는 노비로 전락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어냈다. 이에 효녀 지은처럼 스스로 자신의 몸을 팔아서 노비가 되거나, 자식을 노비로 팔아먹는 경우가 있었다. 촌락사회 내부의 계층분화가 또다른 노비공급원이 되었던 것이다.0576)李仁哲, 앞의 책(1996), 190∼191쪽. 이렇게 공급된 노비는 귀족의 경제기반이 되었다.0577)盧泰敦, 앞의 글, 134∼142쪽. 하지만 노비는 신라 하대의 왕위쟁탈전에서 귀족의 사병으로 활동하여 커다란 사회불안 요소가 되기도 하였다.

<李仁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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