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9권 통일신라
  • Ⅲ. 경제와 사회
  • 5. 의식주 생활
  • 2) 식생활

2) 식생활

 통일신라는 삼국이 각기 발전시켜온 특징있는 생활문화들을 계승하였다. 식생활문화도 한데 융합되어 식생활의 큰 진전이 이루어졌고, 이를 통해 우리나라 식생활의 기본체제가 정착되었다.

 신라에서는 초기에 보리가 주로 생산되었지만 점차 벼농사가 확대되었다. 가야의 병합으로 김해일대의 평야를 장악한 신라는 이어 한강유역을 점유하고 백제를 복속시켜 서해안 평야의 벼농사 적지를 확보하였다. 삼국시대에 이어 永川 菁堤가 중수되고0611)李基白,<永川 菁堤碑 貞元修治記의 考察>(≪新羅政治社會史硏究≫, 一潮閣, 1974), 284∼287쪽. 수리시설이 더욱 확대되었다.0612)≪三國史記≫권 11, 新羅本紀 11, 원성왕 6년·헌안왕 3년 4월. 그리고 보습·따비·가래·괭이·쇠스랑 등 대부분의 농기구가 이미 정비되었고0613)金光彦,<신라시대의 농기구>(≪신라사회의 신연구≫, 서경문화사, 1987), 289쪽. 牛耕을 비롯한 농업기술도 크게 발전하였다. 국가정책적으로도 무기를 녹여 농기구를 만들고 백성들을 안정시키는 등의 배려가 있었다.0614)≪三國史記≫권 7, 新羅本紀 7, 문무왕 21년.

 이러한 조건들을 바탕으로 통일신라에서는 쌀을 비롯한 곡물의 생산이 안정되었다고 보여진다. 신라가 백제를 병합하였던 태종무열왕대에는 곡식이 풍부하여 시장에서 포 1필이 30석 혹은 50석에 거래되었고, 백성들이 盛代라 말하였다고 전해진다.0615)≪三國遺事≫권 1, 紀異 2, 太宗春秋公. 그리고 통일을 이룩하였던 문무왕대에는 커다란 창고에 쌀을 비축하였다고 한다.0616)≪三國遺事≫권 2, 紀異 2, 文虎王法敏. 이러한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듯 쌀의 생산이 확대되었으나 자연지리적 조건이 벼농사에 적합하지 않았던 지역에서는 보리·조·콩 등 잡곡의 생산이 계속되었다.

 곡물 이외에 채소와 과일·육류·수산물 등이 먹거리로 이용되었다. 채소류로는 상치·가지·아욱·순무 등이 삼국시대부터 이용되었다고 보여진다. 그리고 이 시대의 기록에서 미나리(芹)와 오이(黃瓜)를 볼 수 있다. 崔致遠의 글에서 미나리가 등장하고,0617)≪東文選≫권 47, 狀 人蔘三斤天麻一斤. 통일신라 말기의 사람이었던 崔凝의 이야기에 오이가 보인다.0618)≪高麗史≫권 92, 列傳 5 崔凝. 그리고 과일류로는 밤·잣·복숭아·오얏 등이 있었고0619)李盛雨,≪동아시아속의 고대 한국식생활사연구≫(향문사, 1992), 326∼327쪽. 최치원은 앵두를 과일 중의 진주라 하였다.0620)≪東文選≫권 47, 狀 崔致遠의 謝櫻桃狀. 불교가 전래된 이후 살생을 금지하였지만0621)≪三國史記≫권 4, 新羅本紀 4, 법흥왕 16년·권 8, 新羅本紀 8, 성덕왕 10년·권 27, 百濟本紀 5, 법왕 즉위년. 상류층에서는 육류와 수산물을 즐겼다고 보여지며 섬에서 목축을 하여 식용하였다는 기록도 있다.0622)≪新唐書≫권 220, 列傳 145, 東夷 新羅.

 통일신라 사람들은 이렇게 풍부한 곡물과 다양한 먹거리를 바탕으로 식생활을 영위하였다. 곡물은 주식으로 하고 그외의 먹거리는 부식으로 조리·가공되었으며 이를 통해 주·부식의 분리가 정착되었다고 여겨진다.

 통일신라시대 식생활 용구의 모습은 안압지에서 출토된 유물들을 통해서 많이 알 수 있다. 이 유물들은 다른 부장용 유물과 달리 실생활에서 사용되었던 것들이어서 그 가치가 매우 크다. 우선 토기는 완형 및 복원 가능한 것이 1,600여 점, 복원 불가능한 것이 약 1,000여 점 등 방대한 양이 출토되었다.0623)≪안압지발굴조사보고서≫(문화재관리국, 1978), 182∼245쪽. 그리고 기형의 대부분이 盌·皿·甁·壺 등 사용하기 편리한 것들이었다. 이러한 토기는 그 용도에 따라 음식의 조리·저장·가공은 물론 식기로도 이용되었을 것이다. 중국사서에서는 신라에서 식기로 버드나무그릇·동제그릇·질그릇을 사용하였다고0624)≪舊唐書≫권 199上, 列傳 149上, 東夷 新羅.
≪新唐書≫권 220 列傳 145, 東夷 新羅.
하며,≪삼국사기≫를 보면 금은그릇·도금그릇·유기·돌그릇·칠기 등도 이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0625)≪三國史記≫권 33, 志 2, 器用. 그리고 안압지에서는 숟가락과 젓가락도 발견되었는데, 숟가락은 이전 시기부터 출토되고 있어 숟가락을 이용하는 식생활문화가 지속되었음을 알 수 있다.0626)≪안압지발굴조사보고서≫, 391∼395쪽.

 도정에는 방아가 이용되었다. 百結先生의 이야기에 방아가 등장하고0627)≪三國史記≫권 48, 列傳 8, 百結先生. 고구려 벽화에서 보이는 디딜방아도0628)崔茂藏·임연철,≪고구려벽화고분≫(신서원, 1990) 119∼124쪽. 계속해서 이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신라에서는 겨울에 부뚜막을 만들었다고 하며0629)≪新唐書≫권 220, 列傳 145, 東夷 新羅. 안압지에서 오늘날의 풍로와 같은 화덕이 출토되었는데 여름철에는 이를 이용해서 음식을 조리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곡물의 조리에는 주로 솥이 이용되었다. 眞定師가 출가하기 전 가난했던 그의 살림 중에 다리부러진 솥 하나가 유일한 것이었다고 하는데 그의 어머니가 이 솥마저 시주하자 질그릇으로 솥을 대신해서 음식을 익혀 봉양하겠다고 하였다.0630)≪三國遺事≫권 5, 孝善 9, 眞定師孝善雙美. 이러한 기록에서 이 시대에 솥이 보편적으로 이용되어졌음을 알 수 있다.

 곡물의 조리·가공기술이 발전하여 식생활에서 밥이 주식이 되었다. 쌀을 끓여 익혀 밥을 짓는 방법은 곡물조리의 발전을 보여주는 것으로, 곡물을 가루내어 끓이는 죽에서 찌는 밥을 거쳐 짓는 밥으로 발달하였다.0631)李盛雨, 앞의 책, 380∼383쪽. 이는 쌀생산의 확대와 조리기술의 발달, 솥의 활용을 통해 이루어졌다. 그리고 곡물을 이용한 음식도 다양해졌다. 眞表律師가 不思議房에 갈 때 쌀을 쪄서 말려 양식을 삼았는데0632)≪三國遺事≫권 4, 義解 5, 關東楓岳鉢淵藪石記. 이는 미싯가루와 같은 것으로 보인다. 최치원의 글에는 단술(甘醴)이 보이며,0633)≪東文選≫권 4, 五言古詩 寓興. 金庾信이 전장에 가면서 집에 들리지도 못하고 마시고 갔던 漿水도 있었다.0634)≪三國史記≫권 41, 列傳 1, 金庾信 上. 떡은 이전 시기부터 중요한 곡물음식이었다. 백결선생의 대악은 떡치는 소리를 흉내낸 것이었고,0635)≪三國史記≫권 48, 列傳 8, 百結先生. 竹曼郞과 得烏의 이야기에는 舌餠이 등장한다.0636)≪三國遺事≫권 2, 紀異 2, 孝昭王代 竹旨郞.

 한편 이 시대에는 풍부하고 다양한 음식문화가 발달하였다. 車得公이 安吉에게 차려낸 50여 가지의 음식은0637)≪三國遺事≫권 2, 紀異 2, 文虎王法敏. 그 풍부함을 보여주며, 신문왕이 왕비가 될 집안에 보내는 예물에서 장·메주(豉)·脯·醢 등 다양한 음식을 볼 수 있다.0638)≪三國史記≫권 8, 新羅本紀 8 신문왕 3년. 음식들 중에서 주목되는 것은 국(羹)이다. 최치원의 글을 보면 밥과 함께 국이 나오고 있다.0639)≪東文選≫권 57, 書 答浙西周司空書. 이 시대 말기에 등장한 국은 이후 우리 나라 식생활에서 대표적인 부식이 되었다.0640)姜仁嬉, 앞의 책, 165쪽. 따라서 이 시대에는 밥을 주식으로 하고 장·포·해 등의 상비 기본찬물로 구성되는 일상식의 기본양식이 갖추어지고0641)尹瑞石,<신라의 음식>(≪신라사회의 신연구≫), 198쪽. 여기에 국이 더하여졌음을 알 수 있다.

 기본 상비음식 중에서 가장 중요했던 것은 장이었다. 調信의 꿈이야기 가운데 걸식하면서 추위가 더해져 곁방과 장얻기도 힘들다는 이야기가 있다.0642)≪三國遺事≫권 3, 塔像 4, 洛山二大聖觀音正趣調信. 그리고 眞定師가 출가하면서 어머니에게 하는 말에도 장과 양식이 함께 나온다.0643)≪三國遺事≫권 5, 孝善 9, 眞定師孝善雙美. 장의 원료인 콩은 우리 나라에서 일찍부터 재배되었고 널리 이용된 곡물 중의 하나였다. 장은 발효식품으로서 그 자체로 부식이 되었지만 음식의 조리와 가공에도 널리 이용되었다.

 음식의 조리에는 각종 조미료가 이용되었다. 장은 기본적인 조미료였으며 신문왕의 예물에 들어 있는 꿀·기름도 조미료로 이용되었다. 이들 조미료를 써서 다양한 맛을 내는 음식들이 만들어졌을 것이다. 그리고 소금은 음식의 조리뿐 아니라 가공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특히 해와 같은 절임류의 음식에는 필수적인 요소가 되었다. 이외에도 천초·생강·귤피 등도 조미료로 이용되었다.0644)姜仁嬉, 앞의 책, 162쪽.

 어패류와 육류는 포 또는 해로 가공되었다. 신문왕의 예물에 보이는 포는 말린 것이며 해는 절인 것으로 비축성 상비음식이었다. 절인 음식에는 채소류의 절임도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장아찌나 김치류였을 것이다. 우리 나라 식생활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김치는 이 시기부터 이용되어졌다고 여겨지며 이 때의 김치는 무우·가지 등의 채소류에 천초·생강 등을 향신료로 첨가하였다고 생각된다.0645)尹瑞石, 앞의 글, 164∼165쪽. 말리거나 절여서 가공·저장하는 방식 이외에도 발효시켜 가공·저장하는 방법이 이용되었다. 발효에 의한 가공법은 술을 빗거나 장을 만드는 데에 이용되었을 뿐 아니라 여러 음식의 가공에 이용되었다. 또한 음식물의 저장에는 얼음도 이용되었다.0646)≪三國史記≫권 4, 新羅本紀 4 지증왕 4년.
≪新唐書≫권 220, 列傳 145, 東夷 新羅.
얼음은 결빙기에 채취하여 빙고에 저장하였다가 사용하였으리라고 생각된다.

 통일신라시대는 식생활문화의 발전이 있었지만 사회구조에 따른 식생활의 계층화 모습도 나타났다. 신라사회는 골품제 사회였다. 따라서 정치적 출세 이외에도 생활의 모든 영역에서 신분의 규제를 받았으며 식생활의 영역도 마찬가지였다.≪삼국사기≫ 잡지의 기용조는 신분에 따른 기물의 한계를 정해 놓고 있으며 4두품 이하 백성들은 금은그릇, 도금한 그릇은 물론 유기와 칠기의 사용도 제한하고 있다.0647)≪三國史記≫권 33, 志 2, 器用. 이를 통해서 살펴보면 식생활 용구 외에도 주식으로 이용된 곡물, 부식으로 이용된 식품 등에서도 차별이 있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眞鑑禪師의 비에는 그가 거친 음식과 채소 한 가지만을 먹고 살았다고 한다.0648)<雙谿寺眞鑒禪師大空塔碑>(≪朝鮮金石總覽≫ 上, 朝鮮總督府, 1919). 이는 물론 그의 고행과 덕을 설명하려는 것이었지만 이를 통해 당시 사람들의 식생활에서의 실상을 엿볼 수 있다. 조세와 역역에 시달렸던 백성들의 생활은 매우 어려웠을 것이다. 통일신라의 전성기라 할 수 있는 중대에도 토지에서 이탈하는 유민들이 많이 있었고, 많은 구휼기사는 이를 반증하고 있다.0649)≪三國遺事≫권 2, 紀異 2, 聖德王.
≪三國史記≫권 10, 新羅本紀 10, 원성왕 2년.
이와는 대조적으로≪신당서≫의 재상가의 기사를 보면0650)≪新唐書≫권 220, 列傳 145, 東夷 新羅. 귀족들은 백성들의 생산물을 독점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풍요한 생활을 하였다. 그 모습은 숯으로만 밥을 지었다고 하는 헌강왕대의 기록을 통해서도 짐작할 수 있다.0651)≪三國史記≫권 11, 新羅本紀 11, 헌강왕 6년.

 한편 이 시대에는 특별음식도 발달하였다. 정월 초하루, 정월 보름, 팔월 보름 등의 節日이 삼국시대부터 생겨나고 여기에 따르는 節食도 발달하였다. 물론 지금의 것과 차이는 있었겠지만 계절에 따른 절식의 발달은 음식을 다양화시켰다. 그리고 술을 비롯한 제사음식도 발달하였다. 가락국의 제사에서 술·떡·밥·차·과실 등의 제물이 올려졌는데0652)≪三國遺事≫권 2, 紀異 2 駕洛國記. 여기에서 그 모습을 볼 수 있다. 또한 불교의 전래와 함께 차가 발달하였다. 이 시대에는 음다풍속에 관한 이야기가 자주 등장한다. 忠談師는 경덕왕에게 차를 달여드렸고0653)≪三國遺事≫권 2, 紀異 2, 景德王忠談師表訓大德. 경덕왕은 月明師에게 좋은 차를 내렸다.0654)≪三國遺事≫권 5, 感通 7, 月明師兜率歌. 차는 흥덕왕대에 당에 사신으로 다녀온 金大廉이 차의 종자를 얻어와 널리 퍼지게 되었다고 한다.0655)≪三國史記≫권 10, 新羅本紀 10, 흥덕왕 3년. 그리고 차에 곁들이는 과정류도 차와 함께 발달하였던 것으로 보인다.0656)姜仁嬉, 앞의 책, 163∼165쪽.

 통일신라시대에는 지방간의 식생활에서의 교류도 확대되었을 것이다. 삼국을 통일한 신라는 삼국의 문화를 수용하였고, 식생활문화도 신라의 수도인 경주와 지방간에 교류가 지속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각 지방에서는 그 자연적 조건에 따라 톡특한 식생활문화를 발전시켰고 이를 바탕으로 상호교류를 통해 식생활을 보다 다양하고 풍부하게 하였다. 지방간의 식생활 교류에는 시장이 큰 역할을 하였을 것이다. 통일 이전에 경주에 東市를 열었던 신라는 효소왕대에 西市와 南市를 설치하였다.0657)≪三國史記≫권 8, 新羅本紀 8, 효소왕 4년. 이를 보면 시장을 통한 상업활동이 왕성했다고 보여지며, 여기에는 식생활과 관련된 교류도 포함되었음이 분명하다. 그리고 지방도시였던 소경들은 지방문화의 중심이 되었고, 각 지방의 특징있는 음식들은 이곳을 중심으로 발달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식생활문화의 국제적인 교류도 있었을 것이다. 신라는 당의 선진문물을 받아들이려는 노력이 지대하였으며 적극적인 무역활동을 벌였다. 유학자·승려들 가운데에는 당에서 수학하고 활동하였던 인물들이 많아졌다. 그리고 당에 건너간 신라인들의 거주지인 신라방이 생겨나기도 하였다. 이 과정에서 식생활문화의 교류가 생겨, 당의 식생활문화가 우리 나라에 전해졌으며 우리의 것이 당에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한편 일본과의 문화적 접촉도 있었다. 삼국은 일본에 커다란 문화적 영향을 주었고 이는 통일신라시대에도 계속되었다. 여기에는 식생활의 요소도 포함되었을 것이며 교역을 통해서 더욱 활발한 교류가 이루어졌다고 보여진다. 이러한 식생활의 국제적 교류는 음식문화의 다양화에 크게 기여하였을 것이다.

 이상에서 통일신라시대의 식생활에 대해 살펴보았다. 여기에서 살펴본 자료들은 귀족들의 식생활에 대한 것이 대부분이어서 전체적인 식생활문화를 이해하기에는 제한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통일신라시대에 식생활문화가 전 시기보다 더욱 발달하였음은 여러 가지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우선 주식을 비롯한 먹거리의 생산이 확대되었고, 식생활 용구와 조리·가공기술의 발전으로 다양한 음식들이 만들어져 일상식의 구조가 갖추어졌다고 보여진다. 다양한 음식들의 예를 기록을 통해 확인할 수 있으며, 특별음식·절식 등도 더욱 다양화되었을 것이다. 또한 불교와 같은 새로운 문화요소와 국제교류를 통한 다른 나라의 식생활문화도 영향을 주었다고 보여진다. 아울러 삼국이 발달시킨 특색있는 식생활문화는 지방에 따라 독특한 음식들을 발전시켰을 것이며, 통일신라시대에는 지방간의 교류가 확대되면서 식생활문화를 보다 풍부하고 다양하게 되었다고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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