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9권 통일신라
  • Ⅲ. 경제와 사회
  • 5. 의식주 생활
  • 3) 주생활

3) 주생활

 통일신라시대에는 고구려·백제의 문화를 흡수하면서 더욱 발전하여 문화·예술·정치·경제에 걸쳐 많은 변화가 있었다. 그러나 주생활의 영역에서 보면 이전 시기의 주생활문화가 기본적으로 유지되면서 시간이 흐를수록 점진적으로 발전하여갔다.

 이 당시의 주생활문화는≪三國史記≫와≪三國遺事≫를 통해 살펴볼 수 있다. 헌강왕 6년(880)에는 “왕이 신하들과 함께 月上樓에 올라 사방을 바라보니 서울(慶州)의 민가(民屋)들이 즐비하게 늘어섰고 노래와 풍악소리가 그치지 않았다. 왕이 侍中 敏恭을 돌아보며 말하기를 ‘내가 들으니 지금 민간에서는 집의 지붕을 기와로 잇고 짚으로 잇지 않으며 밥을 숯으로 짓고 나무로 짓지 않는다 하니 과연 그러한가’ 하니 민공이 대답하기를 ‘臣도 일찌기 그런 말을 들었습니다’라고 하였다”0658)≪三國史記≫권 11, 新羅本紀 11, 헌강왕 6년 9월.는 기록이 있다. 왕이 오른 월상루라는 건물을 궁궐 중의 한 누각이나 궁궐 근처의 누각으로 미루어 짐작하면 왕이 본 주변의 민가는 궁궐의 옆에 붙어 있는 주택 즉, 상류주택을 말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는데, 이들은 사회·경제적으로 지배계층이었으며, 숯으로 밥을 짓고 여름에도 얼음을 사용할 수 있었던 계층일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므로 이 계층에서 제외되는 계층에서는 대부분이 짚(草)을 이용하여 초가를 짓고 장작으로 밥을 지었다고 생각할 수 있겠다.

 이 숯으로 밥을 짓는다는 기사를 뒷받침하는 풍로가 안압지에서 출토되었다.≪新唐書≫에는 “… 冬則作竈堂中 夏以食氷上 …”이라 하여 겨울에는 당중에 부뚜막을 만든다는 기록0659)≪新唐書≫권 220, 列傳 145, 東夷 新羅.이 있다. 이 기록에서 부뚜막을 겨울철에만 만든다고 가정한다면, 겨울철에는 부뚜막을 이용하여 취사와 난방을 겸했으리라 생각된다. 그리고 여름철에는 이 부뚜막을 부수어 버리는 것이 아니라 안압지 출토의 풍로와 같은 것을 이용하여 취사를 했을 것이다.

 이 풍로와 같은 형태의 것은 얼마 전까지 제주도에서 볼 수 있었는데,「봉덕화로」라 하여 난방의 기능을 겸하지 않는 옥외의 화로가 있었다. 또한 시골에서 잔치 벌일 때 임시로 솥을 걸 수 있게 만든 간이식 부엌인「한데부엌」도 같은 원리의 것이다. 이러한 풍로가 이용되었다는 사실은 상당히 발전된 주거형식을 영위하였음을 알 수 있게 해준다. 이는 신라시대의 집모양토기에서 볼 수 있는 고상주거형식이나 당시의 건물에 전돌로 바닥을 깐 것에서 추측해 볼 수 있다.

 헌강왕대는 통일신라 하대이므로 이 시대의 기록은 신라의 문화가 가장 발전했던 시기의 수도, 경주의 모습을 설명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은≪삼국유사≫에서도 “제49대 헌강왕 시대에는 서울(경주)로부터 동해 어구에 이르기까지 집들이 총총히 들어섰지만 초가집 한 채를 볼 수 없었고 길거리에서는 음악소리가 그치지 않았으며 사철의 비바람마저 순조로웠다”0660)≪三國遺事≫권 2, 紀異 2, 處容郞望海寺.라고 기록하고 있어 신라 전성기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경주의 모습을 설명하면서 “신라의 전성시대의 서울 안 戶數가 17만 8천 9백 36호에 1천 3백 60 동리(坊)요 주위가 55리였다. 서울 안에 35개의 金入宅(부자집 큰 저택을 말한다)이 있었으니 南宅·北宅·亏比所宅·本彼宅·梁宅·池上宅(本彼部에 있다)·財買井宅(金庾信의 祖上宅)·北維宅·南維宅(反香寺 아래동리)·隊宅·賓支宅(반향사 북쪽)·長沙宅·上櫻宅·下櫻宅,·水望宅·泉宅·揚上宅(梁 남쪽)·漢岐宅(法流寺 남쪽)·鼻穴宅(법류사 남쪽)·板積宅(芬皇寺 윗동리)·別敎宅(개천 북쪽)·衙南宅·金楊宗宅(梁官寺 남쪽)·曲水宅(개천 북쪽)·柳也宅·寺下宅·沙梁宅·井上宅·里南宅(亏所宅)·思內曲宅·池宅·寺上宅(大宿宅)·林上宅(靑龍이라는 절 동쪽에 못이 있다)·橋南宅·巷叱宅(本彼部에 있다), 樓上宅·里上宅·椧南宅·井下宅이다.”0661)≪三國遺事≫권 1, 紀異 2, 辰韓.라고 하였다. 이 금입택으로 불려지는 상류저택들이 서울에 들어섰다는 것은 왕권에 비례되는 막대한 권세를 누리고 있었던 유력 진골층이 있었음을 알 수 있게 해준다.0662)洪亨沃,≪韓國住居史≫(民音社, 1992), 79쪽.

 그리고 四節遊宅을 말하면서 “봄에는 東野宅이요 여름에는 谷良宅이요 가을은 仇知宅이요 겨울은 加伊宅이다. 제49대 헌강왕 때에는 성중에 초가집이란 하나도 없었으며 추녀가 맞붙고 담장이 연닿고 노래와 풍류소리가 길에 가득 차서 밤낮 그치지 않았다”0663)≪三國遺事≫권 1, 紀異 2, 又四節遊宅.라고 기록하였는데, 이 사절유택은 귀족들이 계절에 맞추어 놀러다니던 별장을 이야기한 것으로 당시의 귀족들의 생활상을 알 수 있다.

 한편 이 시대 가옥의 구체적인 모습은 신분에 따른 제한을 차등적으로 규정하고 있는≪삼국사기≫잡지의 屋舍조에서 볼 수 있는데, 그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0664)≪三國史記≫권 33, 志 2, 屋舍.

ㅇ 진골의 방은 폭과 넓이가 24척을 넘지 못하며 唐瓦(중국 기와)를 덮지 않고, 飛詹(날아갈 듯이 높이 들린 처마)을 하지 않으며, 조각한 懸魚(고기 모양을 만들어 매다는 것)를 달지 않으며, 金銀·鍮·石과 五色으로 장식하지 않으며, 담장에는 보(梁)나 기둥을 設하지 않고 石灰를 바르지 않는다. 발(簾)의 가장자리(緣)는 錦罽繡·野草羅의 사용을 금하며, 屛風에 수놓는 것을 금하고, 床은 玳瑁나 沈香으로 장식하지 않는다. ㅇ 6頭品의 방은 폭과 넓이가 21척을 넘지 못하며, 당와를 덮지 않고, 비첨과 重栿(겹들보)·拱牙(기둥 위에 架設方木)와 현어를 설하지 않으며, 금은·유·석·白鑞과 오색무늬로 장식하지 않는다. 中階와 二重階를 만들지 않고, 階石을 갈지 않으며, 담장은 8尺을 넘지 못하고, 또 그 보와 기둥을 설하지 않으며, 석회를 바르지 않는다. 簾緣은 罽繡綾의 사용을 금하고, 병풍은 수놓은 것을 금하며, 상은 대모나 紫檀·沈香·黃楊木으로 장식하지 못하고, 또 비단자리를 금한다. 重門과 四方門을 설하지 않고, 馬廐는 5匹을 둘 만하게 만든다. ㅇ 5두품의 방은 폭과 넓이가 18尺을 넘지 못하며, 山楡木을 쓰지 않고, 당와를 덮지 않는다. 獸頭(지붕 위에 얹어 놓는 獸形物)를 만들어 놓지 않으며, 비첨·중보·花斗牙(기둥 위의 架設方木)·현어를 하지 않고, 금은·유·석·銅·납과 오색무늬로 장식하지 않는다. 계석을 갈지 않고, 담장은 높이 7척을 넘지 못하며 보를 가설하지 않고, 석회를 바르지 않는다. 염연은 錦罽綾絹絁를 금하고, 큰문과 사방문을 내지 않으며, 마구는 3필을 둘 만하게 한다. ㅇ 4두품에서 백성에 이르기까지는 방의 폭과 넓이가 15척을 넘지 못하며, 산유목을 쓰지 않고, 藻井(水草를 그린 천장)을 하지 않으며, 당와를 덮지 않고, 수두·비첨·공아·현어를 만들지 못하며, 금은·유·석·동·납으로 장식하지 않는다. 섬돌은 山石을 쓰지 않고, 담장은 6척을 넘지 못하며, 또 (담의) 보를 가설하지 않고, 석회로 바르지 않는다. 큰문과 사방문을 만들지 않고, 마구는 2필을 둘 만하게 한다. ㅇ 外位의 眞村主는 5(두)품과 같고, 次村主는 4(두)품과 같다.

 이와 같이 진골을 비롯하여 그 이하의 계층의 규제는 바로 위의 계층에서 금하는 것은 자연스럽게 하부 계층에서는 언급이 되지 않더라도 금하게 되는 내용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내용을 표로 만들면 다음과 같다.

내 용 \ 신 분 진 골 6 두 품 5 두 품 4두품∼백성
방의 폭과 넓이 24척 이내 21척 이내 18척 이내 15척 이내
기와 당와 금지
지붕 구조 비첨 금지 공포 금지 조정 금지
지붕 장식 현어 금지 수두 금지
건축 재료 금은·유·석 금지 백랍 금지 동·납 금지
채색 단청 금지
기단 및 계단 중계 및 이중계 금지
계단의 석재 다듬은 돌 금지 산석 금지
담장 구조 및 높이 양동·석회칠 금지 높이 8척 이내 높이 7척 이내 높이 6척 이내
중문·사방문 금지 대문·사방문 금지
발과 병풍 장식 비단 자수의 금지
침상 재료 대모·침향 금지 자단·황양목 금지
마구간의 규모   5필 이내 3필 이내 2필 이내

<표>통일신라의 家舍規制0665)姜榮煥,≪한국 주거문화의 역사≫(기문당, 1993), 55쪽에서 전재.

 이 내용을 다시 한번 풀어보면 방의 크기는 진골의 24尺에서부터 4두품이하 백성들의 15척까지를 규정해 놓았는데, 4두품 이하 백성들의 집은 규모에서는 상당히 큰 규모이다. 그러나 이 가사규제가 해당하는 계급의 최고 상한치를 규정하고 있는 것을 감안하면 대부분은 그 이하의 공간 면적을 갖추고 있었다고 생각할 수 있으므로, 15척에 가까운 규모의 공간 크기를 가질 수 있었던 4두품은 5두품에 가까운 노동력이나 경제력을 소유할 수 있었던 일부의 계층이 아닐까 생각한다.

 기와 및 지붕 장식에 대해서는 진골·6두품·5두품·4두품 이하 평민들의 살림집에는 唐瓦와 현어를 쓰지 못하게 규정하고 있지만 5두품과 4두품 이하 평민들의 살림집에는 獸頭조각을 규제하고 있어 진골과 6두품의 신분층에서는 치미 대신에 용두나 잡상 같이 짐승머리를 조각하여 사용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공포의 규제에 대해서는 진골신분에서는 언급이 없고, 6두품 이하의 신분에서는 공아·화두아의 사용을 규제하고 있어, 진골 출신인 태종무열왕 이후 진골신분에서도 일부 살림집에 공포를 사용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 공포는 포 또는 두공이라고도 하는데 기둥의 상부에서 소로와 첨차라는 부재를 여러 층 쌓아 올려 기둥과 보를 연결시키는 역할을 한다. 공포없이 기둥과 도리를 연결시킬 경우 처마가 낮아지고, 길게 뽑을 수 없으므로 이 공포의 부재를 사용하며, 기둥과 도리를 더욱 견고하게 연결시킬 수 있고 건물의 외관을 아름답게 꾸밀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옥사조의 용어 중 비첨이란 용어가 보이는데 이것은 처마를 더 길게 뽑기 위하여 사용되는 浮椽을 의미한다. 서까래만 있는 처마를 홑처마, 서까래 위로 부연이 붙은 처마를 겹처마라 하는데, 이는 겹처마를 규제하는 내용이다.

 또한 지붕의 구조에서는 6두품과 5두품의 계층에서는 重栿 즉, 두 개의 보를 설치할 수 없다는 내용을 볼 수 있는데 이는 五梁구조를 뜻하는 것이다. 3량가구법에서는 단면으로 살펴보면 두 개의 기둥 사이에 보를 걸치고 기둥의 둘레를 따라 도리를 두른다. 보 위로 대공을 올리고 그 위에 중도리를 올려 놓은 다음 그 중도리를 가운데 두고 양쪽으로 서까래를 올리는 것이 가장 기본적인 가구법이며 이 방법은 지붕의 형태를 맞배지붕(배지붕)밖에 만들 수 없다. 5량가구법은 두 개의 기둥 사이를 긴 보(대들보)를 건너지르고 그 위로 대공을 두 개 올리고 이 대공을 중도리와 결구시키고 중도리 사이를 짧은 보(종보)로 건너지르고 그 위로 한 개의 대공을 올리고 그 대공 위에 중도리를 올리고 중도리를 가운데 두고 양쪽으로 짧은 서까래(短椽)를 중도리까지 걸고 그 중도리 위에서 다시 긴 서까래(長椽)을 걸어서 지붕을 구성한다. 이 5량가구법은 가장 간단한 3량구조에서 발전한 형태로 합각지붕을 만들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구조이며 기둥 간격을 넓게 잡을 수 있고, 짧은 서까래와 긴 서까래를 이용하여 지붕의 물매를 다르게 하여 지붕의 곡선을 유려하게 만들 수 있는 장점이 있다. 또한 두 종류의 서까래를 사용하기 때문에 짧은 부재를 이용하는 데도 매우 유리한 구조법이다.

 건축재료에는 진골도 金·銀·鍮 등과 같은 귀금속재를 사용하지 못하게 금하고 있고, 건물의 채색에도 五色의 칠을 금하고 있다. 이 오색은 黃·靑·白·黑·朱의 색깔을 말하는 것으로, 이는 음양오행사상의 다섯가지 색깔을 뜻하며 이것은 곧 丹靑을 의미한다.

 床의 재료에는 진골의 계층에서는 대모·침향을 금하며 6두품 이하의 계층에서는 黃楊木의 사용을 금하고 있다. 이때 이 상을 건물 전체의 바닥으로 보는 학자도 있고 침대로 보는 학자도 있다.0666)姜榮煥, 위의 책, 60쪽. 그러나 고구려의 고분벽화에서 볼 수 있듯이 이 상은 바닥의 전체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바닥의 일부분에 榻과 같은 용도로 사용된 일종의 침상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발과 병풍의 장식에는 진골 이하의 계층에 모두 비단자수를 금하고 있다. 이 발과 병풍의 사용은 실내의 공간을 구획하는 데 필요한 생활용구임을 감안할 때, 이 당시 실내의 공간구획은 단일공간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상에서 살펴본 주생활은 일부의 귀족계급에서나 볼 수 있는 주생활의 단면이며 농업이나 노동에 종사하던 일반백성들의 주생활은 대부분은 전시기의 생활형태를 영위하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즉 아직도 일부의 계층에서는 움집과 비슷하게 땅을 파고 집을 만든 수혈주거와 비슷한 주거의 형태를 가지고 있었을 것이나 그외에는 원시적인 초가집의 형태를 가진 주거형태가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을 것이다. 지붕의 재료는 볏짚이나 새로 지붕을 이엇을 것으로 추측되며 벽체나 칸막이는 흙으로 만들었을 것이다. 온돌의 여부가 주목되는데 한겨울의 추위를 막기 위해서는 시원적인 온돌의 구조나마 존재하였으리라고 생각한다. 비단이나 모직으로 만든 의복과 이불을 사용할 수 없었던 이 계층에서는 온돌구조가 필수적이었으리라고 추측된다.

<李鐘哲·崔銀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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