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9권 통일신라
  • Ⅳ. 대외관계
  • 1. 당과의 관계
  • 1) 친당외교의 추진

1) 친당외교의 추진

 신라가 唐과 처음으로 외교관계를 맺은 때는 眞平王 43년(621)이었다. 당시 3국은 隋의 등장(581) 이후 외교전쟁을 치열하게 추진하였으며, 당도 수 이래로 빈번한 고구려원정에 실패한 과거의 복수심에서 3국, 특히 고구려에 대한 견제의 정략으로 진평왕 46년에 책봉을 하였다. 따라서 통일 이전까지의 朝貢을 중심으로 한 3국과 당과의 외교관계는 고구려가 25회, 백제는 22회, 그리고 신라는 34회에 이르렀다.0667)申瀅植<三國의 對唐關係>(≪韓國古代史의 新硏究≫, 一潮閣, 1984), 315쪽. 그러므로 통일 이전에도 이미 신라의 대당외교관계는 백제·고구려의 그것을 능가하고 있었다.

 이러한 3국의 외교전쟁은 遣唐使의 파견에도 나타나 있다. 즉 고구려의 경우 桓雄(영류왕자)·任武와 福男(보장왕자)의 예나, 백제의 福信(무왕의 조카), 그리고 신라의 경우는 金春秋와 그 아들(法敏·仁問·文王) 및 고구려 왕족(淵淨土)을 사신으로 보낸 사실에서 엿볼 수 있었다.0668)申瀅植, 위의 책, 316∼317쪽. 더구나 신라는 진흥왕대에 이르러 黨項城의 확보에 이어 백제에 의해서 개척·독점된 西海直航路(赤山航路)를 탈취함으로써 당과의 관계를 원활하게 추진할 수 있게 하였다.0669)孫兌鉉·李永澤,<遣使航運時代에 관한 硏究>(≪韓國海洋大學論文集≫16, 1981).
申瀅植,<統一新羅의 繁榮과 西海>(≪統一新羅史硏究≫, 삼지원, 1990), 265쪽.
그러나 신라의 대당외교는 일반적인 朝貢使나 謝恩·請兵使보다 宿衛外交에서 통일전쟁의 단서를 찾을 수 있었음이 특이하다.0670)申瀅植,<新羅의 宿衛外交>(앞의 책, 1984), 352∼390쪽.

 신라의 적극적인 대당관계는 백제·고구려정벌에서 군사동맹으로까지 확대되었다. 그러나 문무왕 8년(688) 이후 당의 영토야욕과 신라의 고토회복, 백제·고구려유민의 흡수책이 충돌하면서 양국관계는 정면으로 대립관계로 발전되었다. 그리하여 문무왕 8년 이후 성덕왕 2년(703)까지는 사실상 국교단절 상태가 되었으며, 신라로서는 단순한 당의 영토야욕 분쇄의 성격을 벗어난 통일전쟁이며 민족생존을 위한 거족적 전쟁관계로 확대되었다.

 당의 對百濟戰에서 신라와 연합한 것은 대고구려작전의 일부였고,0671)申瀅植,<三國統一前後 新羅의 對外關係>(≪新羅文化≫2, 1985), 7쪽. 신라로서는 무열계의 명예회복의 군사적 모험이었다.0672)李鍾學,<新羅三國統一의 軍事史的 考察>(≪軍史≫8, 1984), 183쪽. 나아가서 당의 고구려정벌은 대국의 체통을 되찾으려는 전략이었으며, 수·당시대의 天下觀에 입각한 동아시아 세계질서 확립을 위한 전략이었다.0673)高明士,≪從天下秩序看 古代的 中韓關係≫(1983, 臺灣), 106∼111쪽. 따라서 竹旨의 신라군이 石城에서 승리한 계기로 문무왕 11년(671)부터 양국은 정면 충돌을 시작하였으며,0674)문무왕 11년초에 당군이 熊津에 침입하여 幢主 夫果가 전사였으며, 당군 예하의 말갈병이 舌口城을 침범하였으나 격퇴되었다. 이때 당군이 침입한다는 소식에 접하여 眞功(大阿湌)이 甕浦를 수비하고 있었다. 6월에 竹旨에 이끌린 신라병은 加林城(충남 林川 부근)에서 당군을 격파하여 5,300명을 살해하고 백제장군(2명)과 당의 관리(果毅) 6명을 나포하는 전과를 올렸다(≪三國史記≫권 7, 新羅本紀 7, 문무왕 11년). 薛仁貴의 항의각서와 문무왕의 답서가 교환되는 등 극도의 긴장상태로 진전되었다.0675)李昊榮,<新羅三國統一에 관한 再考察>(≪史學志≫15, 1981), 32∼35쪽. 이러한 각서교환 직후 唐運送船 70여 척을 격침시켰으며,0676)≪三國史記≫권 7, 新羅本紀 7, 문무왕 11년 10월. 그 후 계속된 충돌은 문무왕 12년 7월의 高侃·李謹行의 연합군 격파, 15년의 劉仁軌·이근행·薛仁貴의 연합군 격파, 그리고 買肖城·七重城 戰役의 승리 등 대소 18전에 6천여 명의 희생자를 안기고 신라측의 완승을 가져왔다. 더구나 설인귀의 당 해군도 伎伐浦敗戰(문무왕 16년)으로 재기불능케 됨으로써, 신라군은 매초성(육)·기벌포(해)의 승리를 계기로 당군을 한반도에서 축출할 수 있게 되었다.0677)李鍾學, 앞의 글, 196∼197쪽.

 한편 이러한 당측의 일방적 패배는 신라인의 거족적인 저항에 기인된 것이지만, 한편 당시의 突厥·吐蕃·吐谷渾 등의 빈번한 침입에 따른 邊患의 절박성에 기인한 것도 사실이다.0678)申瀅植,<三國統一의 歷史的 性格>(앞의 책, 1990), 15∼16쪽. 그러나 당시 중국측 기록(≪資治通鑑≫·≪新·舊唐書≫등)은 패전사실을 삭제하고 日食·大赦기록으로 바꿔 놓았으며,0679)申瀅植,<新羅史의 時代區分>(≪韓國史硏究≫18, 1977), 22∼23쪽. 당측 대표적 군지휘자인 고간은 열전조차 없다.0680)존·씨·제미슨,<新羅同盟의 互解>(≪歷史學報≫44, 1969), 5쪽. 더구나 나당전쟁에 참여한 군통솔자들의 從軍記錄이 없으며, 流配事實만 나타나 있어 중국측이 패전기록을 삭제한 의도를 엿볼 수 있다.0681)존·씨·제미슨, 위의 글, 6∼10쪽. 더구나 張文瓘(侍中)의 東部(신라)遠征反對上疏에서 볼 때,0682)≪資治通鑑≫권 202, 唐紀 18, 儀鳳 3년. 나당전쟁의 실상을 살필 수 있을 것이다. 결국 당은 邊患除去의 일환인 동방정책(고구려 정벌과 신라고토 장악)에서 완전히 실패하였고, 오히려 신라와의 원만한 관계정립으로 서쪽 변경의 시련을 극복하고자 하였다. 따라서 나당전쟁의 종결은 당측에서도 필요했던 것이다.

 이러한 나당전쟁 속에서도 문무왕은 4차에 걸친 명목상의 謝罪使를 파견함으로써 양국 친선의 터전을 마련하였다. 장기간의 대립이 있은 후 神文王이 즉위하고(681), 당에서는 中宗이 등장하여(684) 양국관계에 새로운 분위기가 일기 시작하였다. 이때 중종은 신라측이 太宗廟號를 사용하는 데 대한 부당성을 추궁할 사신을 보냈으나, 신문왕은 정중한 답서를 보내 태종묘호 사용의 불가피성을 피력한 바 있다.0683)≪三國史記≫권 8, 新羅本紀 8, 신문왕 12년. 그러나 이러한 관계는 24년 만의 접촉이었고, 신라측에서도 孝昭王 8년(699)에 당에 사신을 보내 양국관계의 정상화를 꾀하기 시작하였다. 이어 聖德王(702∼737)과 玄宗(712∼755)의 등장에 따라 새로운 관계는 급속하게 추진되었다. 성덕왕은 10여 회 사신을 파견했으며, 드디어 12년(開元 원년, 713)에 신라사신은 현종으로부터 공식사절로 대접을 받게 됨으로써 양국관계는 새로운 단계를 맞게 되었다. 이때 唐帝로부터 新羅王으로서의 공식직함(上柱國樂浪郡公新羅王)을 받아 국교단절 45년 만에 국교가 정상화되었다. 이러한 양국의 친선관계 회복은 동아시아의 국제질서에 새로운 변수로 작용하여, 발해와 일본과의 또다른 외교문제가 야기되었다.0684)浜田耕策,<唐朝における渤海と新羅の爭長事件>(≪古代東アジア史論集≫下, 吉川弘文館, 1978).
鈴木靖民,<奈良時代における對外意識>(≪古代對外關係史の硏究≫, 吉川弘文館, 1985).
卞麟錫,<唐代外國使爭長의 硏究>(≪亞細亞硏究≫28, 1985).
韓圭哲,≪渤海의 對外關係史≫(신서원, 1994).
宋基豪,<발해에 대한 신라의 양면적 인식과 그 배경>(≪韓國史論≫19, 서울大, 1988).
―――,<동아시아 국제관계속의 발해와 신라>(≪韓國史 市民講座≫5, 一潮閣, 1989).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