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9권 통일신라
  • Ⅳ. 대외관계
  • 2. 일본과의 관계
  • 1) 7세기 후반∼8세기 일본과의 국가간 교섭

1) 7세기 후반∼8세기 일본과의 국가간 교섭

 668년(文武王 8년) 신라가 일본에 사신을 파견하여 외교관계를 재개한 이후 양국은 활발히 교류하여, 신라에서 공식적인 사신을 파견한 마지막 해인 779년(惠恭王 15년)까지 신라는 일본에 45회 사신을 파견하였고 일본은 신라에 25회 사신을 파견하였다. 원래 양국은 백제부흥전쟁의 전쟁상대국이었으나, 고구려가 멸망한 이후 당의 압박에 공동 대응하기 위하여 긴밀한 관계를 가지게 되었다.0715)김은숙,<백제부흥운동이후 天智朝의 국제관계>(≪日本學≫15, 1996), 167∼171쪽. 7세기 후반부터 8세기초까지 신라는 일본에 율령국가 건설에 필요한 지식과 여러 가지 문물을 전해 주었고, 일본은 이 시기에 율령국가체제를 갖추게 되었다.0716)鈴木靖民,<日本律令制の成立·展開と對外關係>(≪古代對外關係史の硏究≫, 吉川弘文館, 1985), 13∼21쪽.

 그러나 신라와 당의 관계가 점차 호전되고, 701년 大寶(타이호우)律令의 완성을 계기로 일본의 율령국가체제가 정비되면서 양국은 외교형식문제로 갈등을 빚게 되었다. 당을 본따서 천황제 율령국가를 건설하고자 하였던 일본조정은 대외관계에서도 신라를 하위에 놓는 외교형식을 고집하였고, 신라조정 역시 일본사신에 대한 외교의식에서 일본을 하위에 놓는 외교형식을 고집하였을 가능성이 크다.0717)金恩淑, 앞의 글(1991), 108쪽. 특히 727년(聖德王 26년) 일본과 발해의 외교관계가 시작되고 733년 신라와 당의 공동작전 수행으로 나당관계가 안정되면서, 734년 이후 외교형식문제로 인한 양국의 갈등은 표면화되어, 737년에 일본조정에서는 신라공격이 논의되기도 하였다.0718)金恩淑, 위의 글, 117∼119쪽.

 일본측은 신라사신을 입경시켜 ‘蕃國’사신으로 대접하고자 하였으나, 신라는 이에 반발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국관계는 계속되었다. 신라는 738년(孝成王 2년) 이후 일본이 요구하는 외교형식을 무시함으로써 入京하여 賓禮를 받는 대신 大宰府에서 교역하고 돌아가는 편을 택하였다. 통상이 사행의 중요목적이 되면서 신라는 100명 이상의 대규모 사신단을 파견하였고,0719)內藤雋輔,<新羅人の海上活動について>(≪朝鮮史硏究≫, 東洋史硏究會, 1961), 338쪽.
末松保和,<日韓關係>(≪日本上代史管見≫, 私家版, 1963), 106쪽.
752년(景德王 11년)에는 700여 명의 사신단을 파견하였다. 그러나 일본측의 신라사신에 대한 요구도 집요하여 신라가 이에 반발하자 759년∼763년에는 신라공격계획까지 수립되었다. 764년 이후 신라는 일본이 요구하는 외교형식을 무시하는 대신,0720)‘調’라는 용어 대신 769년의 김은거는 ‘土毛’라는 용어를 사용하였고, 774년의 金三玄은 ‘國信’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다. 당과 일본을 매개하는 역할을 추가함으로써 대재부에서 교역하는 편을 택하였다.0721)金恩淑, 위의 글(1991), 128∼130쪽. 즉 764년에는 유학승 戒融(카이유우)의 귀국 후 소식을 알아 봐 달라는 당 칙사의 요청을 구실로 사신을 파견하였고, 769년(혜공왕 5년)과 774년에는 일본의 견당대사 藤原河淸(후지와라노카세이, 본명은 藤原淸河;후지와라노키요카와)의 서신의 전달을 위해 사신을 파견하였다. 또한 764년 이후 신라와 일본간의 외교는 執事省과 대재부간의 실무교섭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대당외교 교통로 확보에 있어서 신라의 협조가 필요하였던 일본의 조정은 779년 대재부 관리를 신라조정에 파견하여 당에서 귀국도중 탐라에 표착한 遣唐判官과 당의 사신을 일본에 보내줄 것을 의뢰하였다. 신라는 일본조정의 요청을 받아들이고 사신을 파견하였으나, 신라·발해에 대해 일본 우위의 외교형식을 확립하려 하였던 光仁(코우닌)조정이 다시 신라왕의 ‘表’를 요구하였으므로, 이후 신라는 더 이상 사신을 파견하지 않았다.0722)石井正敏,<光仁·桓武朝の日本と渤海>(≪日本古代の傳承と東アジア≫, 吉川弘文館, 1995), 433∼435쪽. 신라가 사신을 파견하는 공식적인 교섭을 끝낸 이유로 정치·군사적인 면에서 발해와 당의 관계개선으로 인한 동아시아의 긴장완화로 신라가 일본과의 외교관계를 굳이 필요로 하지 않게 되었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0723)李成市,≪東アジアの王權と交易≫(靑木書店, 1997), 176쪽. 또한 경제적인 측면에서는 8세기 중엽부터 활약하는 신라의 민간상인의 활약으로 공적 교역의 필요성이 감소되었다는 점을 생각할 수 있다.0724)石井正敏,<八·九世紀の日羅關係>(≪日本前近代の國家と對外關係≫, 吉川弘文館, 1987), 288∼293쪽.
――――,<九世紀の日本·唐·新羅三國間貿易について>(≪歷史と地理≫394, 史學地理學同攷會, 1988), 2쪽.

 ≪三國遺事≫에는 신라와 일본과의 공적인 관계가 단절된 786년(원성왕 2년) 일본왕 文慶이 신라를 침범하려다가 적병을 물리치는 萬波息笛이 있다는 말을 듣고 金을 보내 만파식적을 청하였다는 내용의 설화가 있다.0725)≪三國遺事≫권 2, 紀異 2, 元聖大王. 일본측 기록에는 이와 관련된 기록이 보이지 않으며, 당시 일본과 신라의 관계가 특별히 긴장되었음을 말해주는 기사도 보이지 않지만, 당시 되풀이되는 가뭄으로 백성이 굶주리고 정치가 불안정하였으므로, 일본이 침범할지도 모른다는 위기의식이 신라인 사이에 있었을 가능성은 있다. 790년 一吉湌 伯魚를 발해에 보낸 것은 이러한 상황에서 발해와의 관계를 모색하여 신라가 고립되는 일을 미리 방지하고자 한 것이었다.0726)≪三國史記≫권 10, 新羅本紀 10, 원성왕 6년 3월.

 일본도 신라와의 공적인 교류가 중단되자 790년대 이후에는 발해와의 교류를 증대하였다. 즉 발해는 795년에 일본의 재당유학승 永忠(에이츄우)의 글을 전하면서 당과 일본의 중개역할을 담당함으로써 일본조정이 신라에 기대하였던 역할을 이어받게 되었다. 당시 일본과 활발한 교역을 원하였던 발해의 康王은 國書에서 桓武(칸무)천황의 德을 강조하면서 사신파견의 기한을 단축시켜 줄 것을 요구하였고 이에 대해 일본조정은 799년 聘期의 제한을 두지 않겠다는 약속을 하였다.0727)石井正敏, 앞의 글(1995), 442∼443쪽. 일본조정은 804년에는 발해사신들이 자주 도착하는 能登(노토)國에 客院을 건설하여, 발해사신은 반드시 筑紫를 경유하도록 한 773년의 금지를 풀었다.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