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9권 통일신라
  • Ⅳ. 대외관계
  • 2. 일본과의 관계
  • 2) 9세기 전반 일본의 사신파견

2) 9세기 전반 일본의 사신파견

 그러나 일본과 신라에서 외교관계를 재개하려는 움직임 또한 8세기말∼9세기초에도 있었다. 즉 일본의 桓武조정에서는 799년 大伴宿禰峰麻呂(오오토모노미네마로)가 견신라사로 임명되었으나, 무슨 이유에서인지 사신파견은 중지되었다.0728)≪日本後紀≫권 8, 延曆 18년 4월 경인 및 5월 임신. 한편 신라도 802년(애장왕 3년) 왕의 당숙 均貞을 일본에 보내 외교관계를 재개하고자 하였으나, 균정의 거부로 실패하였다.0729)≪三國史記≫권 10, 新羅本紀 10, 애장왕 3년 12월. 양국간의 교섭은 803년 일본이 견당사를 파견하면서 표착할 경우에 대비하여 신라측에 협조를 요청하는 사신을 파견하여 재개되었으나,0730)≪三國史記≫권 10, 新羅本紀 10, 애장왕 4년 7월조에서는 803년 일본국과 우호관계를 맺었다고 하는데,≪日本後紀≫에서는 803년 일본이 견당사를 파견하면서, 大宰府로 하여금 신라에 그 사실을 알렸으나, 신라측의 답신이 없었다고 한다(≪日本後紀≫권 12,, 延曆 23년 9월 기축). 이 견당사선은 태풍으로 난파하였다. 일본조정은 804년 3월에 다시 견당사선을 파견하면서 신라에 황금 300兩을 보내고 견당사선이 표착할 경우 협조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0731)≪三國史記≫권 10, 新羅本紀 10, 애장왕 5년 5월. 견당사선 4척 중에서 2척(제3선·제4선)이 행방불명되자, 804년 9월 일본은 신라측에 그 행방을 알아보아 주기를 부탁하였다.0732)≪日本後紀≫권 12, 延曆 23년 9월 기축.

 805년에 견당사선이 신라 남해안을 항해하는 北路를 통해 일본으로 돌아간 후, 일본조정은 806년·808년 신라에 사신을 파견하였으나,0733)≪三國史記≫권 10, 新羅本紀 10, 애장왕 7년 3월·9년 2월. 양국관계는 더 이상 진전되지 않았다. 한편 발해국서의 형식이 문제가 되어 일본과 발해의 사이도 점차 멀어져가, 811년의 견발해사 파견을 끝으로 일본은 더 이상 발해에 사신을 파견하지 않았고, 821년 발해사신 접대비의 과중함을 이유로 일본조정은 12년으로 통교기한을 정하였다. 상인과 다름없는 발해사신들을 사신으로 대접하지 말자는 주장도 나왔으나,0734)≪類聚國史≫권 194, 殊俗, 渤海 天長 3년 3월 무진. 922년까지 발해에서만 일본에 사신을 파견하는 관계가 유지되었다.

 일본은 836년에도 견당사의 배가 신라에 표착할 경우에 대비하여 紀三津(키노미츠)을 신라에 파견하였으나, 국서의 내용과 달리 신라와의 통호를 요구하는 기삼진의 언행에 의심을 품게된 신라측은 이를 거절하였다.0735)≪續日本後紀≫권 5, 承和 3년 윤5월 신사. 기삼진이 가지고 온 太政官(다이죠우칸)의 牒文은 견당사가 표착할 경우에 당으로 갈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해 달라는 내용이었으나, 기삼진은 자신이 신라와의「通好」를 위하여 왔으며, 또한 자신이 당에 파견된 사신인 것처럼 말한 듯하다. 이에 대해 신라조정에서는 태정관 첩문의 내용과 기삼진의 말이 다르다면서 그 모순을 질책하는 執事省牒을 보냈다. 당시 신라는 선덕왕대로 당에 빈번히 사신을 파견하였고, 828년 이후 張保臯가 청해진대사로서 당과 일본을 무대로 활발히 해상활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일본조정에도 기삼진과 같이 신라와의 교역이 확대되기를 원하는 세력이 있었던 듯하다.

 836년의 기삼진의 사행 실패로 인해 일본의 견당사파견은 더욱 어렵게 되었다. 836년에 출발한 견당사선은 난파하거나 회선하여 다음해에 다시 출발하였으나 壹岐島·値賀島에 표착하였고, 그 후 부사 小野朝臣篁(오노노아손타카무라)을 비롯한 5명이 승선을 거부하는 사태가 일어났다. 838년 다시 출발한 견당사는 839년 귀국할 때에는 楚州에서 신라선 9척을 고용하여 귀국하였다. 630년에 시작된 일본의 견당사는 이후 더 이상 파견되지 않았다.0736)佐伯有淸,≪最後の遣唐使≫(講談社, 1978).

 일본은 839년 이후에는 신라·당과 국교를 가지지 않았다. 단지 일본을 왕래하는 발해사신을 통해 발해와만 외교관계를 가지게 된다. 대외적으로 사신파견이 끝나는 이 시기를 경계로 하여 일본 지배층은 일본을 神國으로 생각하는 중세적인 王土王民사상과 神國사상을 키워나가게 되었다.0737)村井章介,<王土王民思想と九世紀の轉換>(≪思想≫847, 1995), 36∼3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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