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9권 통일신라
  • Ⅳ. 대외관계
  • 2. 일본과의 관계
  • 4) 9세기 후반 일본의 신라에 대한 경계강화

4) 9세기 후반 일본의 신라에 대한 경계강화

 일본조정의 신라에 대한 경계심은 860년대 후반에 강화된다. 즉 866년 신라에서 兵弩제조기술을 배워 對馬島 점령계획을 세운 肥前國 基肆郡 사람들이 있다는 보고가 있었고, 安藝守였던 越智宿禰貞原(오치노수쿠네사다하라)가 신라사람과 반역을 꾀하였다는 밀고가 있었다.0757)≪日本三代實錄≫권 13, 貞觀 8년 7월 15일 정사·권 16, 貞觀 11년 10월 26일 경술. 뒤 사건은 무고임이 드러났으나, 위의 두 사건은 신라에 대한 위기의식이 일본에 팽배하였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그해 11월 淸和(세이와)조정은 신라 인근지역의 지방관들에게, 국가를 鎭護해달라는 기도를 하도록 명령을 내렸고, 867년에는 四天王像을 만들어 나누어주고 기도하도록 하였다.

 869년 博多津에서 豊前(부젠노)國의 絹綿이 신라 해적선에 의해 약탈당한 사건이 발생하면서 일본정부의 위기의식은 더욱 고조되었다.0758)≪日本三代實錄≫권 16, 貞觀 11년 6월 15일 신축. 신라가 쳐들어 올 것이라는 점괘를 이유로 蝦夷(에조) 포로들을 구주에 배치해 줄 것을 대재부가 요구하자, 일본조정은 九州지방의 방어를 강화하는 한편, 伊勢神宮(이세진구우)과 石淸水神社(이와시미즈진자)를 비롯한 전국의 神社에 신라를 막아달라는 기도를 하도록 명령하였다.0759)≪日本三代實錄≫권 16, 貞觀 11년 12월 5일 무자·14일 정유·17일 경자·28일 신해·29일 임자. 870년에는 신라에 갔다가 도망쳐온 대마도인이 신라가 대마도 점령을 위한 전쟁준비를 하고 있다고 보고하자, 일본조정은 신라 인근지역들에 경계를 강화하도록 하고, 八幡大菩薩(하치만다이보사츠)을 비롯하여 香椎廟·宗像大神·甘南備神에게 기도를 올렸다.0760)≪日本三代實錄≫권 17, 貞觀 12년 2월 12일 갑오·15일 정유. 이 기사는 신라와 대마도간의 민중의 교류를 말해주는 사료로 해석되기도 한다(山內晉次,<九世紀東アジアにおける民衆の移動と交流>,≪歷史評論≫555, 1996, 58∼59쪽).

 그러나 당시 신라가 일본공격계획을 가지고 있었다고 볼 수는 없다. 양국관계의 악화를 말해주는 사료가 보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삼국사기≫에 의하면 신라가 일본을 칠 형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866년(景文王 6년)과 867년에 이찬 允興, 이찬 金銳의 반란이 잇따라 일어났고, 867년부터 경주의 전염병 유행, 홍수로 인한 흉년 등으로 국내정세는 혼란하였다. 이러한 신라의 상황은 도적의 발생을 가져왔는데, 위의 신라가 쳐들어 올 것이라는 소문은 신라해적들이 일본을 침략할지도 모른다는 위구심을 표현한 것이다.

 신라해적의 絹綿탈취사건 이후 일본을 왕래하며 교역에 종사하던 신라인들과 대재부 관내에 거주하던 신라계 사람들에 대해 박해가 가해졌다. 대재부는 관내에서 교역을 하던 신라인 潤淸·宣堅 등 30명을 견면탈취사건의 혐의자로 투옥하였다. 일본조정은 윤청 등을 귀국시키도록 명령하였으나, 대재부는 일본땅에 오래 머문 윤청 등이 신라에 돌아가면 일본의 약점이 알려지게 될 것이라고 반대하였다. 대재부는 또한 대재부 관내에 거주하는 신라인들도 신라가 침략해 온다면 내응할 가능성이 크다고 보고하였다. 이에 일본조정은 윤청 등 20인의 신라인을 陸奧國·武藏國·上總國 등에 이송하여, 생업에 종사하도록 조처하였다.0761)≪日本三代實錄≫권 17, 貞觀 12년 2월 20일 임인·9월 15일 갑자.

 870년에는 일본의 대신라 창구역할을 하던 대재부 관리 중에도 신라와 내통하려 하였다는 혐의를 받게 되는 사람이 나타났다. 즉 筑後權史生 佐伯宿禰眞繼(사에키노수쿠네마츠구)는 신라국의 牒을 보내면서 대재부의 少貳 藤原朝臣元利萬侶(후지와라노아손겐리마로)가 신라국왕과 통하여 일본을 해치려고 도모하였다고 보고하였다. 일본정부는 檢非違使(케비이시)를 파견하여 眞繼를 조사하고, 元利萬侶를 비롯한 5명을 조사하였다.0762)≪日本三代實錄≫권 18, 貞觀 12년 12월 13일 신유·17일 을축. 신라국의 첩을 증거로 제시한 점에서 대재부 관리인 등원조신원리만려가 신라 집사성과의 사이에 무엇인가 교섭을 벌였을 수도 있으나, 또한 이 첩이 위조되었을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다.0763)李炳魯, 앞의 글(1996c), 339쪽.

 일본정부는 876년에는 신라·당과의 교통의 요지인 肥前國에 새로 値嘉嶋郡을 설치하여 방어에 힘쓰고 있으며, 878년에 신라 해적선이 일본으로 올 것이라는 疆日宮의 신탁이 내리자, 伊勢大神宮·疆日宮·八幡宮 등에 기도를 하여 막아 보려고 하고 있다.0764)≪日本三代實錄≫권 28, 貞觀 18년(876) 3월 9일 정해 및 ; 권 34, 元慶 2년(878) 12월 11일 임신·20일 신사·24일 을유. 그러나 890년대에는 신라말의 해상세력이 일본 九州지역을 습격하는 해적사건이 일어나게 되고, 이것이 일본인의 배외의식을 더욱 자극하게 되었다.0765)≪扶桑略記≫권 22, 寬平 6년 9월 5일조에 의하면, 894년 9월에 당인이 낀 新羅賊이 대마도를 쳤으나 일본이 이를 막아냈다고 한다.

 이렇게 신라의 침략에 대한 위기의식이 강화되던 860년·870년·880년대에 일본은 신라에 사신을 파견하고 있다. 즉 경문왕대인 864년에는 일본사신이 신라에 도착하였고, 879년에는 일본사신이 경주 궁궐의 朝元殿에서 헌강왕을 배알하였다.0766)≪三國史記≫권 11, 新羅本紀 11, 헌강왕 4년 8월. 또한 883년에도 일본국왕은 사신을 파견하여 황금 300兩과 明珠 10개를 보내고 있다.0767)≪三國史記≫권 11, 新羅本紀 11. 헌강왕 8년 4월. 이때 일본은 淸和천황, 陽成(요우제이)천황이 재위하던 시기지만 이들 사신파견에 대해 일본측의 기록에는 보이지 않는다. 따라서 대재부 관리나 재지 유력자가 일본천황의 사신을 칭하였을 수도 있으나,0768)遠藤元男,<貞觀期の日羅關係について>(≪駿台史學≫19, 1966), 192쪽. 표류민 송환이나, 신라해적의 단속을 요청하기 위해 일본조정이 사신을 파견하였을 가능성도 부인할 수는 없다.

 869년의 견면탈취사건 이후에도 표착한 신라인에 대한 일본정부의 조처가 특별히 달라진 것은 아니었다. 873년에 對馬島에 표착한 신라인 32인들에 대해서도 혹시 일본의 정세를 엿보기 위한 것이 아닌가 의심은 하였지만 억류하지는 못하고 잘 조사한 후에 빨리 돌려보내도록 하였다.0769)≪日本三代實錄≫권 24, 貞觀 15년 12월 22일 계축. 874년에 대마도에 표착한 金四·金五 등 신라인 12인과 885년에 肥後國 天草郡에 표착한 신라관관 徐善行에 대해서도 같은 조치를 취하였다.0770)≪日本三代實錄≫권 26, 貞觀 16년 8월 8일 갑자·권 47, 仁和 원년 6월 20일 계유. 이는 신라인을 억류함으로써 신라정부와 정치적인 마찰이 일어나는 사태를 피하고자 하였던 것으로 추측되어, 774년의 신라인 표류자 송환에 관한 규정이 계속 유효하였음을 말해준다.

 이상 통일신라시대 신라와 일본과의 관계를 살펴 보았는데, 양국관계의 변화과정을 간단히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7세기 후반 당의 위협에 대처하기 위하여 공적인 교류를 시작한 이후, 신라가 일본의 율령국가 성립에 필요한 여러 가지 문물을 전해주는 관계가 7세기말까지 계속되었다. 그러나 8세기 전반 일본의 율령제정부가 신라와에 일본중심적인 외교형식을 요구하고 신라가 이에 반발하면서 양국관계는 악화되었다. 그 결과 일본에서는 신라침공계획이 수립되기도 하였으나 실현되지는 못하였다. 그 후 동아시아의 긴장이 완화되면서 신라는 779년의 신라사신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 사신을 파견하지 않게 되었고, 일본은 견당사의 파견을 전후하여 견당사가 표착할 때에 협조를 요청하는 사신을 파견하였다.

 양국의 사신파견의 목적도 8세기초까지는 정치적·군사적 목적이 강하였으나, 8세기 중엽 이후에는 경제적 측면도 추가되면서, 신라는 외교형식에 얽매이는 사신파견을 중단하고 그 대신 신라상인을 통한 교역을 선호하게 되었다. 일본도 일본 우위의 외교형식을 부정하는 신라와의 공식적인 관계 유지가 어려웠으므로, 사신접대와 의례에 많은 비용을 부담해야 하는 공무역 대신 신라상인의 왕래를 통한 민간무역을 선호하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9세기에는 신라상인의 활약으로 양국 간의 민간교역이 활발해지지만, 한편 이와 함께 신라해적도 발생하게 되어 9세기 후반에는 일본인들의 신라인에 대한 경계심이 커지고 적대의식도 확산되게 되었다.

<金恩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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