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9권 통일신라
  • Ⅳ. 대외관계
  • 3. 해상활동
  • 1) 항로의 개척과 항해술의 발전
  • (2) 황해횡단항로

(2) 황해횡단항로

 黃海橫斷航路는 산동반도에서 바로 황해를 가로질러서 禮成江·당은포에 이르는 해로로 비교적 일찍부터 개척되었다. 金正浩는 그의 저서≪大東地志≫에서「歷代航路」를 설명하면서 당 顯慶 5년(武烈王 7년, 660)에 唐將 蘇定方(592∼667)이 백제를 침공할 때 등주에서 바다를 건너 덕적도로 진군한 내용을 기술하고 있다.≪舊唐書≫소정방열전에 나오는 내용이지만≪三國史記≫와는 출발지(成山角)와 도착지점(웅진강구)이 다를 뿐이다.0774)≪舊唐書≫권 83, 列傳 33, 蘇定方.
≪三國史記≫ 권 28, 百濟本紀 6, 의자왕 20년.
이에 앞서 隋(581∼618)와 당초에 있었던 고구려·백제의 침공도 한두 차례는 등주를 중심으로 산동반도 일원의 항포에서 직접 황해를 횡단하여 이루어졌던 것 같다.

 聖住寺 朗慧和尙의 탑비에 보면 長慶初(憲德王 13∼16년, 821∼824)에 왕자 金昕이 당으로 사행할 때 당은포에서 황해를 횡단하여 산동의 之罘山(芝罘)에 도착하고 있다.0775)<朗慧和尙白月葆光㙮碑>(≪朝鮮金石總覽≫권 34). 이와 같이 등주 인근의 성산각이나 지부도 이때의 황해횡단항로의 중요한 항구였음을 알 수 있다.

 해류와 풍향을 이용한 항해기술이 발달하면서 황해횡단항로는 많이 이용되었다.0776)新羅僧 義湘이 總章 2년(文武王 9년, 669) 상선을 타고 등주에 도달했다는 소식을 전하고 있다(≪宋高僧傳≫ 권 4, 唐新羅國 義湘傳). 9세기 중엽의 日本僧 圓仁의 여행기인≪入唐求法巡禮行記≫를 보면 산동반도 登州府 관내의 연안 일원의 많은 항만들이 신라와의 통교에 이용되었던 사실을 알 수 있다.

 839년 일본 朝貢使 일행이 신라선 9척을 고용하여 귀국길에 오른 곳도 赤山浦(산동성 榮成市 石島鎭)이며, 847년 원인 자신이 귀국할 때도 이곳 적산포에서 출발하여 황해를 횡단하고 있다.0777)圓仁,≪入唐求法巡禮行記≫권 2, 開成 4년(839) 7월 21일 및 권 4, 大中 원년(847) 9월 2일. 이 직항로가 얼마나 쉽게 신라에 도달할 수 있었던가를 원인의 귀국일자를 더듬어 보면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는 9월 2일 정오경에 적산포를 출발하여 3일 아침에는 벌써 멀리 신라의 산들을 보았고, 4일 해뜰무렵 熊州(公州) 앞바다를 지나 그날밤 高移島(皐衣島)에 정박하였다. 다음날 아침 출발하여 6일에 黃茅島(丘草島·葛草島)의 泥浦에서 정박하고, 거기서 雁島를 거쳐 곧 對馬島에 이르고 있다. 적산포를 출발한지 5일 만에 대마도에 도착한 셈이다. 산동성 牟平縣의 乳山浦도 황해횡단로의 출항지로 자주 이용되었다.0778)圓仁,≪入唐求法巡禮行記≫권 4, 大中 원년(847) 윤3월 10일. 그러나 당에서 신라로 항해하는 출발지는 노철산항로이건 황해횡단항로이건 간에 등주가 그 중심임에는 틀림이 없다.≪元和郡縣志≫에 보면 신라·백제·渤海로 내왕하는 항포의 중심지는 등주라 명기하고 있다.0779)≪元和郡縣志≫권 11, 登州. 그러기에 登州府에는 新羅館·渤海館이 설치되었고 후일에 가서 신라는「知後官」까지 파견하였던 것으로 보면,0780)≪冊府元龜≫권 976, 外臣部, 褒異 3, 明宗 天成 2년(927 ; 경애왕 4년) 3월. 등주는 분명 우리 나라와의 내왕에 있어 중요한 항포였음이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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