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9권 통일신라
  • Ⅳ. 대외관계
  • 3. 해상활동
  • 1) 항로의 개척과 항해술의 발전
  • (4) 선박과 항해술

(4) 선박과 항해술

 항해술은 조선술의 발전과 깊은 관계를 가진다. 신라시대의 조선기술을 알 수 있는 기록은 거의 없다.≪三國史記≫등에는 해사에 관한 기록이 더러 있기는 하지만 그 당시의 船形이나 구조 등에 관한 기록은 없다. 다만 후대의≪高麗史≫·≪高麗史節要≫·≪冊府元龜≫·≪高麗圖經≫등에 선박의 규모·형체에 관한 기록이 있어 그 시대의 중국·일본 등의 사료와 함께 검토하여 신라시대의 배모양을 짐작할 수 있을 따름이다.

 신라는 일찍부터 일본과의 해상교류가 이루어졌던 사실로 미루어 보면 선박제조기술도 제법 발달했던 것으로 짐작된다.≪三國史記≫智證王 6년(505)조에 이미 선박의 이로움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0797)≪三國史記≫권 4, 新羅本紀 4, 지증왕 6년. 그 뒤 진흥왕·진지왕 때에 중국과의 교역이 점차 활발해지면서 항해업무도 강화되었다. 그것은 진평왕 5년(583) 정월에 비로소 船府署를 두어 大監(장관)과 弟監(차관) 각 한 사람을 두고 항해업무의 개혁을 기도한 것으로도 알 수 있다0798)≪三國史記≫권 4, 新羅本紀 4, 진평왕 5년 정월. 그러나 신라가 해양 제반사를 강화한 것은 통일 이후의 일이다. 文武王 18년(678), 이제까지 兵府에 예속되어 있던 선부서를 독립시켜 별도로 船府를 설치하고 船府令 한 사람을 두어 선박업무를 관장하게 하였다.0799)≪三國史記≫권 7, 新羅本紀 7, 문무왕 18년 정월. 뒤이어 神文王 8년(686) 2월에 船府卿 한 사람을 더 두게 하였다. 이러한 일단의 조치는 분명 신라의 해상활동 및 대외무역과도 관련이 있었던 것이라 믿어진다.

 신라시대의 배 모양이 어떠했는지는 아직까지 알 길이 없다. 청동기시대의 암각화로 알려져 있는 盤龜臺(경남 울주군) 암벽화에는 당시 바다사람들의 생활모습을 음각해 놓고 있다. 그 암벽화에는 ‘외양선’ 모양의 배 그림이 보인다.0800)김원룡,<울주 반구대 암각화에 대하여>(≪한국고고학보≫9, 1980) 7쪽. 반구대는 太和江 상류에 위치하여 배로 동해에 나아갈 수 있는 곳이다. 삼국시대의 신라·가야에서 각대가 달린 배 모양의 토기가 수점 출토되었다. 경주 金鈴塚, 경북 달성군 현풍 등지에서 출토된 배 모양의 토기가 곧 그것이다. 이것들은 거의 5∼6세기의 것이며 출토지역도 신라·가야에 한정된 것이다. 1976년 경주 雁鴨池에서 발굴된 통나무배(刳船)로서도 신라 선체의 구조를 알기에는 미흡하다.0801)≪雁鴨池發掘調査報告書≫(文化財管理局, 1978), 258쪽. 1984년 봄에 莞島 漁頭里 해저에서 발견된 古船體는 신라 선박의 모양을 추정하는 데 어느 정도의 가능성을 던져준다.0802)≪莞島海底遺物≫(文化財管理局, 1985), 109쪽. 인양된 선체는 11세기 고려초의 것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近海沿岸 왕래에 적합한 전통적「韓船구조방식」인 平底구조 너벅선이다.0803)金在瑾,<張保臯時代의 무역선과 그 航路>(≪張保臯의 新硏究≫, 莞島文化院, 1985), 147쪽.

 일반적으로 중국을 비롯하여 동양 古代船의 모양은 方頭·方艄·平底였다는데 의견을 같이한다. 1960년 3월 唐代의 揚州 揚子縣(지금 邗江縣 施家橋)에서 대형 平底木船(길이 24m, 너비 4.3m, 깊이 1.4m)과 배 바닥이 둥굴고 좁은 圓底木船(길이 13.65m, 너비 0.75m, 깊이 0.56m)이 발굴되었다.0804)<揚州施橋發見了古代木船>(≪文物≫, 강소성문물공작대, 1961-6), 52쪽. 큰 배는 장부를 맞추고 못을 박는 기술을 사용하여 만들어졌고 이미 침몰방지의 성능이 강한 방수선실 기술이 시공되어 있었다. 1973년 6월 당대의 양주 海陵縣 如皐鎭 掘港(江蘇省 如皐鎭 馬港) 부근에서 인양된 당초의 목선(길이 17.32m, 너비 2.58m, 깊이 1.6m)도 방두·방소·평저형으로 전자와 동일한 기술로 조선되었다.0805)<如皐發現的唐代木船>(≪文物≫, 南京博物院, 1974-5), 84쪽. 여고진 마항은 당대 양주 대운하에서 바다로 나아가는 또는 바다에서 登陸하는 지점이다. 신라사절이나 일본 조공사 선박이 기착하는 곳이기도 하다.0806)圓仁,≪入唐求法巡禮行記≫권 1, 開成 3년(838). 이 목선은 9개의 칸막이(水密隔壁)와 하나의 돛, 그리고 철못으로 건조된 매우 견고한 목선이다. 상당히 발달된 근해안 교역선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당대에 이미 평저선보다 遠洋航海에 더 편리한 底圓面高船(배 밑이 둥글고 甲板이 높은)도 건조되었다는 데 주의해야 할 것이다. 중국 고대의 木帆船은 대체로 4개의 선형이 있다. 즉 沙船·福船·廣船·烏船을 가리킨다. 사선은 주로 강소 이북에서 많이 이용되었고 복선은 福建, 광선은 廣東, 오선은 절강 등 양자강 이남 지방에서 이용된 선형이다. 중국의 전형적 선형인 사선은 평저형 선박으로 주로 대운하를 통한 조운 등에 많이 쓰였다. 복선·광선은 龍骨(bar keel)을 가진 圓(尖)底船型(round bottom)으로 물이 깊고 섬과 암초들이 많은 남쪽에서 많이 이용되었다. 사선의 역사는 매우 오래되었지만 복선·광선이 언제부터 건조되었는지는 확실치 않다. 그러나 시가교 고선의 예나 謝占壬이≪日知錄≫을 평주하는 글에서 “복건과 광동의 航洋船은 船底가 둥글다”라고 한 것0807)J. Needham, Science and Civilization in China, Vol. 4, 1971, p.429. 등으로 미루어 보아 당대에는 이미 원(첨)저선이 출현한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사선은 중국 고대의 전형적인 선형으로 비단 강소 이북의 해양에서 뿐만 아니라 복건·광동 등 남양해역에서도 이용되었다. 중소형의 화물선·어선 등으로도 많이 쓰였고 또 주변국가에도 널리 전파되었다.0808)金在瑾,<中世의 船舶에 대하여>(≪文化財≫14, 文化財管理局, 1981), 120쪽. 신라선이나 莞島船도 그러한 맥락에서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淸海鎭이 설치된 시기(828)에는 신라에도 원양항해에 적합한 원저선이 이용되었으리라는 짐작이 간다. 신라선단이 나·당·일 삼국을 종횡무진 왕래했던 사실이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당대의 선박이 그 구조방식이나 크기·帆裝 및 舵 등에 있어서도 같은 시대의 西洋船들보다 훨씬 앞섰던 것으로 보아0809)金在瑾, 위의 글, 130쪽. 백제·신라선의 조선기술도 높은 수준이었을 것이라 생각된다. 고대 일본이 조선기술을 신라나 백제로부터 터득했던 것으로 미루어 보면 수긍이 간다. 바로 고대 일본의「猪名船」은 신라 기술자들에 의해 건조되었고 孝德朝 安藝國에서 만든 대형선도「百濟船」이라 부르고 있다.0810)≪日本書紀≫권 10, 應神 31년(300) 및 권 25, 孝德 원년(645). 9세기에 이르러서도 九州 大宰府(다자이후)에서「新羅船」을 건조하고 그의 우수성을 격찬하고 있다.0811)≪續日本後紀≫권 8, 仁明朝 承和 6년(839), 丙申. 이는 곧 기본적으로 일본이 이때까지 백제·신라의 조선기술을 습득하지 못했다는 명백한 증거이다. 이런 까닭으로 일본은「신라선」의 形制法式을 실물로 전승하게 하였다.0812)≪類聚三代格≫, 承和 7년(840), 9월 23일.

 일본정부가 당에 사신·학문승 등을 파견할 때 이용한 선박 가운데에는 많은 신라선이 포함되어 있었고 선원들까지도 신라사람들이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었다.0813)≪日本書紀≫권 26, 齊明 4년 7월·권 30, 持統 4년 10월. 한 예로 문성왕 원년(仁明朝 승화 6년, 839) 일본의 조공사 일행은 楚州(淮安) 新羅坊에서 신라선박 9척과 바다길에 익숙한 신라선원 60여 명을 고용하여 귀국하였다.0814)圓仁,≪入唐求法巡禮行記≫권 1, 開成 4년(839) 3월 17일. 학문승 仁好·順昌 등 26명이 귀국할 때 탑승한 선박도 신라인 張公靖의 배였다.0815)≪續日本後紀≫권 13, 승화 10년(843) 12월 癸亥. 天台宗의 請益僧 원인도 그의 제자 性海·惟正 등과 함께 신라상선으로 九州의 鎭西府로 돌아왔다.0816)≪續日本後紀≫권 18, 승화 15년(848) 3월 乙亥.

 통일신라시대의 항해술은 상당한 수준에 도달하였다고 여겨진다. 원양항해에 있어서도 일본이나 중국 남조와의 오랜 교역경험을 통하여 조류(물시)·바람·해류 등에 관한 지식이 풍부하였다. 특히 간만의 차가 심한 우리 나라 남해안·서해안의 해운에 있어서는 조류도나 해류도가 없었던 시절, 범선들은 밀물과 썰물의 현상을 잘 알아야 험한 해역을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다. 오랜 경험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그런데 8세기 중엽에는 당나라 절강인 竇叔蒙이≪海濤志≫(당 大歷 5년, 惠恭王 6년, 770)를 저술하고, 盧肇의≪海潮賦≫(당 大中 4년, 문성왕 12년, 850)과 邱光庭의≪海潮論≫(당 光化 3년, 효공왕 4년, 900) 등이 뒤를 이어 출간되었다. 비록 중국의 연해안에서 일어나는 밀물·썰물에 관한 연구서이기는 하지만, 당시 중국과의 교역이 빈번하던 우리 나라 선원들에게는 많은 길잡이가 되었을 것이다. 특히 우리 나라 배의 키(舵)는 동양고유의 船尾懸垂舵(slung-type axial vertical rudder)형식으로 되어 있어 서양 배의 側舵(side rudder)양식에 비하여 배의 진로를 결정하는 데 있어 월등한 효능을 가지고 있다. 뿐만 아니라 상하의 조정이 자유로워 우리 나라 연안항해에는 많은 이점을 가지고 있다.0817)金在瑾, 앞의 책, 127쪽.

 계절풍과 풍력을 이용한 항해도 통일신라시대에는 크게 발전한다. 옛날 선원들은 연해안을 항해할 때는 주로 조류를 타고, 원양을 항해할 때는 계절에 따라 바람을 이용하였다. 서해에서는 겨울철(12월∼2월) 바람은 북서 및 북풍이 주류를 이루며 봄철(3월∼5월)이 되면 점차 남풍으로 바뀐다. 여름철(6월∼8월)은 봄철과 비슷하며 서남풍이 분다. 가을철(9월∼11월)은 남풍이 다시 북서풍으로 바뀌는 계절이다. 그러므로 신라에서 당으로 출발하는 시기는 가을철이 가장 적당하며, 당에서 신라로 돌아오는 시기는 늦은 봄에서 여름철이 가장 적당하다. 법흥왕 이후 중국 남조와의 교역이나 많은 학문승들의 당 나들이도 이와 같은 계절풍을 잘 이용하고 있었다. 그러나 9세기 이후가 되면 항해술의 발달로 역풍을 이용한 항해도 많아졌다. 開成 4년(839) 일본 조공사 일행을 실은 신라선 9척은 산동반도 적산포에서 신라로 직항하였고, 그것도 7월에 출발한 것을 보면 이들의 항해술이 상당한 수준에 있었음이 입증된다.0818)圓仁,≪入唐求法巡禮行記≫권 1, 開成 4년(839) 7월 23일. 그 당시에는 이미 순풍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橫風·역풍이 불 때에도 능히 항해할 수 있는 기술이 있었고 單돛뿐만 아니라 多돛도 있었음이 분명하다.

 帆裝은 서양선을 기준으로 하면 橫帆과 縱帆으로 크게 나눌 수 있다. 횡범은 四角帆으로서 그 기원은 아주 오래다. 이는 바람을 잘 받는 장점이 있는 대신, 帆布의 한 면만 쓰고 양면을 번갈아 쓸 수 없는 까닭으로 바람을 거슬러 올라가는 逆走性能이 좋지 않다. 이에 반하여 종범은 그 한 邊이 帆柱에 매여져 있기 때문에 돛의 양면이 모두 바람을 받을 수 있고, 따라서 역주성능이 아주 좋다. 범선이 거의 자취를 감춘 오늘날에도 요트에 종범만이 쓰여지는 이유도 바로 그것이 역풍을 뚫고 항진하는 성능이 우수하기 때문이다. 동양식 돛은 종범의 범주에 속하는 것이지만 그 구조와 작용이 아주 독특하다. 돛의 양면으로도 바람을 받을 수 있어 역주성능이 우수하고 조작이 용이하다.0819)金在瑾, 앞의 책, 127쪽. 장보고의 선단이 아무 때나 바다를 가로지를 수 있었던 것도 이러한 기술을 터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중국의 학자들은 실용적인 航海圖도 唐代에는 이미 나왔다고 본다.≪中國航海史≫에는 가탐의<海內華夷圖>를 근거로<唐代北方遠洋航線圖>를 재현하고 있다.0820)中國航海學會 편,≪中國航海史≫(人民交通出版社, 1988), 135쪽. 높은 산과 항포를 그려놓은 항해도가 실제로 이용되었으리라는 짐작은 간다. 원인의≪입당구법순례행기≫를 보면 신라선원들이 실제로 海州의 東海山, 密州의 大珠山, 赤山浦의 赤山을 항해에 둘도 없는 표적으로 삼았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일본「承和朝貢使船」를 안내한 신라인 譯官 金正南도 山은 물론이거니와 淺綠빛 바다를 보고 정확히 배의 위치를 알았다.0821)圓仁,≪入唐求法巡禮行記≫권 1, 承和 5년(開成 3년, 838), 6월 28일.

 8세기 이래 동서를 막론하고 牽星術이 항해에 널리 이용된다. 중국에서는 기원전 2세기에 이미 견성술을 이용하여 항해를 한 흔적이 많다.0822)J. Needham, Science and civilization in China, Vol. 4, Part 3, Navigation, 1971.≪漢書≫藝文志에는≪海中星占驗≫·≪海中二十八宿國分≫등 항해에 관한 전문서적만도 130여 권이나 수록되어 있다. 唐代에 오면 天文으로 항해를 유도하는 방법이 더욱 발달하였고, 그 증거들이≪隋書≫經籍志나≪新唐書≫예문지에 많이 발견된다. 신라에도 고승 道證이 당으로부터 천문도를 가지고 온 일이나0823)≪三國史記≫권 8, 新羅本紀 8, 孝昭王 원년 8월.≪삼국사기≫職官志에 天文博士·司天博士 등 천문을 관장한 전문인이 나타나며,0824)≪三國史記≫권 39, 雜志 8. 천문학자나 첨성대가 있었던 것으로 보아 천문에 관한 연구가 상당한 수준에 이르렀다고 여겨진다. 항해와 관계된 천문서가 있었는지는 알 길이 없다.

 신라선원들은 앞서 지적한 바와 같이 일찍부터 계절풍에 관한 지식을 습득하였고 장보고 시대(828∼841)에 오면 견성술에 의한 항해에도 숙달된 듯하다.≪입당구법순례행기≫에는 항해중 정확한 방향, 예컨대 巽(東南)·坤(西北)·艮(東北) 등을 찾아 항진한 흔적이 군데군데 보인다. 일본에서는 平安朝(794∼1185) 이래「遣唐朝貢船」은 약속이나 한듯이 음력 7월에 九州 博多를 출발하고 있다. 태풍의 계절이고 보면 해난이 자주 일어날 수밖에 없다. 2번이나 풍랑을 만나 도해를 시도한지 2년 뒤에야 겨우 성공한「承和朝貢船」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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