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9권 통일신라
  • Ⅳ. 대외관계
  • 3. 해상활동
  • 2) 해외무역
  • (3) 일본과의 교역

(3) 일본과의 교역

 문헌사료를 통해서 보는 한에 있어서는 일본과의 교역은 鐵과 곡물로 시작된 것 같다.≪三國志≫에는 경상도 지방에서 산출되는 ‘弁辰의 鐵’이 일본으로 수출된 기록이 실려 있다.0843)≪三國志≫ 권 30, 魏書 30, 東夷 弁辰. 경주·蔚山·安東·盈德·草溪·山陰 등지에서 생산된 철이 金海와 울산을 통하여 일본으로 반출된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일본의≪古事記≫에 보이는「韓鍛」과 ≪속일본기≫에 나오는「韓鐵師」·「韓鍛冶」등의 기록에 의해 입증된다.0844)≪古事記≫中.
≪續日本紀≫권 9, 元正記 養老 6년(722) 3월 10일·권 29, 稱德記, 神護景雲 2년(768) 2월 28일.
≪삼국사기≫에 “倭人이 크게 굶주려 찾아와 먹을 것을 구하는 무리가 천여 인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0845)≪三國史記≫ 권 2, 新羅本紀 2, 伐休尼師今 10년 6월. 역사적 사실로 믿기에는 무리가 있다고 해도 곡식의 수출이 있었다는 사실을 시사해주는 기록이라 생각된다.

 신라는 통일 이후 일본과의 교역을 매우 활발히 전개해 간 것 같다.≪일본서기≫天武·持統記에 보면 신라로부터 수입된 물품명이 기록되어 있다. 天武朝는 금·은·철·刀·鼎·錦·絹·布·皮·馬·狗·騾·駱駝0846)≪日本書紀≫권 29, 天武 8년 10월(680).와 細馬一匹·騾一頭·犬二狗·鏤金器·金·銀·霞錦·綾羅·虎豹皮·藥物類·屛風·金器·鞍皮·絹布0847)≪日本書紀≫권 29, 朱鳥 원년(686) 4월.을 수입하였고 다음의 持統朝에는 이 밖에 많은 佛像과 ‘種種彩絹’, 그리고 ‘種種珍異物’0848)≪日本書紀≫권 30, 持統 2년(688) 2월·3년 4월.을 수입하고 있다. 여기에서 신라의 수출품 중 값비싼 금속·직물공예품은 차치하더라도 신라가 西方·南方에서 수입한 ‘駱駝’나 ‘종종진이물’을 다시 재수출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종래 일본에서는 西方文物의 거래가 다 중국을 경유하여 수입된 것으로만 생각해 왔지만 신라를 통한 전래도 많았다는 사실을 알아야 할 것이다.

 서방문물이 신라를 통하여 일본으로 전래되었다는 사실은 일본 奈良의 正倉院에 수장되어 있는 신라물품 교역에 관한 26여 종의 文件과 關市令(養老 年間)의 蕃客·官司·禁物 각 조에 명백히 드러나 있다. 정창원의<買新羅物解>에는 唐 南海(동남아시아·인도·아랍·페르시아) 등의 물산이 허다하게 포함되어 있다.0849)東野治之,<鳥毛立女屛風下貼文書の硏究>(≪正倉院文書と木簡の硏究≫, 塙書房, 1977), 331∼341쪽.≪속일본기≫권 18, 孝謙朝 天平勝寶 4년(경덕왕 11년, 752) 윤 3월조에 신라왕자 金泰廉 이하 700여 명의 대사절단이 來訪하여 6월부터 平城京에서 대대적인 교역활동을 한 소식을 전한다. 이<매신라물해>는 이때 신라로부터 가지고 온 박래품을 官人귀족들이 구매하기에 앞서 그들이 필요로 하는 물건의 품목·가격·수량 등을 기록하여 大藏省·內藏寮에 제출한 구입허가 신청서이다.

 교역품은 주로 금속품·기물·향료·약물·염료 등이 주를 이룬다. 향료에는 薰陸香·靑木香·丁香·藿香·零陸香·甘松香·龍腦香 등 남중국·동남아시아·인도·아라비아산이 매우 많다. 약재에도 呵蔾勒·畢拔 등 동남아시아·페르시아산이 보인다. 이 밖에 日常器物로는 新羅墨·종이·악기·毛氈·松子·密汁·口脂·經卷·佛具·鏡·鋺·盤箸(佐波理加盤) 등 다양한 물품이 엿보인다. 그런데 주목할 만한 일은 김태렴 일행 가운데는 일본에서의 교역을 목적으로 온 사람들이 많았다는 사실이다. ‘신라물’ 가운데는 ‘念物’이라고 표기된 상품들이 있어 당시 일본의 귀족들이 꼭 사야 할 신라상품을 항상 마음에 두고 있었다는 사실을 잘 나타내고 있다. 더욱이 ‘염물’의 가격은 비싸서 거울·丁香의 경우는 ‘면 200톤’이나 되기도 하였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신라 수출품 중에는 중국·서역·동남아시아·인도·페르시아 등지에서 생산된 물품들이 많이 발견된다. 이 사실은 당시 신라가 중개무역이건 직접무역이건 간에 활발한 무역활동을 전개하고 있었다는 증거이다. 당시의 일본무역은 엄하게 국가가 관리하는 공무역이 주류를 이루었다.≪속일본기≫에는 入關된 신라물품을 구매하고자 하는 左·右大臣을 비롯하여 大官·왕녀들에게 구매대금조로 大宰府의 綿 7만여 톤을 하사한 기사를 찾아볼 수 있는데, 이는 당시 일본 대외무역의 한 면을 설명해 주는 한 예라 하겠다.0850)≪續日本紀≫권 29, 神護景雲 2년(768) 10월.

 신라·일본간의 국교는 宣德王 원년(780)에 두절되었다. 그러다가 애장왕 4년(803) 다시 교빈이 시작되고0851)≪三國史記≫권 10, 新羅本紀 10, 애장왕 4년. 이듬해 일본은 ‘黃金 三百兩’을 貢送하였다.0852)≪三國史記≫권 10, 新羅本紀 10, 애장왕 5년. 이는 憲康王 8년(882) ‘황금 삼백량’과 ‘明珠 十個’를 보내온 기록과 더불어 일본의 수출품목을 전하는 귀중한 자료이다. 그러나 양국의 공적 교빈이 단절된 뒤에도 신라상인들의 내왕은 빈번하였다. 일본은 당과의 교통이나 교역상의 정보를 이 신라 국제무역상인들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日本後紀≫嵯峨紀(810∼823, 憲德王時)에는 신라상인들이 자주 長門과 筑前(지쿠젠)에 來航하였고 船舶 20여 척이 對馬島를 드나들어 海賊船으로 오인받기도 하였으며, 일본도 대마도에「新羅譯語」를 두었던 사실 등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이는 곧 신라상인들의 활동이 활발하였다는 방증이다.0853)金庠基,<古代의 貿易形態와 羅末의 海上發展에 就하야>(≪震檀學報≫1, 1934), 100쪽. 그러나 신라상인들의 대일본 사무역이 본격화된 시기는 장보고의 청해진 설치(828) 이후가 아닌가 짐작된다.

 ≪續日本後紀≫에 보면 大宰府가 중앙정부에 올린 글 가운데 “蕃外의 신라국 신하인 장보고가 사신을 보내어 방물을 올렸다”라고 한 내용이 있다.0854)≪續日本後紀≫권 9, 承和 7년(840) 12월 27일. 장보고는 당시 국가간의 무역만이 허용된 관행을 무시하고 신라정부와는 관계없이 독자적으로 자기의 사신을 보내어 통교하고 있었다. 물론 대재부는 “人臣은 국가 간의 교역을 할 수 없다”는 원칙에서 장보고선단을 그들의 거점인 홍려관 인근으로 돌아가게 하였다. 그러나 일본정부는 대재부에다 장보고의「廻易使」들이 가지고 온「唐國貨物」을 민간인에게 적당한 가격으로 매매하도록 지시하고 있다. 여기에 덧붙여 선단이 가지고 온 물품이 값비싼 것이어서 구매자 가운데는 왕왕 가산을 탕진하는 경우가 있었던 듯 이를 경계하는 조치도 취하도록 하고 있다.

 장보고의 교역은 귀족은 물론 筑前(지쿠젠)의 國守와도 직접 상거래를 할 만큼 광범위하게 대규모로 이루어졌다. 承和 9년(842) 정월 장보고가 암살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전 축전의 국수 文室宮田麻呂가 지난해 장보고의 회역사 李忠·楊圓 등이 가지고 온 교역품을 압수한 사건이 일어났다. 文室은 “장보고가 살아 있을 때 ‘당국화물’을 구매하기 위하여 비단(絁)을 대금조로 선불했는데 갑자기 장보고가 죽었다고 하니 약속한 화물을 받을 수 없게 되었으므로 회역사들이 가지고 온 상품을 차압한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일본정부는 장보고선단에 퍽 동정적이어서 문실이 회역사의 상품을 탈취한 행위를 막지 못한 대재부 관리들을 질책한 뒤 화물을 되돌려 주게 하였다.0855)≪續日本後紀≫권 11, 承和 9년(842) 정월 10일.

 이와 같이 장보고의 대일본 교역은 대재부의 관리들은 물론 중앙정부에서도 관심이 지대하였다. 그러기에 장보고 사후에도 공식적인 교역은 거부되면서도 민간교역은 여전히 허용되고 있었다.≪속일본후기≫에 보면 太宰大貳藤原衛의 상주문 4조가 실려 있다.0856)≪續日本後紀≫권 12, 承和 9년(842) 8월 15일. 그 가운데의 하나가 신라 민간인의 입국과 상인들의 활동에 관한 내용이다. 민간인들의 입경은 국정염탐이라는 구실로 엄하게 금하고 있는 반면, 상인들의 거래행위는 허용하여 가지고 온 물산을 민간에서 교역하게 한 뒤 곧 돌아가게 하고 있다. 일본정부의 이와 같은 궁색한 조치는 당시「당국화물」에 대한 일본사람들의 욕구를 쉽사리 막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