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9권 통일신라
  • Ⅳ. 대외관계
  • 3. 해상활동
  • 3) 당에서의 활동
  • (1) 유학생과 문인의 교유

(1) 유학생과 문인의 교유

 신라가 唐에 처음으로 子弟를 보내어 國子監에 입학시킨 것은 宣德王 9년(640) 5월의 일이다.0875)≪三國史記≫권 5 新羅本紀 5, 선덕왕 9년·≪新唐書≫권 44, 志 34, 選擧 上·≪新唐書≫권 198 列傳 123, 儒學 上 및≪唐會要≫권 35, 學校. 이 뒤 소위「宿衛學生」의 이름으로 많은 학생이 왕래 수학하였던 것이다.0876)申瀅植, 앞의 책, 354∼359쪽.
金世潤,<新羅下代渡唐留學生에 대하여>(≪韓國史硏究≫37, 1982), 150∼152쪽.
그리하여 僖康王 2년(당 開城 2년, 837)에는 그 당시 당의 國學에서 수학하던 유학생은 모두 216명이나 되었다.0877)≪唐會要≫권 36, 附學讀書.

 사실 신라인의 유학열은 9세기초 당이 외국인을 위하여 실시한 賓貢科 제도가 한층 자극시켰다고 생각된다. 長慶 元年(憲德王 13년, 821) 金雲卿이 처음으로 빈공과에 登第한 이래 唐末까지는 58명이, 五代(梁·唐)에는 32명이 급제하였다고 전하니 대략 90명이나 되는 셈이다(발해 10명 포함).0878)≪東文選≫권 84, 送奉使李中父還朝序.
安鼎福,≪東史綱目≫권 5上, 眞聖女王 3년.
그렇다면 등과하지 못한 유학생의 수는 이들의 십수배나 되었을 지도 모르는 일이다. 文宗 開成년간(836∼840)에만 해도 귀국한 학생들의 수는 300여 명이나 되었다.0879)嚴耕望,<新羅留學生與僧徒>(≪歷史語言硏究所集刊≫外編 제4종, 中央硏究院, 1961), 653쪽. 이러한 사실은 또한 文聖王 2년(840)에 당이 수업연한이 끝나 마땅히 귀국하여야 할 유학생 105명을 放還케 하고 있는 것에서도 뒷받침된다.0880)≪三國史記≫권 11, 新羅本紀 11, 문성왕 2년·≪舊唐書≫권 199 上, 列傳 149 上, 東夷 新羅·≪新唐書≫권 220, 列傳 145, 東夷 新羅·≪唐會要≫권 95, 新羅. 신라가 당으로 유학생을 처음 파견한 이래 멸망할 때까지 근 300년간 그 수를 줄잡아 2,000여 명이나 될 것이라고 추정하기도 한다.0881)嚴耕望, 앞의 글, 653쪽.

 安鼎福(1712∼1791)은≪三國史記≫와≪東文選≫에서 빈공과 及第者 20명을 찾아내고 그 명단을 밝히고 있다.0882)安鼎福,≪東史綱目≫권 5 上, 진성여왕 3년. 그러나 근자에 와서 학자들의 연구로 52명의 人名을 찾아내었다.0883)金世潤, 앞의 글, 160쪽. 그런데 이 많은 유학생들 가운데 얼마나 되는 사람들이 唐文士의 누구와 교유하였는지는 상세히 알 수 없다. 다만 이들 빈공과 출신의 몇몇의 행적을 통하여 이들은 훌륭한 외교사절로서의 책무를 다했을 뿐만 아니라 唐人士들과의 교유로 신라문물의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특히 불교와 도교 및 神仙術·老莊思想과도 깊은 관계를 맺고 그 영향을 받았다. 더욱이 禪宗의 깊은 이해는 3교융합은 물론 새로운 사회의 방향제시와도 깊은 관계가 있었다.0884)申瀅植, 앞의 책, 448쪽. 그러므로 빈공과 급제자 가운데 벼슬을 제수받았던 인사 가운데 행적이 뚜렷한 최치원을 예들어 그의 교유관계를 살피고 그의 문화적 축적이 어떠했던가를 고찰하여 당시 유학생·빈공급제자들의 在唐生活의 한 면을 살펴보기로 하겠다.

 ≪新唐書≫藝文志에는 최치원의 재당문학활동의 소산인≪四六≫1권과≪桂苑筆耕≫20권이 기재되어 있다.0885)≪新唐書≫권 60, 志 50, 藝文 4. 당문사가 아니면서 그 이름이 예문지에 등재되어 있다는 사실은 실로 놀라운 일이다. 최치원은 憲安王 원년(857) 왕도 慶州 沙梁部의 한 6頭品 가문에서 출생하여 12세 때 당에 유학하였다. 景文王 14년(874) 그의 나이 18세가 되던 해에 빈공과에 급제하여 江南道 宣州 溧水縣尉에 제수되어 관인생활을 시작하였다.0886)李基東,<新羅下代 賓貢及第者의 出現과 羅唐文人의 交驩>(≪全海宗博士華甲紀念 史學論叢≫, 一潮閣, 1979), 640쪽. 嚴耕望은 離家時年 12, 登科時年 19, 歸本國時年 30으로 보고 있다(앞의 글, 649쪽). 최치원은 黃巢의 亂(875∼884)이 일어난 뒤 縣尉직을 사임하고 淮南에 있던 중 乾符 7년(880) 黃巢討伐軍의 최고 지휘관(諸道行營兵馬都統)이 된 淮南節度使 高騈(821∼887)의 從事官이 되었다. 헌강왕 11년(885)초 귀국할 때까지 4년 넘게 고병의 막하에서 文筆을 맡고 있었다.

 최치원은 그의 재당 18년간의 후반을 강남에서 지냈다. 당 문사와의 본격적인 교유도 종사관 재임기간에 이루어졌다. 고병 역시 이름있는 詩人이었다.0887)≪全唐詩≫9함 7책. 최치원도 자주 그에게 시를 지어 바치기도 했다(崔致遠,≪桂苑筆耕集≫권 17). 그 뒤 고병은 神仙長生術에 빠져 끝내 폐가하고 말았다. 최치원도 이의 영향을 받았는지 그의 글 가운데는 神仙·道術의 풍이 엿보인다. 뿐만 아니라 이 시기는 江南佛敎가 크게 번창하고 儒釋交遊도 빈번하던 때라 그도 佛法을 깊이 이해하고 高僧大德·佛寺에 관한 많은 글(金石文 등)을 남기고 있다. 그의 종사관 동료 가운데는 문사 顧雲·裵鉶이 있다. 고운은 최치원과는 같은 해 급제한 池州(安徽省 貴池縣) 출신이었다. 그는 고병 막하의 종사관의 수장격인 都統判官직에 있으면서 최치원을 고병에 추천한 인물로 추측된다.0888)今西龍,<新羅崔致遠傳>(≪新羅史硏究≫, 近澤書店, 1933), 375쪽.≪신당서≫예문지에는 그의 저작 서목이 기재되어 있어 왕성했던 그의 활동을 짐작케 한다.0889)顧氏編遺十卷, 苕川總載十卷, 纂新文苑十卷, 啓事一卷 賦二卷, 集遺具錄十卷(≪新唐書≫권 60, 志 50, 藝文 4). 특히 최치원과는 친교가 깊었던 듯 그의 문집에는 고운에게 화답한 七言律詩 2首가 남아 있다. 훗날 최치원이 귀국할 때 그가 지어 이별을 아쉬워했던 送別詩는≪삼국사기≫권 46, 崔致遠傳에 요약 전재되어 있다.

 최치원의 교유는 종사관 동료들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었다. 그의≪계원필경≫권 7·8·9·10에는 鄭畋(禮尙)·鄭績 父子를 비롯하여 蕭遘(戶尙) 裵哲(禮尙) 鄭從讜(吏尙) 李蔚(吏尙) 등 명사들과도 교분의 흔적을 남기고 있다. 특히 鄭畋(825∼883)의 문학은 뛰어나고 깊으며 더욱이 시부에 능하였다고 하니0890)≪舊唐書≫권 178, 列傳 128, 鄭畋. 그는 당대의 일류문사들과도 교분이 있었음이 분명하다.≪삼국사기≫에서 그의 傳을 보면 余杭詩人 羅隱과도 가까이 지낸 듯하다. 宰相 정전·이울과도 친분이 두터웠던 나은의 시문은 천하에 널리 알려져 특히 詠史에 빼어났다고 했다.

 최치원은 고운과 同鄕인 張喬와의 교분도 돈독하였다.≪동문선≫권 12에는 장교의 시에 화답하는 칠언율시가 수록되어 있다.≪신당서≫예문지 4에<張喬詩集>2권이 등재되어 있어 어진 선비의 한 사람으로 알려진 저명한 시인이다. 그는 進士에 급제하였으나 황소의 난을 만나 향리 가까운 九華山(安徽 貴池 東南)에 은거하였다. 당시 구화산은 신라승 金地藏(喬覺, 696∼794)0891)≪宋高僧傳≫권 20, 唐池州九華山化城寺 地藏傳 이후 불교성지로 이름나 있어서 많은 신라인·신라승들이 순례, 留錫한 곳이기도 하다. 그러기에 장교는 金夷魚·朴球·朴充 등 신라인 문사뿐만 아니라 雅覺·頭陀僧을 비롯하여 이름모를 禪僧에게 送詩로 석별의 정을 나누기도 하였다.0892)≪全唐詩≫10함 1책. 이와 같이 장교는 당문사의 누구보다도 신라인 유학생·유학승들과 광범위하게 친교를 맺고 있었다. 이점에 특히 주의해 볼 만하다.

 300년에 가까운 장기간에 걸친 唐文化의 수용과 축적으로 신라사회의 지적 분위기는 唐風으로 물들어 갔고, 신라 말기의 혼란을 극복하면서 고려사회의 성립과 그 국가운영에 주도적인 역할을 한 지식인 가운데 중국유학생, 특히 빈공과 출신자가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다시금 주목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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