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9권 통일신라
  • Ⅳ. 대외관계
  • 3. 해상활동
  • 3) 당에서의 활동
  • (2) 구법승의 순례

(2) 구법승의 순례

 佛法을 찾아 중국으로 건너간 승려들의 수도 유학생 수에 못지 않게 많다. 진흥왕 10년(549) 신라승 覺德이 중국 남조의 梁으로 求法길에 나섰고,0893)≪海東高僧傳≫권 2.
≪三國史記≫권 4, 新羅本紀 4.
明觀도 같은 왕 26년 陳에서 구법한 뒤 經論 1,700여 권을 가지고 귀국하였다.0894)위와 같음. 그 뒤 신라가 멸망할 때까지 隋·당에 건너가 구법활동을 하거나 그 곳에 머물면서 弘法에 전념한 승려의 수는 족히 기천에 달했을 것이다.≪三國遺事≫에는 원광법사가 西學에서 귀국한 뒤 승려들의 발길이 연이어져 끊이지 않았다고 기술하고 있다. 이러한 내용을 통하여 우리는 그 당시 入唐求法僧들의 모습을 엿볼 수 있을 것 같다.0895)≪三國遺事≫권 4, 義解 5, 圓光西學. 최치원도 “儒者이건 佛者이건 할 것 없이 많은 사람들이 앞을 다투어 入唐하였다”는 소식을 전하고 있다.0896)崔致遠撰,<眞鑑國師碑銘幷序>(≪海東金石苑≫권 1).

 당 義淨(635∼713)의≪大唐西域求法高僧傳≫에는 중국에서 인도로 간 구법 승려들이 58명이나 기록되어 있다. 그 가운데 신라승 9명(失名僧 2명 포함)과 고구려 승려 한 사람도 보인다.0897)≪三國遺事≫권 4, 義解 5, 歸竺諸師조에는 실명승 2명을 포함 도합 10명이 된다. 이들은 대개 삼국통일 이전에 天竺으로 향발하였던 승려들이다. 그 뒤 慧超(700?∼780?)도 아마 開元 11년(성덕왕 22년, 723) 무렵 중국 廣州에서 배를 타고 천축으로 간 것이 분명하다. 먼저 입당구법하다가 다시 천축으로 習法하러 간 신라승들의 수가 이렇게 많았다는 것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당에 머물며 구법하던 僧徒들을 종파별로 분류하여 130여 명이 찾아졌다.0898)高柄翊은<支那入學僧表>(李能和,≪朝鮮佛敎史≫, 朝鮮史講座分類史, 조선사학회, 1926, 53쪽)를 교정 보완하여<新羅僧求法入唐表>(高柄翊,≪東亞交涉史의 硏究≫, 서울大 出版部, 1970, 65∼68쪽)를 작성하여 약 90여 명의 이름을 수록하고 있다. 嚴耕望은 당에 머물며 구법하던 僧徒들을 종파별로 분류하여 130여 명을 찾아 내고 있다(嚴耕望, 앞의 글, 678쪽). 그러나 史籍에 보이는 승려 전부를 빠짐없이 망라하였다 해도 사적에 이름이 남지 않은 허다한 구법승들이 있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원인의≪입당구법순례행기≫에 보면 赤山村(山東省 榮成市 石島鎭)에 건립한 新羅僧院인 法華院에는 常住僧尼가 27명이 유석하고 있었다.0899)圓仁,≪入唐求法巡禮行記≫ 권 2, 開城 5년(840) 정월. 그러나 인근의 天門院이나 劉村의 僧院에는 얼마나 많은 신라승이 상주하였는지는 알 길이 없다. 또 그는 武宗(841∼846)의 불교탄압이 한창일때 左神策軍 軍容院에 소환된 長安 東半部의 外國僧 21명 가운데 10명이 신라승이었음을 밝혀주고 있다0900)圓仁,≪入唐求法巡禮行記≫ 권 3, 會昌 3년(843) 정월 27일.. 이 밖에 외국승으로 祠部의 牒이 없어 還俗된 자 가운데 신라승이 매우 많았다는 사실0901)圓仁,≪入唐求法巡禮行記≫권 4, 會昌 5년(845) 4월 15일.은 在唐 신라승들의 한 면을 잘 설명해 주고 있다.

 원인은 五台山 순례길에 오르면서 登州府 南街에 신라관이 있었다는 소식과 靑州府 龍興寺와 長山縣 醴泉寺의 신라원에서 유숙했던 사실을 전하고 있다.0902)圓仁,≪入唐求法巡禮行記≫ 권 2, 開城 5년(840), 3월 2일·21일, 4월 5일·6일. 당시 里程을 충실히 기록했던 원인도 청주 장산현에서 서북쪽 오대산으로 길을 바꾸었기 때문에 서남쪽 황하유역을 따라 장안에 이르는 간선도로변에 있었을 신라관·신라원에 관한 기록을 더 이상 남기고 있지 않다. 다만 후일 그의 후학 圓珍(814∼891, 5세 좌주)이 장안에 머물 때 左街 龍興寺의 신라원에서 기거한 적이 있어 그 당시의 사정을 짐작할 따름이다.0903)圓珍,≪行歷抄≫.

 지금의 晒字鎭 곤유산(烟台市 곤유산 林場 제2분장) 아래에는 신라승원이라 전해오는 無染院 절터가 있다. 우리 나라 禪門九山의 하나인 聖住山派의 조사 無染禪師(801∼888)가 세우고 기거하였던 곳이라 믿어진다.≪모평현지≫에는 光化 4년(天復 원년, 901) 3월에 세운「唐無染院碑」의 銘文이 수록되어 있다. 주로 무염원 重修 때 대시주들의 이름과 여기에 관계된 신도들의 성명이 나열되어 있다. 그들 가운데「鷄林人 金淸押衙」의 이름이 보인다. 그는 이 절의 중창을 주관했던 단월 중의 한 사람이었다. 이 승원에는 신라인들이 많이 살고 있어「句當新羅所」까지 설치해야만 했던 文登의 땅에 그것도 적산촌으로 이어지는 길목에 위치하고 있었다는 점과「계림인 김청압아」가 대시주였다는 사실 등으로 미루어 무염선사와 관계있었던 사찰임이 분명하다.0904)金文經, 앞의 글(1993), 107쪽.

 宋 道原의≪景德傳燈錄≫에는 과거 7佛에서 法眼文益(885∼958)에 이르는 禪僧 1,701명의 傳燈法系를 상술하고, 外國僧 43명도 함께 등재하고 있다. 그 가운데 42명이 신라승이라는 사실에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 특히≪경덕전등록≫에 기재된 초기 승려들의 師承은 사실과 다른 점이 많지만 신라승의 경우는 대부분 唐末·五代의 일이라 믿을 만하다. 이 중 35∼36명이 강남 각지에서 習禪하였다. 그러므로 신라 禪門九山의 開山祖는 단 두분 즉, 京兆 章敬寺 懷惲法系의 玄昱(鳳林山, 경남 창원)과 蒲州 麻谷寺 寶徹法系의 無染(聖住山, 충남 보령)을 제외하고는 모두 長江유역에서 구법한 스님들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여기에다 曦陽山(경북 문경 鳳巖寺) 一山만이 四祖 道信의 法系이고 그 나머지는 曹溪法系이다. 그리고 또 조계법계 八山 가운데 須彌(황해도 해주 廣照寺) 一山을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江西馬祖의 법계를 잇고 있다.

 ≪嘉定赤城志≫권 2, 黃岩縣條에 보면 “신라방은 현 동쪽 1리에 있고 옛 志에 五代 때 신라사람들이 이곳에 살았으므로 이름하였다”고 있다. 지금의 黃岩市 城內의 柏樹巷 일대라고 추정한다.0905)林土民,<唐·吳越時期浙東與朝鮮半島的通商貿易和文化交流之硏究>(≪고·중세시대의 한중문화교류사≫, 문화체육부, 1993), 57쪽. 또 권 14, 寺院(黃岩縣)條에는 田 84畝, 地 6畝, 山 18畝를 소유한 제법 큰 사찰인 悟空院이 있었다는 소식을 전한다. 이 寺院이 신라승원이라는 기록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는 없다. 그런데≪天台全誌≫권 6, 寺院條에 보면 天台宗 本山 國淸寺 앞에 신라승 悟空이 세운「新羅園」이 있었다고 전하고 있다. 필경 이 오공이 국청사에서 구법한 뒤 황암의 신라방에 이르는 길목에 오공원을 세워 상주한 바로 그 스님이라 믿어본다. 마치 山東의 赤山村에 新羅僧院인 法華院이 건립된 이치와 같다고 하겠다.

 ≪赤城志≫권 28, 禪院에 의하면 오공원은 황암현 東鎭山(東南 300里 海中)에 있는 禪院이다. 後晋 天福 6년(941)에 건립되어 宋 英宗 治平 3년(1066)에 賜額된 사찰이다. 이 동진산은 唐 武后 永昌 원년(689) 이후 해상교통로의 중요한 길목으로 부각되었던 것 같다. 台州에서 明州를 거쳐 신라·고려로 행하는 航線上의 요충지였던 것이다.≪적성지≫권 20에는 ‘縣東 240리’에 위치한다고 있어 앞의 내용과 다소 차이는 있지만 ‘산 위에서 바라보면 바다 가운데 큰 돌이 돌출해 있는데 배를 타고 고려로 가는 자는 반드시 이 돌을 길잡이로 삼았다’고 있다. 오공원과 신라방 그리고 신라·고려에 이르는 항선을 고려한다면 동진산 오공원과 국청사 신라원을 세운 스님은 같은 오공임이 틀림없는 것 같다.

 이 밖에≪天台全誌≫권 7, 釋條에는 唐 景福 원년(892) 天台山 平田寺에 留錫한 신라승 道育에 관한 흥미있는 기사도 남기고 있다. 중국에 유학하여 天台敎義를 學習한 新羅高僧 7명 가운데 後晋 天福년간(936∼941, 아마 漢周년간)에 국청사에 와서 높은 학덕을 닦아 천태 16대의 祖師가 된 고려승 寶雲尊者가 있다는 사실이다.0906)≪佛敎統紀≫권 8, 寶雲尊者義通·≪天台全誌≫권 7, 釋.
嚴耕望은 중국에 유학하여 天台敎義를 學習한 新羅高僧들을 佛祖統紀에서 찾아내어 그들 7명의 師承관계를 밝히고 있다(嚴耕望, 앞의 글, 659∼660쪽).
異國僧으로 중국의 천태법통을 계승하였으니 그의 학문의 심오함을 족히 짐작할 수 있겠다.

 신라 下代의 불교를 생각해 보면 무엇보다도 강남에 유학하여 習禪하였던 많은 스님들의 역할에 생각이 미친다. 선문9산의 근원지이며≪祖堂集≫편찬과도 깊이 연관되어 있는 곳이 바로 이 강남지역이다. 뿐만 아니라 935년 신라가 망한 뒤에도 계속 이곳에 남아 구법하여 五代 江南佛敎의 발전과 신생 고려국가의 불교문화 번창에 이바지한 승려들의 역할과도 연관지어 생각해 볼 만하다.

 이와 같이 신라승들은 광대한 중국대륙의 어느 곳에서나, 심지어는 황량한 서역에서까지도 寺院의「職僧」으로 師僧으로 혹은 譯經場의 학문승으로 또는 山間村落의「化俗法師」로 홍법활동에 전념하였다. 唐僧 海雲의≪兩部大法相承師資付法記≫에 “신라승 수만이 몸을 잊고 勝法을 구하러 入唐하였다”고 한 내용에서 저간의 소식을 알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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