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9권 통일신라
  • Ⅴ. 문화
  • 1. 유학과 역사편찬
  • 1) 유학의 발달
  • (1) 성격

(1) 성격

 문화는 한 나라의 사회적 성격을 반영한 것으로 그 민족이 경험한 生活樣式을 의미한다. 따라서 통일신라의 문화는 신라 이래의 토착문화와 백제·고구려 문화, 그리고 盛唐文化와의 융합의 총체라 할 것이다. 문화의 담당자인 귀족의 성격, 통일전쟁에 따른 백성들의 지위향상과 통일 후 專制政治의 발달에 수반되는 사회변천과의 관계를 고려할 때, 몇 단계의 변화를 살펴볼 수 있다. 즉 통일신라문화의 성격은 제1단계로 7세기 후반에서 말엽에 이르는 시기, 제2단계로 8세기 초엽 이후 9세기 초엽까지 통일신라 전성기, 그리고 9세기 초엽 이후 멸망기까지로 3분할 수가 있다.

 제1기는 武烈王王權의 성립기로부터 통일전쟁을 매듭짓는 文武王(661∼681)·神文王代(681∼692)에 이르는 시기로 주로 통일전쟁을 준비·완료하는 때이다. 이 시기는 삼국문화가 각기 그 전통을 유지하면서 갈등을 빗고 있던 과도기였다. 다행히 신라가 唐과의 전쟁에서 승리함으로써 한국 고대문명의 전반적인 붕괴를 막을 수 있었으며,0921)金哲埈,<統一新羅支配體制의 再整備>(≪한국사≫3, 국사편찬위원회, 1976), 23쪽. 백제·고구려유민을 신라의 관료조직이나 군사조직(9서당)에 편입시킴으로써 귀화인이나 이민족에 대한 관용과 동맹을 통해 민족융합의 길을 마련할 수 있었다.0922)末松保和,≪新羅史の諸問題≫(東洋文庫, 1954), 357쪽. 특히 백제·고구려유민에 대한 정치적 배려를 통해 이들을 反唐戰線에 이용하여0923)존 C. 재미슨,<羅唐同盟의 瓦解>(≪歷史學報≫44, 1969), 2쪽. 민족통합의 기틀을 마련하였고, 安勝·淵淨土 등 귀화인의 무대나 외교사절로의 활용,0924)申瀅植,<三國의 對外關係>(≪韓國古代史의 新硏究≫, 一潮閣, 1984), 317쪽. 그리고 熊川州 출신 고승인 憬興을 國老로 맞아들여 민심을 수렴하는0925)許興植,<新羅佛敎의 組織과 行政制度>(≪新羅文化祭學術發表會論文集≫8, 1987), 150쪽. 등 민족통합의 당위성을 보여준 것도 같은 맥락으로 생각된다.

백제 정벌 직후, 武烈王은 백제인도 그 재능을 고려하여 佐平 忠常과 常永, 達率 自簡에게는 一吉湌을 주어 摠管의 직에 임명하였고, 恩率 武守에게는 大奈麻의 위를 주어 大監의 직을 주었다(≪三國史記≫권 5, 新羅本紀 5, 태종무열왕 7년 11월).

 위에서 볼 수 있듯이 백제인에게 통일신라에서의 새로운 활로를 열어줌으로써 外位의 폐지가 불가피하였으며,0926)權悳永,<新羅外位制의 成立과 機能>(≪韓國史硏究≫50·51, 1985), 105∼106쪽. 하급관리나 일반백성들에게는 參戰을 통한 국정참여 또는 신분향상의 길을 넓혀줄 수 있었다.0927)申瀅植,<三國統一의 歷史的 性格>(≪統一新羅史硏究≫, 삼지원, 1990), 44쪽

 제2기는 신문왕 이후 聖德王(702∼737)·景德王(742∼765) 등 무열계 中代 전제왕권이 확립된 후, 下代 초엽에 이르는 시기이다. 이때는 나당간의 친선이 도모되어 활발한 교섭에 따라 당문화가 수용되었으며, 무열왕권의 전제정치가 본 궤도에 올라선 통일신라의 안정기에 해당한다. 특히 문무왕·신문왕대의 律令政治의 모색은 전국민을 하나의 관료제도라는 틀 속으로 규제할 수 있었고, 유교의 왕도정치사상과 불교의 圓融·調和思想이 결합되어 萬波息笛이나 安民歌의 태평관으로 국민을 하나의 공감대 속으로 묶을 수 있었다.0928)金相鉉,<萬波息笛說話의 形成과 意義>(≪韓國史硏究≫34, 1981), 27∼63쪽. 다시 말하면 이 시기에 무열왕권은 강력한 전제왕권으로 국토와 정치를 통합시켰으며, 유교와 불교의 융합으로 새로운 민족문화를 창출하여 신라문화의 후진성 극복과 재구성을 가능케 하였다.0929)金哲埈, 앞의 책, 180쪽.

 제3기는 元聖王系의 하대로서, 신라사회의 구조적 모순이 노출되면서 지방세력의 반발 내지는 백제·고구려 잔민의 이른바 國系意識이 나타나 정치적 대립이 심화되기 시작하였다.0930)崔根泳,≪統一新羅時代의 地方勢力硏究≫(신서원, 1990), 63쪽. 더구나 眞骨勢力에 반발한 6두품 계열의 등장과 이들의 禪宗과의 결합0931)崔柄憲,<新羅下代禪宗九山派의 成立>(≪韓國史硏究≫7, 1972) 참조. 내지는 渡唐留學을 통한 새로운 활로모색은 나말의 사상·학문변화를 촉진시키게 되었다.0932)申瀅植<宿衛學生考>(≪歷史敎育≫11·12, 1969 ; 앞의 책, 1984).
李基東,<新羅下代賓貢及第者의 出現과 羅唐文人의 交驩>(≪全海宗博士華甲紀念論叢≫, 1979 ;≪新羅骨品制社會와 花郞徒≫, 一潮閣, 1984).
그러나 이들 유교적 지식층은 나말에 이르러 漢文化에 몰입되었을 망정 王道的인 유교정치이념을 표방하여 國史編纂 내지는0933)申瀅植,<新羅人의 歷史認識과 그 編纂>(≪白山學報≫34, 1988) 참조. 王權强化의 정치윤리를 제시하여 고려왕조 개창과 발전에 기여한 바 있었다.0934)申瀅植,<宿衛學生의 修學과 活動>(앞의 책, 1990).
李基東,<羅末麗初 近侍機構와 文翰機構의 擴張>(앞의 책) 참조.

 이러한 3단계로 변천한 통일신라 문화는 現實主義的인 특징을 지닌 신라(통일 전) 문화를 모체로 하여0935)李丙燾,<新羅文化의 特徵>(≪韓國史의 理解≫, 三省出版社, 1984), 188∼195쪽. 백제·고구려의 그것을 결합하고 당 문화까지 포용하면서 성장하였다. 그 중에서도 불교가 주류였으며, 여러 문화의 복합과정에서 한국 고대문화로서 자기완성을 본 것이다.0936)金哲埈, 앞의 책, 180∼181쪽. 나아가서 통일신라 문화의 또 하나의 특징은 원래 불교에 의해서 성장되기 시작한 유학이 국가체제 발달과정에 따라 그 필요성이 확대되어 그 결과 漢文學이나 儒學이 발달하였다.0937)金哲埈, 앞의 책, 184∼185쪽. 따라서 國學이나 讀書出身科와 같은 교육제도가 성장하고 유교사상에 대한 이해의 폭이 넓어졌으며, 왕권의 전제화를 뒷받침할 수 있었다. 다만 신라불교 자체가 유교사상을 다분히 내포하고 있었으며, 기초적인 유교의 덕목은 불교를 통해서 수용되었기 때문에0938)中村元,<佛典漢譯に影響を及ぽした儒敎思想>(≪中村元選集≫9) 참조. 양자는 밀접하게 관련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므로 통일신라 이후 전제왕권하에서도 불교와 유교는 왕권의 초월성과 정당성을 위해 공존하였으며, 조화를 유지하였다.0939)申瀅植,<新羅中代專制王權의 特質>(,앞의 책, 1990), 161쪽.

 그러나 통일신라의 유학은 점차 불교의 영향을 벗어나 經典에 입각한 유교 본연의 성격을 나타내면서 ‘君子之風과 仁義之鄕’을 강조하면서 당나라의 수준과 맞설 수 있게 되었다. 적어도 天下의 중심을 자처하는 당나라와의 관계는 적어도 문화(유학) 수준에 있어서 대등할 때에만 정상적인 교류가 가능해진다.

그대(성덕왕)의 二明(부부)은 慶福하고 三韓(신라)은 善隣이니 때로는 仁義之鄕의 칭이 있고, 대대로 勳賢之業을 나타냈다. 그 문장과 예악은 君子之風을 드러냈고, 納款과 輸忠은 勤王의 節을 다하였다(≪三國史記≫권 8, 新羅本紀 8, 성덕왕 30년 2월).

 이와 같이 당에서 신라의 유학에 대한 인식을 깊게 하였으며, 孝成王 2년(738)에 弔祭使로 온 邢璹가 신라를 ‘君子의 나라로 자못 書記를 앎이 중국과 유사하다’라 한 사실에서도 엿보인다.0940)≪三國史記≫권 9, 新羅本紀 9, 효소왕 2년 2월.

 이와 같은 통일신라의 유학에 대한 깊은 이해는 역대 당의 冊封文이나 교서에 나타나 있으며, 宿衛學生의 수효나 활동에서도 명백하게 알 수 있다.0941)李基東, 앞의 글(1979), 290∼291쪽.당의 賓貢科에 합격한 숙위학생들이 그곳에서 文名을 남겼으며, 元弘(문성왕 12년(850) 입당사)과 朴仁範(헌강왕 2년(876) 등제한 숙위학생)의 憑定·憑宿과의 관계를 비롯하여 崔致遠(경문왕 14년(874) 등제한 숙위학생)과 高騈·顧雲·裵鉶·羅隱·張喬, 그리고 崔承祐(진성여왕 7년(893) 등제한 숙위학생)와 曹松과의 관계는 당시 신라유학의 수준을 반영해 줄 수 있었다.0942)李基東, 위의 글, 291∼295쪽.
申瀅植,<統一新羅의 繁榮과 西海>(앞의 책, 1990), 303쪽.
따라서 당의 持節使도 대부분 당대의 碩學이나 巨儒로 선발되고 있었다.0943)李基東, 앞의 글(1979), 293∼302쪽.

 또 경덕왕 15년(756)에 唐 玄宗이 준 다음의 五言詩에서도 신라유학의 번창함을 확인할 수 있다.

衣冠은 禮를 알고 忠信은 儒學을 높일 줄 안다. 참되다 하늘은 그대를 내려다보며, 어질다 德은 외롭지 않으리라(≪三國史記≫권 9, 新羅本紀 9, 경덕왕 15년).

 그러나 이러한 왕도정치의 전개과정에서도 불교식의 散骨(화장)은 遺詔란 이름으로 강조되고 있었음도 물론이다.0944)≪三國史記≫권 9, 新羅本紀 9, 선덕왕 6년(末尾 下詔).

 신라시대의 유교는 교육기관의 성립과 더불어 발전되었으며, 그 속에서 요구하는 德目이 국가관을 요구하는 국민적 공감대 역할을 함으로써 왕도정치구현에 기여하였음이 특징이다.0945)李基白,<儒敎受容의 初期形態>(≪新羅思想史硏究≫, 一潮閣, 1986), 195∼297쪽. 따라서 한국의 유교사는 크게 7세기 후반∼8세기말까지의 제1기(國學 설치∼讀書出身科 설치)와 8세기말 이후의 제2기(하대∼후삼국), 그리고 고려초의 제3기(최승로∼과거제 실시)로 나누고 있다.0946)李基白, 위의 책, 222쪽. 그런데 이러한 시대구분을 초월하여, 中代에 있어서 주로 6두품 계열이 진골귀족의 불교적 경향을 반대하여 유교를 정치이념으로 삼고 활약하였지만, 왕권강화라는 기본입장을 취하였다. 따라서 국학이나 독서출신과도 그러한 맥락 속에서 설치된 것이며, 왕권까지도 하나의 道德律 속에 규제하려는 역할을 함으로써 중대에서는 전제왕권을, 하대에서는 反豪族的 기틀을 마련할 수 있었다.0947)李基白, 위의 책, 223∼234쪽. 이러한 유교의 이상은 골품제의 붕괴과정에서도 중앙집권적 정치체제를 지향하였기 때문에 여초의 國史編纂이나0948)申瀅植,<新羅人의 歷史認識과 그 編纂>(앞의 책, 1990), 225∼228쪽. 科擧制 創設 및 왕권강화에 이론적 근거를 제시할 수 있었다.0949)申瀅植, 앞의 책(1984), 459쪽.

 더구나 이러한 유교정치이념이 왕권강화를 촉진한 이론으로 정착했지만, 하나의 道德至上主義라는 규범을 제시하여 왕 자신이 그 제한을 받아야 하는 모순을 갖게 되었다.0950)李基白, 앞의 책, 228쪽. 그러므로 이와 같은 유교정치이념은 고려시대 이후 한국정치사에 있어서 뚜렷한 가치관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다만 지나치게 과거위주의 풍조와 好文의 조류를 초래하여 文物에 빠지게 된 결과를 낳고 말았다. 또한 유·불의 竝存的 경향이 신라 중대 이후 일반적 대세였으므로 고려 중기까지 우리 나라 사상계의 성격은 양자의 관계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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