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9권 통일신라
  • Ⅴ. 문화
  • 1. 유학과 역사편찬
  • 1) 유학의 발달
  • (3) 도당유학생의 활동

(3) 도당유학생의 활동

 우리 나라 유학발달에 획기적 계기가 된 것은 당의 국자감에 유학한 후 그곳에서 賓貢科에 합격한 宿衛學生들의 활동이다. 삼국은 640년(영류왕 23년, 무왕 14년, 선덕왕 9년) 같은 해에 당의 국자감에 학생을 파견한 일이 있었다.0990)≪新唐書≫권 44, 志 34, 選擧 上 및≪唐會要≫권 35, 學校. 그러나 고구려는 계속된 對唐衝突, 백제는 정치적 혼란으로 유학생파견이 어려웠으며, 신라도 통일전쟁에 따른 대당관계의 단절로 유학생 문제는 논의될 수가 없었다. 그러므로 성덕왕 2년(703) 나당간의 국교가 재개되면서 양국간의 친선이 이룩됨에 따라 당유학이 활발해 졌다.0991)申瀅植,<羅末麗初의 宿衛學生>(앞의 책, 1984), 436∼437쪽. 또한 당의 빈공과 설치와 무열왕권의 전제화과정에 소외된 불만귀족층·몰락귀족 또는 6두품의 활로모색으로도 도당유학이 권장되었다.0992)申瀅植, 위의 책, 440쪽.

 ≪三國史記≫의 내용에서는 신라가 “子弟를 당의 국학에 입학·수업케 함으로써 예의의 나라가 되었다”는0993)≪三國史記≫권 12, 新羅本紀 12, 경순왕 9년(末尾 史論). 사실 외에는 구체적 언급이 없다. 이에 대해서≪東史綱目≫의 기록에서는 자세히 언급하고 있다.

신라는 당에 朝貢한 이래 항상 왕자를 宿衛로 파견하였고, 또 학생들을 太學에 입학시켜 학업을 닦게 하였는 바, 그 기간은 10년이었다. 그외 학생들로서 그곳에 입학한 자들이 100여 명에 이르렀다. 이때 책 살 돈은 본국(신라)에서 지급하였으며 그외 책값이나 숙식비는 唐의 鴻臚寺에서 공급하였으므로 유학생의 수가 끊이지 않았다(≪東史綱目≫권 5上, 진성여왕 기유 3년).

 즉 유학생은 10년간 수업하는데 그 비용은 양국의 공동부담이므로 국비유학이라는 사실은 알 수 있다. 입당수학시에 개인비용을 사용했음을 들어 金雲卿·金可紀·최치원 등을 사비유학생으로 설명하는 주장도 있으나,0994)金世潤,<新羅下代의 渡唐留學生에 대하여>(≪韓國史硏究≫37, 1982), 156∼159쪽. 당시 학비조달을 개인적으로 할 수 없다는 점과 당의 국자감 입학과 동시에 국가적인 보조와 빈공과 합격 후의 외직과 같은 공식적인 대우로 미루어 보아 사비유학생은 존재할 수가 없다고 여겨진다.0995)申瀅植, 앞의 책(1990), 236쪽. 또한 金巖과 최치원 등 현재 확인된 명단으로 보아 그들은 거의가 6두품 계열로 생각되어 정치적 추방이나 타협의 의미도 배제할 수가 없다.

㉮ 신라 당국은 宿衛學生과 首領을 뽑아 入朝하면서 동시에 國子監에 부속하여 공부할 수 있게 요청하였다. 이에 인명수와 성명을 갖추어 아뢰었는데, 학생은 崔愼之 등 8명, 대수령은 祈綽 등 8명, 소수령은 蘇恩 등 2명이었다(≪東文選≫권 47, 遣宿衛學生首領等入朝狀).

㉯ 景文王 9년 왕자인 蘇判 金胤 등을 謝恩使로 입당시켰다. … 또 학생인 李同 등 3인에게 胤을 따라서 국학에서 공부하게 하여 학자금 300냥을 주었으며, 그 후 이동은 빈공과에 합격하였다(≪三國史記≫권 11, 新羅本紀 11, 경문왕 9년).

㉰ 開成 원년 6월 신라의 宿衛王子 金義琮 등이 학생을 대동하고 와서 공부하기를 청하니 舊例에 따라 2인을 머물게 하고 의복과 식량도 관례에 따라 지급하였다(≪唐會要≫권 36, 附學讀書).

㉱ 渤海國은 賀正使로 왕자인 大俊明에 16명을 따라 입조케 하였다. 이에 唐帝는 靑州觀察使에게 6인만 上都에 오게 하고 나머지 10인은 되돌려 보냈다(≪唐會要≫권 36, 附學讀書).

 윗 글에서 볼 수 있듯이, 신라는 조공사·하정사·사은사·숙위 등 사절편에 3∼16명의 학생을 파견하면, 당에서는 간단한 시험을 거쳐서 국학에 입학·수학케 하였다. 학생들은 10년간의 수학기간 동안에 빈공과에 합격을 하게 되면 文人으로서 또는 관리로서의 지위를 얻게 된다. 합격한 인물에 대하여 憲德王 13년(821)에 합격한 金雲卿0996)≪玉海≫권 116, 選擧 3, 咸平賓貢 및≪東文選≫권 84, 送奉使李中父還朝序. 이후로 58인의 명단 중 그 일부가≪동사강목≫(권 5上, 진성여왕 3년)에 수록되어 있어, 그 윤곽이 드러나게 되었다.0997)金世潤은 嚴耕望·李基東의 연구와 여러 문헌에서 52명의 명단을 확인하였으며(金世潤, 앞의 글, 160쪽), 李基東은 구체적인 활동자를 중심으로 38명의 명단을 확인하였다(李基東, 앞의 책, 290∼291쪽). 開成 원년(희강왕 원년, 836)에 파견된 발해 유학생 16명 중 6명만 수학케 한 것은 현지에서 유학생 수를 제한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국가의 공식적인 요청에 따라 입학한 후, 정부의 보조로 수업을 한 국비유학생이기 때문에 그들의 귀국방법도

㉮ 敬宗 寶曆 원년에 신라 국왕 金彦昇(헌덕왕)이 먼저 가 있던 太學生 崔利貞·金叔貞·朴季業 등 4인의 귀국을 요청하였다. 동시에 새로 金允夫·金立之·朴亮之 등 12명을 국자감에 배치하여 학업을 닦에 하였다(≪冊府元龜≫권 999, 外臣部 43, 請求).

㉯ 신라 당국은 먼저 보냈던 宿衛學生으로 공부가 끝난 4인은 지금 年限이 만료되었음을 알려주는 동시에 귀환을 청하며 삼가 金茂先·楊潁·崔渙·崔匡裕 등 명단을 제출하는 바이다. … 지금 이들은 이미 10년의 기한을 채웠다. … 文德 원년에 만기로 귀국한 金紹裕 등의 예에 따라 김무선 등과 아울러 首領들을 賀正使 金潁의 배편에 수행하여 귀국시켜 주시기 바랍니다(≪東文選≫권 84, 送奉使李中父還朝序).

와 같이 入朝使(조공사·하정사) 또는 숙위의 귀국편에 데려오게 되었다. 그러나 기한이 초과한 유학생들의 상당수가 귀국을 거부하고 있어서 문성왕 2년(840)에는 105인이 넘어 당의 추방을 당하기에 이르렀다.0998)≪三國史記≫권 11, 新羅本紀 11, 문성왕 2년. 이들의 귀국거부사건은 빈공과의 급제 문제와 6두품으로서의 귀국 후 활동제한에 따른 불만 때문이라 생각된다. 결국 국비유학생들의 귀국거부사건은 신라정부로서도 문제이지만, 유학생 자신도 빈공과에 합격하였다 해도 당의 대우가 신통치 않았으므로

이른바 빈공과란 매년 別試를 榜尾에 이름을 붙이는 것으로 모든 사람과 병열할 수는 없다. 더구나 벼슬을 제수받음에 있어서도 卑官이나 冗官이 많아 혹은 그대로 귀국하기도 하였다(≪東文選≫권 84, 送奉使李中父還朝序).

에서와 같이, 당의 관직이 비관·용관에 불과했으므로, 그곳에서의 체류도 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다만 일부 숙위학생은 唐帝의 從難功臣이나 長史 또는 勅使로 이용하는 등이 최고의 대우였기 때문에,0999)宿衛學生 중에서 梁悅은 德宗(당)의 從難功臣이었고(≪三國史記≫권 10, 新羅本紀 10, 애장왕 원년), 金雲卿은 淄州長史로서 文聖王의 冊封使(勅使)로 귀국하였다(≪三國史記≫권 11, 新羅本紀 11, 문성왕 3년). 그외 裵光은 監察御史(≪三國史記≫권 11), 金裝은 海州縣勅使(≪東文選≫권 47) 등을 역임하였다(申瀅植,앞의 책, 1990, 247∼248쪽.) 결국 그곳의 문인들과의 交友를 통해 자신의 실력을 과시하고 文名을 유지할 수밖에 없었다. 즉 朴仁範과 憑氏一派와의 관계를 비롯하여 최치원이 高騈·顧雲·羅隱·張喬 등과의 詩友之交를 맺어1000)李基東, 앞의 책, 298∼301쪽. 文章이 中華國을 감동시키는 단계가 가능하였다.1001)≪三國史記≫권 46, 列傳 6, 崔致遠.

 그러나 이들 숙위학생들은 귀국하더라도 신분적인 한계에 부딪혀 본국에서의 활동도 부진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신라정부안에서의 적절한 관직이 없었으므로 불가피했을지라도, 당대의 文人·巨儒를 外職(少守·太守)에 임명하였다는 사실은 적절한 대우가 아니었다. 현존 문헌에 남아 있는 경우를 살펴보면<표 5>와 같다.

인 명 외 직 전 거
金   巖 良·康·漢州太守, 浿江頭上 ≪三國史記≫권 43(金庾信下)
金 雲 卿 長沙縣副守 長興寶林寺普照禪師彰聖塔碑
子   玉 楊根縣小守 ≪三國史記≫권 10(원성왕 5년)
梁   悅 豆肹縣小守 ≪三國史記≫권 10(애장왕 원년)
金 立 之 秋城郡太守 昌林寺無垢淨塔願記
金   埈 榻城郡太守·西京小尹 ≪三國史記≫권 46,≪東文選≫권 19
崔 致 遠 富城郡太守 ≪三國史記≫권 46(崔致遠)

<표 5>宿衛學生의 外職 역임표

 <표 5>에서 알 수 있듯이 숙위학생들이 주로 받은 관직이 외직이었음은 진골 만능상태를 고려한다면1002)李基東, 앞의 책, 178∼179쪽. 불가피했을 것이며, 진골 계층의 횡포를 피해 지방에서 자신의 王道思想을 펴볼 수 있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변방의 농민층에게 유학을 보급시키고 지식을 넓혀줌으로써 농촌사회를 개발시켜 경직되고 폐쇄된 골품사회를 해체시키는데 큰 계기를 이루었을 것이다. 한편 일부이지만 나말에 이르러 文翰職에의 참여는 유교정치 구현에 새로운 활력소가 되었으리라 본다.

 <표 6>에 의하면, 金立之·崔致遠 등 대표적인 숙위학생들이 문학직에 참여하고 있다. 이와 같은 도당유학생들의 한림직 진출은 나말의 中事省과 같은 近侍職의 참여와 함께 왕권의 강화를 위한 측근정치의 지향에 큰 계기를 이룬 것이다.1003)李基東, 앞의 책, 263쪽. 따라서 중앙에서의 유교정치이념의 추구, 지방에서의 지식보급은 나말 혼란기에 있어서 학문과 유학을 보존시킴으로써 지방문화의 수준을 한단계 높혔을 뿐 아니라, 나말여초에 문화연속성을 유지하는 것을 가능케 하였다고 하겠다. 이러한 문화연계는 고려초의 국사편찬과 과거제 실시를 가능케 함으로써 왕권강화에 큰 방향을 제시했던 것이다.

인 명 외 직 전 거
金 立 之 翰林郞 昌林寺無垢淨塔願記
崔   賀 翰林郞 太安寺寂忍禪師塔碑
崔 致 遠 侍讀兼翰林學士 ≪桂苑筆耕≫
朴 居 勿 侍讀右軍大監 皇龍寺九層木塔刹柱本記
朴 仁 範 翰林學士瑞書學士 ≪東文選≫권 117, 興寧寺澄曉大師寶印塔碑
朴   邕 侍讀翰林 ≪桂苑遺香≫
崔 愼 之 瑞書院學士 ≪三國史記≫권 46
金 仁 圭 守翰林郞 ≪桂苑筆耕≫
金   薳 崇文館直學士 沙林寺弘覺禪師碑

<표 6>숙위학생의 文翰職 진출

*申瀅植,≪統一新羅史硏究≫, 246쪽에서 전재.

 대부분의 유학생들은 귀국 후 정부의 차별대우나 불우한 처지에 불만을 품고 “재주를 펴지 못해 침울한” 상태로1004)≪東史綱目≫권 5, 효공왕 2년 11월. “불우함을 스스로 상심하며 다시 벼슬할 뜻이 없이 山林과 강가·해변에서 소요하며” 지낼 수밖에 없었다.1005)≪三國史記≫권 46, 列傳 6, 崔致遠.

金可紀는 신라인이다. 賓貢進士가 되었으며, 특히 道敎에 깊은 뜻을 지녀 번거로운 사치를 싫어하였다. … 특히 박학다식하고 문장이 깨끗하며 그 자태가 너그러워 擧動言談이 중국의 풍을 하고 있었다. 홀연히 終南山의 午谷에서 허술한 집을 짓고 우거하면서도 조용한 생을 보냈다. … 그 후 3년에 귀국의사가 있어 배편으로 갔다가 다시 와서 道服을 입고 종남산에서 음덕을 쌓고 일생을 보냈다(≪太平廣記≫권 35, 金可紀).

 위와 같이 김가기가 귀국 후 다시 중국으로 건너가 그 곳에서 일생을 마친 사실로 보아, 유학생들의 정치적·정신적 갈등을 엿볼 수 있으며, 최치원의 四山碑銘이나 崔愼之 등의 禪師碑銘 찬술에서 그 대강을 짐작케 한다.1006)崔致遠은 眞鑑禪師碑文(河東, 雙谿寺), 朗慧和尙碑文(保寧 聖住寺), 智證大師碑文(聞慶, 鳳巖寺) 등을, 崔愼之는 大鏡大師碑文(楊平, 菩提寺), 朗圓大師碑文(江陵, 地藏禪院), 法鏡大師碑文(忠州, 淨土寺), 澄曉大師碑文(寧越, 光寧寺) 등을 찬술하였다. 그리고 崔賀는 寂忍禪師碑文(谷城, 大安寺)을 작성하였다.

 그러나 이들 渡唐留學生인 숙위학생들은 盛唐文化를 흡수·전래하여 신라의 문화를 개발하였으며, 특히 유학을 중심으로 한 漢文化를 이땅에 꽃피우게 한 장본인들이었다. 이들은 중앙에서는 문한직이나 근시직을 통해 王道政治의 본질을 뿌리내리게 하여 고려초 王權强化를 위해 그 학문적 바탕을 제시하였다.

 또한 그 구체적인 사례로 科擧制 실시와 國史編纂의 필요성을 제시하여 고려왕조 성장에 기초를 마련하였다. 한편 그들은 지방의 외관에 부임하면서 농촌에 새로운 지식을 보급하고 농민에게 유학을 전수시켜 향촌의 문화를 향상시켜 고대 질서 극복에 디딤돌이 되게 하였다. 따라서 西京의 학원이나 淸州의 학교 설치와 豪族 대두의 학문적 배경이 될 수 있었다.1007)金光洙,<羅末麗初의 地方學校問題>(≪韓國史硏究≫7, 1972) 참조.

 숙위학생들의 역할에 대해 金富軾은

항상 자제를 중국에 보내어 숙위케 하고 국학에 입학하여 강습케 하였다. 이로써 聖賢의 風化를 이어받아 鴻荒의 습속을 고쳐 禮義之邦이 되었다(≪三國史記≫권 12, 新羅本紀 12, 경순왕 9년 末尾 史論).

고 하였다. 즉 유교의 덕목과 國民敎化의 장을 마련한 것이다. 특히 장기간의 滯唐生活과 修學過程에서 경험한 漢文化와 유교사상을 신라에 전달함으로써 신라문화를 한 차원 높였으며, 金巖의 陰陽家法이나 김가기의 神仙之術과 같은 새로운 학문세계에까지 그 범위를 넓혀주었다. 더구나 6두품 계열의 숙위학생들이 갖고 있었던 비판적인 견해와는 달리 崔光胤(崔愼之의 아들)은

일찍이 賓貢進士가 되었다. 유학의 길로 晋에 가는 길에 契丹에 포로가 되었으나 그 재능을 인정받아 관리로 발탁되었다. 사신편에 거란의 침략성을 알려 왕에게 전달되었기 때문에, 왕은 30만을 뽑아 光軍을 만들게 되었다(≪高麗史≫권 92, 列傳 5, 崔彦撝).

와 같이 외침이 위험성을 전달하여 光軍司 설치의 주역이 되었다. 무엇보다도 최치원의 禮와 道, 敬天과 尊王思想에 입각한 유교정치이념은

征伐은 있으되 戰爭은 없어야 한다는 것은 실로 王道에 부합되는 것이다. … 무기(干戈)를 녹여 농구를 만들어 오랫동안 부귀토록 할 지어다(≪東文選≫권 3, 賀殺黃巢表).

라는 사실에 잘 나타나 있다. 이런 有征無戰의 평화주의사상은 王建의 정치사상으로 연결되었으며, 愛民·勸農思想은 왕건의 取民有度나 成宗의 籍田·祈穀制로 이어진 것이다. 다만 이들 도당유학생들이 가진 유교사상은 불교·도교·풍수사상과 복합된 것으로<訓要十條>의 정신적 기반이 되었다.1008)申瀅植, 앞의 책(1984), 456쪽. 이러한 사상적 결합은 ‘五常과 5戒는 같은 것이며, 王道를 실천하는 것은 佛心에 부합된다’는 최치원의<朗慧和尙碑銘>에 뚜렷이 나타난다.1009)申瀅植, 위의 책, 452쪽.
李在云,<孤雲 崔致遠의 三敎融合論>(≪先史와 古代≫9, 1997), 47∼51쪽.

 결과적으로 통일신라의 도당유학생인 숙위학생들은 우리 나라 유학발달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으며, 왕도정치이념을 강조함으로써 왕권강화 내지는 정치발전에도 크게 기여하였다. 특히 나말여초의 전환기에 문화공백을 메웠으며 농촌의 문화수준을 높혀 전반적으로 사회발전에 이바지하였다. 나아가서 유교에다 불교와 도교 등 다른 사상을 결합시켜 한국사상사에 있어서 새로운 변화를 주도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나말의 대표적인 文豪인 3崔 중에서 崔承祐는 후백제에, 최신지(彦撝)는 고려왕조에 협조함으로써 스스로 반신라적 움직임을 보였지만 나말에 이르러 文藝는 찬란히 빛나고 이들 3崔 및 朴仁範 등 대가가 나와서 高麗文藝의 기초를 이루었음은 간과할 수 없다.1010)今西龍,≪新羅史硏究≫(近澤書店, 1933), 369쪽. 그러나 이들 숙위학생들의 현실비판의 자세는 王巨仁의 글에서 나타나듯이1011)≪三國史記≫권 11, 新羅本紀 11, 진성여왕 2년. 고대사회에 있어서 유교가 지닌 이중성을 엿볼 수 있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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